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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성과 상대주의

에코의 위대한 강연이라는 책을 빌미로 풀어 본...

by 조성봉 UXer

요즘은 날씨가 더워서 주말에도 야외활동이 많지 않다. 트래킹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여름의 주말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나날이다. 집에 있어봐야 간간히 집안일 도와주는 것 외에는 종일 유튜브나 보는 정도라서.. (그러지 않기 위해) 요 몇주간은 근처의 도서관을 찾았다.


요즘 새로 생긴 도서관은 너무 잘 만들어놨다. (누울 수 있는) 빈백, 다양한 형태의 소파가 공부를 하지 않아도 편하게 머무를 수 있게 한다. 주말에 일 할 때는 집 바로 옆의 투썸플레이스를 자주 가지만, 도서관은 쉬러, 읽으러 찾게 된다. 평소엔 좀처럼 들지 않는 종이 책을 들려고 도서관을 찾는다.


요즘 움베르토 에코의 '위대한 강연'이란 책을 읽고 있다. 한 번에 다 읽을 분량도 아닐 뿐더러 술술 읽을만한 내용도 아니라서 갈 때마다 100페이지 정도를 읽고 책갈피를 해놓고 원래 있던 자리에 얌전히 꽂아 놓고 온다. 몇주째 책갈피가 그대로인 것을 봐서는 그 책을 찾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인 것 같다.


이전 글들에서 주지했다시피 나는 도올 김용옥선생님, 움베르토 에코, 임마누엘 칸트, 후기 구조주의 철학(데리다, 레비스트로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엄청난 지식을 뽐내면서 여러 분야를 넘나들면서 문제를 해석하고 결론을 명확하게 기술하는 사상가를 좋아하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하지만 좋아할 뿐, 이해는 매우 짧다)


에코가 어렵고 멀리 느껴지는 것은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낯설기 짝이 없는) 중세 철학 및 미시적인 역사를 '정말 자주' 언급하는 게 첫번째이고, 그의 주 전공분야인 '기호주의'란 게 도대체 무슨 소린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게 두번째 이유일 것이다. 2개가 결합된, 다시 말해 중세의 기호주의에 대해서 다룬 책들은 아무리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서서히 멘탈을 붕괴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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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k을 통해서 지브리 스타일로 그린 움베르토 에코(좌)와 토마스 아퀴나스(우). 어째 둘 다 에코 같다;;

(작고하셨지만) 만약 에코에게 '누가 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단연코 '토마스 아퀴나스'를 꼽았을 것이다. 그의 저서들에서 워낙 아퀴나스가 많이 언급되다보니 의심이 가래야 갈 수가 없다. (내가 에코를 처음 알게 된 것도 대학 2학년때 '토마스 아퀴나스를 찬미함'이라는 그의 논문을 읽고 나서부터이다)


<에코의 위대한 강연>은 여러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지난주에는 '절대주의 vs 상대주의'애 대한 논제를 읽었다. 고대 서양 철학이나 종교는 절대주의와 절대적 보편성을 전제한다. 가령 플라톤은 우리가 감각하는 현실 세계의 개별적인 사물은 불완전한 복제품에 불과하며, 영원 불변한 '이데아'만이 참된 실제라고 얘기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 사물들의 공통된 특징(eidos)들을 관찰하여 추출해 나가다 보면 보편적 개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귀납적 논리학을 주창했다.


진리는 하나의 것이며, 영원하며, 불변하며, 모든 이성적 존재에게 공통적이다. (Truth is one, eternal, unchangeable, and common to all rational beings)" - 토마스 아퀴나스



에코는 절대적 보편성이라는 것은 결국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사회가 상호 동의하고 보편적이라 여기는 관점을 공유했기 때문이며, 그것은 사실 '가장 합리적인 설명(담론)'에 불과하다고 결론내린다. 반면 상대주의는 '사실은 없고 해석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니체의 말을 인옹하면서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면 우리는 어떤 것도 비판할 수 없게 되며, 결국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상황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가령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조차도 '하나의 관점과 선택'으로 치부될 수 있다. 그래서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 하에 대화와 타협으로 서로의 관점을 조율하고 독단적 절대주의가 갖는 위험과 극단적 상대주의가 갖는 위험을 동시에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생각(나는 보편적이다. 내 생각은 절대적 기준에 부합한다)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더 넓게는 사회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진단하고(진단받고), 수정/적응해 나갈 필요가 있다. '내가 맞아. 나는 옳아.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라고 항변하면서 자신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일상속의 위험한 인물'들을 얼마나 많이 만나 왔는가?


내가 맞아. 나는 상식적이야. 저 사람들 왜 저래? 미쳤나 봐, 요즘 세상에 누가?, 뇌절이다.

최근에 만난 어떤 이는 '자기가 너무 상식적이며, 자기가 내세운 주장이 가장 합리적이다'고 항상 언급한다. 그러나 그는 나쁜 인성과 고집을 지닌 독불장군에 불과했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이상한 사람'이고, 심하게 표현하자면 '소시오패스'에 가까웠다. 그러면서도 항상 자신의 생각이 일반적이고 합리적이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어쩔 때는 그렇게 우기는 것 자체가 감탄스러울 정도이다. 그를 더 연구하고 싶지만 만나기가 꺼려져서 그만뒀을 정도다.


디자이너, UXer가 도달해야 할 관문은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보편적인 시각을 획득해서 디자인 대상, 사용자 경험을 바라봐야 한다. 그것을 정확하게 읽어낼 수 없다면 디자인은 결국 그(녀)만의 절대적 기준에 부합하거나, 사회적인 타협(상대주의)에 치우쳐서 유행에 편승할 뿐이다.


나도 어느 때부터인가, 스스로를 보편적인 시각을 갖췄다고 여기고 에전 만큼의 긴장이나 노력을 게을리 하기 시작했다. 게으른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스스로 보편적이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내 기준에 따르면) 당신이 잘난 것은 당신이 보편적이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보편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보편성을 지향하면 지금 무엇을 바라봐야 하는가? 세상을, 사람들을, 사람들의 경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Be humble!


물론 이것은 나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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