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오늘 하루는 성실하게 #8
'창작형 인간의 하루'는 임수연 기자가 7인의 창작자와 나눈 인터뷰 모음집이다. 나를 웃게도 울게도 하는 콘텐츠를 업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매일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었다. 한때 콘텐츠 회사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웹툰을 매일 볼 수 있다니! 그것도 일을 핑계로 마음껏 소비할 수 있다니! 너무 행복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에 치여 웹툰을 억지로 소화해야 상황이 반복되니 더 이상 콘텐츠를 보는 게 즐겁지 않았다.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내가 보고 싶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지, 업으로 삼는 건 나와 맞지 않았다.
여전히 콘텐츠를 사랑한다. 퇴근하고 나서, 약속 없는 주말에, 약속 장소를 향하는 길에 콘텐츠를 탐독한다. 친구난 직장 동료와 만날 때도 '요즘 XX 재밌지 않아?' 하면서 콘텐츠로 대화를 이어간다. 그만큼 콘텐츠는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친구이다. 물론 콘텐츠를 사랑하면서도 콘텐츠를 업으로 삼는 것이 맞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지만 ( 시간이 지나면 또 바뀔지도? ) 책에서 콘텐츠를 사랑하는 동시에 업으로 사는 이들의 인터뷰가 흥미롭게 읽혔다. 특히 (요즘 내 상황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은규 시사교양 PD님의 인터뷰에서 헤맨다는 표현을 긍정적으로 사용한 것이 인상 깊었다.
Q : 본격적인 편집에 들어가기 전에 푸티지를 보는 시간을 어느 정도 되나요?
A : 6개월 동안 한 방송을 만든다면 6개월 내내 볼 수 있겠죠. 프리 기획 기간이 3개월 정도 주어진다면 제가 온전히 헤맬 수 있는 기간이 3개월 정도 주어지는 거예요. (중략) 시간이 좀 더 주어진다면 더 많이 보고 더 헤맬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탐색하는 시간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했다고 여기는 게 아니라, 온전히 헤맬 수 있는 시간이라고 표현한 것은 나에게 꽤나 위로가 되는 말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나에게 헤맬 수 있었던 시기는 늘 있었지만, 그 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헤매는 시간이 비생산적이라고 단정 짓고 길을 찾지 못할까 봐 불안해했다. 나름(?) 연륜이 쌓이다 보니 깨닫게 된 것은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라도 길이 있다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저앉아 있으면 그 자리에 머물게 되겠지만, 뭐라도 바꿔보려고 노력한 시간은 분명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건 확실하다.
김보라 감독님의 인터뷰에도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삶이 참 오묘하다고 느끼는 게 그 순간에는 잘 인지하지 못했던 선택 하나가 사람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점이에요
가고 싶었던 영화학교와 영화 잡지 회사에 떨어지고 가게 된 유학이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다고 한다. 이동진 영화 평론가의 '오늘 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라는 말처럼 오늘 하루는 성실하게 발버둥 치되 나머지 일은 맡겨버리자. 사람 인생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마지막으로 김보라 감독님의 업에 대한 자세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어떤 분야에서 일을 하든 우리는 시도하고 수정했다가를 수없이 반복하고 때로는 전부 버렸다가 새롭게 다시 시도하는 일을 해야 좋은 작품, 좋은 프로젝트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나 보다.
영화를 만든다는 건 결국 자기 자신과 만나는 과정이에요. 내면에서 시작한 작품이라고 자서전이 되어버리면, 그야말로 '폭망'하죠. (중략) 그런데 막상 버리고 나니까 속이 후련하더라고요.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거예요. 인생도 그런 것 같아요. 마치 도자기 장인이 도자기를 만들었다가 깨는 과정을 거치면서 더 좋은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요.
그렇다면 오늘도 시도하고 다시 수정하러 출근을 해보자. 하다 보면 뭐라도 되어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