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T까지 이어지는 연장선, 제대로 시원하게 긁어주는 영화.
2019.5.12
돈 냄새를 맡은 CJ가 여성 서사의 중심이 되는 영화를 물었다. 그간 CJ가 열정적으로 들이부었던 국뽕+남성 중심의 지겨운 반복적인 영화에서 벗어나 "여성"을 주인공으로 택하여 변화를 일삼았다는 것을 예감해볼 수 있지 않을까. 돈이 된다는 이유로 덥석 미끼를 물어버린 모 게임회사와는 정반대의 행보에서 주목해볼 만하다.
80년대의 구수한 향을 풍기며 젊은 미영의 전성기에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모든 한국영화가 그렇듯 시대를 휘어잡을 것처럼 잘 나가던 주인공이 세월에 떠밀려 저 구석자리에 겨우 내 몸 하나 앉을자리를 사수하는 것으로 줄거리를 이끈다. 마흔 가량의 나이를 먹은 주인공 미영은 한 가정의 가장이다. 어린 아들이 있고, 마흔이 넘도록 일 한 번 해본 적 없는 백수 '안사람'까지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그 책임을 다한다. 그러나 요즘 세대가 그렇듯 나이 든 미영이 있을 곳은 그다지 많지 않다. 왕년에 잘 나가던 형사였음에도 민원실 퇴출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로 지목된 미영은 하루하루 빠듯하게 민원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시누이 지혜까지 비좁은 민원실로 밀려 들어온다. 그리고 그들 앞에 보란 듯이 두고 간 한 학생의 핸드폰 하나로부터 사건이 시작된다.
몰래카메라와 물뽕 강간 사건. 그간 잘 나가던 수사물들과는 완연히 다른 주제의 수사물로 예고편을 때린 걸캅스는 개봉 전부터 수많은 질타를 받았다. 살인사건과 납치사건, 미해결 사건과 관련된 미스터리, 범인과의 끝없는 추적과 복수극 등이 넘쳐나던 영화판에서 갑자기 비집고 등장한 걸캅스는 저게 말이 되냐는 식의 질타를 받으며 개봉 전부터 말이 많았다. 영화 평점만 봐도 이 영화가 끌고 있는 이슈가 어떤 것인지 새삼 실감 나게 해 준다. 극과 극의 평점에서 나타나듯이 걸캅스가 남성에게 어떠한 위협을 가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건 바로 자리의 위협이다.
소녀시대 수영이 맡은 양장미는 카이스트 출신의 전문적 해커와 맞먹는 민원실 직원이다. 장미가 어떤 식으로 해커를 통달하고 있는지, 더불어 어떻게 그들을 추적하는지에 대해선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화면에 잡히는 건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듯 화려하게 아무렇게나 키보드를 두드리는 장미의 손가락뿐이다. 마지막 엔터를 세게 내리치며 장미는 한마디 한다.
"오케이! 찾았어요!"
더없이 오버스러운 이 장면을 보며 나는 그간 숱하게 봐왔던 남성 중심의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박수를 탁탁 두 번 치며 비릿한 미소를 짓는 남자가 혓바닥으로 입술을 한 번 싸악 훑으며 한마디 하지 않던가. "자자, 선수 입장." 장미의 역할은 바로 그 역할이다. 자자, 선수 입장. 우리들의 선수 미영과 지혜가 지금 입장한다. 그러니 집중해라.
중간중간 감초처럼 등장하는 무쓸모의 미영의 남편 조지철은 끝까지 '안사람'인 제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다. 아무 쓸모도 없는 남편 역할. 이 포지션 또한 익숙하다. "여보, 요즘 많이 힘들죠? 그래도 난 당신이 하고 싶은 거 했으면 좋겠어." 늘 남편의 기를 북돋아주던 집에서 살림만 하는 아내의 포지션. 그 포지션의 조지철은 관객으로부터 배꼽을 잡게끔 유도한다. 우스운 역할과 동시에 '아유, 등신' 소리가 절로 나오는 캐릭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전형적인 남편의 모습을 그린다.
