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오늘 하루는 성실하게 #14

by 야무JIN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올해 세 번째 완독 한 책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다. 이 문장이 워낙 유명해서, 책을 읽지 않았음에도 여러 차례 접했었다. 성장을 대표하는 책으로 잘 알려지다 보니 'Boys be ambitious'와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졌을까 라는 생각으로 독서를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그런 내용은 아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첫 페이지는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데미안>을 대표하는 키워드를 꼽으라고 한다면, 불안 투쟁 그리고 성장 3가지이다. 비중으로 따지면 4 : 4 : 2 정도. 성장에는 어쩔 수 없이 불안이 따르고 결국 성장하려면 투쟁해야 하기 때문일까, 이 책에서는 싱클레어의 불안과 투쟁을 주로 다룬다.


책을 다시 폈을 때, 가장 좋았던 부분은 역시나 첫 페이지였다. '나 또는 I'가 가장 중요한 시대에 <데미안>이 여전히 인기 있는 이유도 싱클레어='나'의 성장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싱클레어가 '부모님의 밝고 바른 세계'에서 이탈하는 것을 두려워한 것처럼, 사회에 어울려 살다 보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평균'에 나도 모르게 집착하며 '정상'의 범주에 들어가고 싶어 하고 어긋나는 것을 불안해한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나'를 중시하게 된 것이 아닐까. 만약 이 세상에 나 혼자였다면, 나에 대해 알아가는 것에 이렇게까지 열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SNS를 계기로 나를 둘러싼 세계가 더 넓어지면서, 오히려 '나'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도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이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거나 속을 터놓거나 '나'를 알아가기 위한 강연을 듣거나 책을 읽더라도 그 풀이를 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을 때, 어지러운 내 마음을 가지런히 정리해서 카페에 앉아 친구에게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다. 그들은 대체로 나를 이해해 준다. 하지만 그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내 마음의 일부일 뿐이다. 내가 겪은 고통, 슬픔, 아픔은 오롯이 내 것이다. 누군가에게 커튼을 젖히듯 살짝 보여줄 수는 있지만, 모두 내가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인간이 되기를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가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풀이를 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데미안>을 대표하는 키워드가 있는데, 예를 들면 '밝은 세계', '카인의 표적', '베아트리체', '아브락사스'이다. 이 키워드 중 가상의 구원을 의미하는 '베아트리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청소년이 된 싱클레어는 우연히 본 여성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녀를 숭배하며 술을 끊고 삶의 질서를 바로 잡으려고 한다. '베아트리체'는 싱클레어가 만들어낸 가상의 구원이다. 지금 시대를 적용해 보면 '소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물건만 사면 (내가 가진 X백 개의 물품 중 1개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인강을 들으면 (완강&복습을 하고 실무에 적용하더라도 실력을 쌓으려면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이 책을 읽으면 (책 한 권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180도 달라지지 않는다) 내가 완전히 바뀔 거라는 환상을 가진다.


문제는 내가 이 가상의 구원(소비)을 포기한다고 했을 때, 대체할만한 게 없다는 것이다. 설사 대체할만한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더라도 이것 없이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노동을 해서 급여를 받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소비하도록 설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상의 구원 없이 나는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상상만 해도 답답하다.

그럼에도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로 소비일기를 채우고, 사치품 혹은 충동적으로 구매하는 것들을 줄이는 시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씀씀이가 커지는 것은 쉬워도, 커진 것을 작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쓸데없는 소비를 줄인다면, 내가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금액이 크지 않게 되고 매달 받는 월급에 얽매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 혹은 결정을 해야 할 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 반드시 실행에 옮기지는 않더라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잠깐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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