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4.17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다. 일주일 만이었다. 미성년을 보는 내리 내가 맨 처음 영화를 보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이게 영화라고 알려주던 아빠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눈이 내리는 날 학원을 가던 주리는 걸음을 멈춰 세우고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말한다. '보고 싶어.' 이전의 장면까지 주리는 쉬지 않고 힘차게 달려왔다. 치고받고 분에 겨워하고 날 것의 감정에 그대로 충실하다. 엄마를 걱정하고 아빠를 걱정했으며 더불어 아빠의 외도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미행까지 감행했던 주리였다. 18살의 대범함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주리가 엄마에게 보고 싶다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장면에서 영화 제목의 <미(未)성년>이 그제야 떠올랐다.
영화 초반을 이끄는 두 주인공의 성숙함은 두 자녀의 부모보다 훨씬 이성적이면서 동시에 감성적이다. 다 자라지 못한 성숙한 아이들이 각자에게 일어난 거대한 하나의 사건인 불륜과 남동생 앞에서 취한 태도는 재빠르며 더불어 영리하다. 그렇게 성숙한 두 아이에게도 여전히 아직 채 자라지 못한 마음 한 구석이 있다는 장면은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에 고스란히 비춘다. 딸기 우유와 초코 우유. 상반된 두 우유의 맛처럼 둘은 앞으로도 계속 상반된 삶을 살아갈 테지만 여전히 같은 우유라는 점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미성년>은 여느 한국영화에서 숱하게 다뤄온 불륜영화들처럼 그 사랑을 아름답다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그저 불륜을 기점으로 두 가정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초점을 두고, 철저하게 무너지는 아버지를 여과 없이 그린다. 극 초반부터 관객을 매료시킬 만큼의 매력적인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대원은 평화의 파탄 앞에서 지독하리만큼 처절하게 무너져 내리는 모습으로 극을 마무리한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저릿할 만큼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의 역동이 감정을 거칠게 몰아세우지만, 또 한편으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처참하게 무너지는 아버지. 어쩌면 내가 지금껏 한국영화에서 가장 바라던 이상적인 모습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 제목<미(未)성년>은 어쩌면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미성숙함을 말하는 것이 아닌, 어떤 성인이 될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수수께끼의 성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나름 그렇게 정의 내리고 싶다.
어떤 어른이 될지 몰라. 그렇지만 내 부모처럼은 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