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당수에는 용왕이 없다.
아이러니한 뉴스 두 꼭지. 1) ‘헬리콥터맘’들의 치맛바람을 다룬 기사. 왜 우리 아들 학점이 C냐며 교수에게 전화를 거는 어머니부터, 아무래도 딸이 어제 학교를 빼먹은 것 같다며 출석 여부를 묻는 어머니까지, 사례들이 하나같이 눈물겹다. 2) 대학생들의 명절 스트레스 요인을 분석한 기사. 설문 조사 결과 1위는 ‘취업에 학점까지 나에게 쏟아질 부담스러운 관심’이고, 2위는 ‘덕담을 가장해 아픈 곳을 콕콕 찌르는 잔소리’다. 관심이 곧 잔소리요, 잔소리가 곧 관심이니. 결국 같은 말이다. 대학생들은 과연 관심을 원하지 않는 것일까? 원하지도 않는데 ‘헬리콥터 맘’은 왜 자식들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단순히 ‘엄마들이 잘못했네’로 끝낼 문제는 아니다.
잔소리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은 대개 부모다. “이게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 “내가 널 위해 안 해준 게 뭐가 있니” 등 다양한 무기 앞에 자식 대부분은 무릎을 꿇는다. 그럼, 부모가 관심을 끊으면 모든 게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사실 대부분의 자식은 여전히 부모의 관심을 원한다. 지나친 간섭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부모의 칭찬을 받으면 그 스트레스가 싹 사라진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부모의 평가에 비춰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부모의 평가는 자식에게 곧잘 절대적인 기준이 되곤한다. 그래서인지 초·중·고 학생들에게 존경하는 사람을 적으라면 절반 이상이 ‘부모님’을 적는다. 유교 사상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한국 사회는 존경과 효도를 강요한다. 강요된 효는 효가 아닌 ‘충’에 가깝다.
왜곡된 효 사상이 집약된 이야기가 『심청전』이다. 심청이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팔고, 결국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 다행히 효성에 감동한 용왕이 심청이도 구하고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눈도 뜨면서 주변의 갈채를 받는다. 그러나 만약 요즘 신문 사회면에 이런 사연이 소개됐다면 심청이의 행동은 결코 효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뭔가 꿍꿍이가 있겠지 하는 의심과 함께, 딸을 팔아먹은 심 봉사는 가루가 되도록 까였을 터. 명작 고전소설이라는 후광을 걷어내고 심 봉사와 심청이를 다시 보자. 내가 낳은 자식이라는 이유로 딸을 죽음의 문턱으로 내몬 심 봉사의 행동은 엄연히 폭력이다. 뻔한 속임수에 넘어가 자기 목숨을 내던진 심청이는 ‘효녀’라는 말로 포장하기엔 지나치게 어리석다.
현대판 심청이는 커서도 문제에 마주친다. 부모의 뜻에 맞춰 행동하는 희생자 역할에 익숙하다 보니,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데 서툴 수밖에 없다. 비판에 대한 과도한 공포 때문에 정당한 요구를 할 때도 머뭇거리고, 중요한 일도 자꾸만 뒤로 미루게 된다. 상대방 앞에서 솔직하게 의견을 피력하지 못하는 자기 모습을 발견할수록, 대인 기피증은 심해진다. 사람과 쉽게 섞이지 못하는 자신을 비하할지도 모른다.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자신이 되지 못하는 것 보다 더 부끄러운 일은 없다. 진정한 자아를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보다 더 자랑스럽고 행복한 일은 없다.” 이 말을 한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독일인이지만 그 어떤 한국인보다 심청이를 안타깝게 여길 것이다. 그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아버지를 위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희생자로서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순간 당신은 가장 부끄러운 사람이 되는 거라고. 자신에게 부끄러운 사람은 결국 불효자가 될 수밖에 없다. 엄마 아빠가 화내거나 상처받을까봐 못 했던 말이 있다면 이제라도 하는 것이 좋겠다. 부모의 자랑거리가 되기 위해(심 봉사가 눈을 뜨는 것만도 못한) 연봉 몇 푼에 팔려 (공양미 삼백 석보다도 못한)하기 싫은 일에 억지로 몸을 내던지는 심청이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