성과보다 성질을 우선시하는 지혜는 잘 나가던 미영에 감명을 받고 형사가 된다. 여자도 형사가 될 수 있음을 미영을 보고 알게 된 어린 지혜는 강력반 형사가 되었지만 짐짝 취급을 당하며 민원실로 유배당한다. 티키타카를 오가며 티격 대던 미영과 함께 민원실의 좁은 자리에 몸을 구겨 넣고 신경질적이게 자판을 두들기던 중, 민원실로 들어왔다 도망치듯 사라진 학생의 핸드폰 속 범죄현장을 목격하고서야 둘은 암묵적으로 손을 잡는다. 티키타카 하던 것만큼이나 서로를 도와가며 열정을 다한 수사를 펼치지만 결국 실패에 좌절한다. 강력반 옆에 놓인 커다란 TV에서는 연일 몰래카메라 피해 여성의 자살사건을 다루는 뉴스가 방영되지만 성과 없는 여성범죄 수사에만 투입되는 게 불만인 강력반 형사들에게는 그 뉴스가 들릴 리 없다. 그저 커다란 마약사건 하나를 물어온 것에만 날뛰게 기뻐할 뿐이다. 그에 분개한 지혜가 소리치며 형사들에게 묻는다.
"시민이 위험에 빠졌는데 그냥 지켜보는 게 경찰이에요?"
그 물음에 누구도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지혜의 악에 받친 소리에 매일 잠만 자던 팀장이 일어나 아무 멋도 나지 않게 오케이 사인을 내린다. 다행스럽게도, 팀장이 일어나 오케이 사인을 내릴 때조차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멋지게 따위 없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느낌의 오케이를 때릴 뿐이다. 그렇게 실패에 가닿던 사건을 다시 재정비하게 되며 지혜와 미영은 제대로 된 수사를 나선다. 영화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화려한 액션보다는 잔잔바리의 액션이 눈길을 사로잡는데 나는 이 역시 걸캅스와 아주 맞닥뜨릴 만큼 잘 어우러졌다고 생각한다.
영화관에서 깔깔거리며 웃어본 게 아주 오랜만이었다. 피식, 피식. 바람 빠지게 웃기던 영화와는 스케일이 다른 웃음 선사였다. 웃음만 있냐? 그렇다면 그것도 아니다. 영화를 보는 내리 쥐고 있던 손에 땀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말 그대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영화였다. 코미디와 감동, 더불어 액션까지 한꺼번에 쥐고 가는 일망타진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관을 나오며 어째서 이 영화가 남성과 여성의 구도를 철두철미하게 가르며 입방아에 올랐는지를 깨달았다. 그간 남성들이 재밌다고 줄기차게 봐왔던 액션 영화들의 자리가 크게 흔들린 탓이다. 결국 본인들의 자리에 위협을 느낀 남성들이 발 빠르게 움직인 거다. 어떻게? 1.73 점의 평점으로 말이다. 영화는 우리의 미래를 반영한다고 하지 않던가. 지겨울 만큼 익숙하게 다뤄진 마약 유통에서부터 성매매, 나아가 디지털 성범죄 모두 한 번쯤은 영화에서 먼저 다루어졌던 것들이었다. 결국 남성들은 알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성 중심의 영화가 나오기 시작하면 본격적으로 여성들이 어떤 자리에 앉을지를. 바로 그들이 꿰차고 있던 편하고 아늑한 자리를 나눠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영화가 아주 완벽에 가까운 영상물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부자연스러운 연기가 가끔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하게끔 만들기도 한다. 더불어 어라? 싶을 만큼 갑작스러운 이야기 흐름도 있다. 허참. 싶을 만큼의 오버스러움도 있다. 그러나 이 모두를 감안하더라도 만점을 주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는 영화라고 단언컨대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라미란 & 이성경 주연의 '걸캅스'가 여성 영화의 시초가 될 명작이기 때문이다.
"잘못한 것도 없는 사람들이 자기 잘못이라고 얘기해. 난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해."
이 영화의 가장 소름 돋는 반전 포인트를 스포 하자면 영화에서 소개된 모든 게 현실에서는 더욱 잔인하고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 평균 23건의 디지털 성범죄 상담이 등록되는 현실.
이 문장을 읽고도 소름 돋지 않는 당신, 이 영화를 즐길 권한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