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를 맞아 올레길 시즌2를 하러 제주도에 왔다. 하루 35km, 46,000보, 그나마 이것도 자제한 결과다. 오전에 이미 3만보를 찍고 점심먹으면서 오후에는 얼마나 더 걸을지를 고민한다. 딱 오전만큼 더 걸을 수도 있겠지만 처음 가는 길도 아니다 보니 너무 빨리 가버리면 아쉬울 것 같아 걸음을 늦춘다. 마을 정자에 눕기도 하고, 카페에서 멍때리기도 하고, 편의점 파라솔 의자에 앉아 폰으로 책을 읽기도 한다.한마디로 오후는 오전보다 다소 널널하게 걷는다. 하루중 가장 더운 시간대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걷는데 요령이 생겨서 관절이나 근육이 아프지는 않은데, 옷이나 신발과 닿는 살갗이 쓰리다. 수 만번이나 리드미컬한 움직임을 반복하다 보니까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무리해서 빨리 걸으려 들면 많이 못걷는다. 느리더라도 자세에 신경쓰고 다리에 힘을 빼면서 걸어야 한다. 특히 다섯발가락으로 골고루 내딛는 게 중요하다. 힘이 들어가는 부위는 반드시 통증이 뒤따른다.
트래킹은 많은 거리를 걷지만 하이킹에 비해 칼로리 소모가 높지는 않다. 걸음수가 3만보 이하라도 하이킹의 칼로리 소모는 3~4000에 달할 때가 많다. 물론 올레길도 평탄한 길만 있진 않다. 9. 10. 18. 21 코스는 꽤 많이 오른다.
한림면 금릉포구의 석양샷. 애월에서 한경면에 이르는 제주 서부해안은 해질녘 사진 찍는 묘미가 있다. 지는 해를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서둘러 여기 저기를 다니며 셔터를 눌러댔다. 렌즈가 아쉬웠다. 단렌즈 들고올껄..
처음 올레길을 돌때 너무 좋았던 추억의 장소가 두 바퀴째에는 그 아련한 기억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기도 하고, 처음 지날 때에는 기억에도 남지 않았던 장소가 두 바퀴도는 지금은 새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거꾸로 돌아서일 수도 있다. 서두에 자랑스레 얘기했듯이 걷기의 가성비(?)가 좋아지다보니 21코스에서 시작된 시즌2가 벌써 13코스에 이르렀다.
오늘 간 14-1코스는 올레길 전체 코스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했던 코스였는데, 길이 조금 변경되고(문도지오름을 올라갈 수 없다) 시즌1 때에는 4월의 상큼한 꽃내음이 숲 전체에 펴져 있어서 걷는 내내 기분이 상쾌했었는데, 지금은 쿱쿱한 습기를 머금은 그냥 우거진 숲에 불과했다.
니콘 풀프레임으로 찍은 사진들. 위의 금릉포구 석양샷은 올림푸스 마이크로포서드로 찍은 사진이다. 사진을 못찍어서 그런가 초급기와 중급기의 차이가 있음에도 찍은 사진들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다. 배낭을 메고 틈틈이 폰으로 길을 확인하는 데다가 카메라를 손에 들고 다니자면 조금 성가신 감도 없지 않다. 그래서 정말 힘들 때에는 배낭안에 카메라를 넣어가기도 하는데, 그러다가 문득 멋진 풍경을 만나면 허접한 폰카메라로 찍다가도 '이게 뭐하는 일이람'하고 자책하면서 다시 카메라를 꺼낸다. 맞다. 나는 사진을 찍으려고 올레길 시즌2를 진행중이다. 사진은 음악이나 미술만큼이나 소중하다.
누렇게 익은 보리밭과 선운정사. 시즌1일 때에는 선운정사에서 점심 한끼를 공양받았다. 맛을 떠나서 당시에 보살님들이 보여주신 인심이 가끔 생각날 정도여서 이번에도 은근한 기대감을 가지고 시간을 맞춰 둘렀는데.. 평일이라 그런지 조용하기만 했다. 휙 둘러보고는 그냥 발길을 돌렸다. 요즘 교회를 잘 나가서 그런가..절밥 운이 안따르네..
제주도의 보리, 양파, 당근, 선인장은 실제로 보면 더 멋있다.
제주시 서부에서 애월에 이르는 지역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넘쳐난다. 아주 바글 바글하다. 특히 젊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그야말로 물밀듯이 대부분의 관광명소를 점령하고 있다. 15A코스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서 202번 버스를 탔는데, 애월관광을 끝내고 제주시로 돌아가려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버스를 꽉 채워서 출근길 9호선을 방불케 했다.
아래 사진들은 북제주의 삼양해변 인근과 애월의 해안 산책로이다. 내가 제주도를 좋아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내륙에선 느낄 수 없는 제주만의 바이브가, 그것도 지역에 따라서 다르게 존재한다는 것 때문이다. 동서남북, 중산간, 어디 하나 버릴 데가 없다. 각자의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왜 여긴(이 멋진 곳에) 사람들이 없지? 의문을 갖게 되는 숨은 명소들도 많다.
21코스에서 17코스까지는 해안을 따라서 이어지는 길이었다면, 16 코스부터 14코스까지는 내륙 코스와 해안 코스가 병행되다가 13코스부터 9코스까지는 내륙 코스 위주로 전개된다. 다소 힘도 들고 교통도 나쁘고 식당과 같은 편의시설도 부족하다. 올레길을 골라서 가고자 하는 분들께는 9~13코스를 추천하지 않는다. 정말 외진 곳도 가끔 나타난다. 하지만 나는 가장 야생의 곶자왈을 만날 수 있는 11코스만큼은 좋아한다. 참고로 제일 힘든 코스는 9코스와 18코스인데, 18코스는 힘든만큼 가는 내내 멋진 경치가 보상을 해준다. 이렇게 얘기해놓고 보니 9코스는 힘들기만 할 것 같지만 안덕에도 나름의 운치가 있다. 언젠가 올레길을 걸으면서 알게 된 제주의 숨은 명소들을 글로 올려보겠다. 숨어 있는 멋진 해변, 멋진 공원, 멋진 정자. 앞서 얘기했던 문도지 오름도 그런 명소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제 여름이라 한동안 올레길 갈 일이 없을 듯 하다. 오늘도 다행히 선선한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한낮에는 햇빛이 뜨거웠다. 시즌1때에는 7,8월에도 많이 다녔었는데 두번째 길은 선선한 바람 맞으면서 여유있게 다니고 싶다.
마지막으로 몇 년전 14코스를 걸을때 중간에 갑자기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서 우산도 날아가고 걷기는 커녕 몸을 가눌 수도 없는 상황이 있었다. (가끔 제주도 강풍 얘길 묘사하면.거짓말이라고 안믿는 사람이 있다. 초속 12m 이상의 바람은 진짜 몸이 날라갈것 같다니까..) 간신히 월릉에 도착했을 때는 비에 온몸이 젖어서 (4월인데도) 오들오들 떨면서 앞도 안보이는 상태에서 어디라도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아래 시진에 보이는 식당 사장님이 어서 들어오라고 하시고 창고에서 전기난로를 꺼내다가 틀어줘서 겨우 저체온증을 모면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아침 나절, 문도 안연 시간에 지나가는 터라 인사도 못드렸지만 부족하나마 이렇게라도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