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내게 주지 않았던 것
가정의 화목함의 개인적 기준으로 나는 성인이 된 자녀들이 부모 및 기타 어른들과의 만남을 갖는 빈도수에 초점을 둔다. 만남이 빈번할수록 화목한 가정 혹은 사랑이 넘쳐흐르는 가정이라, 나만의 개인적인 기준이 있다. 이는 내 주변인들을 둘러보면 보통 들어맞는 경우가 많았으며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임을 밝힌다.
불우한 가정사가 내 거대한 배경으로 자리하지만 나는 그 배경을 짊어지고 어렵사리 함께 살게 된 엄마에게 나의 모든 시간을 할애하진 않는다. 그를 사랑하고, 그를 동정하고, 또 이따금 가여워도 하지만 나는 엄마의 모든 것을 맞춰줄 수 없다. 그만큼의 인내심도 없을뿐더러 나는 내가 가장 우선순위이기 때문이다. 일을 그만뒀다. 버티고 버티다 결국 모든 걸 포기하듯 내려두었다. 휴식이라는 게 얼마나 달콤하고 또 늪처럼 사람을 빨아들이는지 그저 가만히 자리에 누워있어도 행복하기만 한 시간을 선사했다. 원체가 집을 좋아하고, 가만히 누워있는 시간을 즐기는 사람인지라 나는 그저 하루를 공백으로 가득 채워도 마냥 행복하기만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만의 온전한 시간을 즐길 수만 있다면 하루가 공백으로 가득해도 아무렴 상관없었다. 그리고 마치 그걸 기다렸다는 것처럼 가족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 시간이 공동의 시간이 되어 버린 거다.
친구들과 동기들은 모두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들의 시간에 맞추어 그간 못 만났던 것을 보상받듯 시간이 맞을 때마다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이모가 급작스럽게 아침 9시에 전화를 해 만나자고 했다. 고민이 됐다. 친구와의 약속은 이미 2주 전에 스케줄에 맞추어 잡아놓은 뒤였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친구와의 약속을 좀 미루면 안 되겠냐는 타박이 돌아왔다. 끝내 친구와의 약속을 미루고 이모를 만났다. 그렇게 여러 번 어느 날 갑작스럽게 아침에 연락이 와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약속이었다. 아빠 또한 다를 것 없었다. 어느 날 연락을 해 언제 시간이 되느냐고 물었다. 저만치 뒤로 약속을 잡아놓고 나는 늘 초조해했다. 가족과의 약속은 언제나 불안한 날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만나지 않은 멀어진 가족과의 평화를 계속 지금만큼만 유지하고 싶었다. 만나게 되거든 어찌 되었건 한 명은 상처를 받고 돌아가는 게 가족의 순리였다.
가끔씩 부모를 상대로 연민하고 동정을 한다. 그러나 그 기반에는 분노가 자리한다. 내 모든 분노의 근원은 어린 시절에 있다. 날 억압하던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잊지 않는다. 내 두려움을 갖고 협박하던 아빠의 목소리를 잊지 않는다. 설날과 추석의 풍경을 잊지 않는다. 고막이 나갈 것 같던, 양 뺨이 부어오른 추석날을 잊지 않는다. 칼을 들고 나를 찌르겠다며 소리치던 목소리를 잊지 않는다. 술에 절어 빌라 계단에 놓여있는 냄비를 걷어차던 소리를 잊지 않는다. 유리파편이 깨지는 소리를 잊지 않는다. 시계가 부서지고 집안이 엉망진창이 되던 순간을 잊지 않는다. 엄마의 비명을 잊지 않는다. 처음으로 갖고 싶었던 핸드폰이 눈앞에서 두 동강이 나던 순간을 잊지 않는다. 아무도 내게 그러한 사건들을 두고 괜찮냐 묻지 않았던 것을 잊지 않는다.
가족은 항상 가해자다. 그 가해의 끝에 분노를 다스리고 인내를 가지는 모든 것들은 자식 스스로 배워나가야 하는 과업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견디고 견디어 낸 시간들의 끝에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되어 한자리를 하고, 성인의 역할을 흉내 내고 있는 지금. 그들은 내 젊음마저 탐한다. 나이가 들어 외롭고 쓸쓸해 비어버린 시간에 자식의 젊음을 끼워 넣고 싶어 한다. 자식을 붙잡고 푸념하고, 함께 즐거움을 나누길 원한다. 그러나 자식들은 원하지 않는다. 부모가 그랬듯이.
나는 겁이 많았다. 저녁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시간을 때우다 집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무서워 벌벌 떨며 어렵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혼자 누군가가 올 때까지 집에 있는 시간이 무서워 잠을 설쳤다. 오빠는 종합학원에 다녔고, 아빠는 늘 회식이다 약속을 빌미로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에 집에 들어왔다. 두려움에 떨다 잠이 들고, 그다음 날 다시 밤 10시까지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다 집에 들어오는 게 내 하루의 일과였다. 책 읽기를 끔찍하게 싫어하던 내가 독서에 빠져들게 된 시기가 바로 그즈음이었다. 학교에서 최대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도서관이 문 닫을 때까지 흥미도 없던 책을 찾아 읽었다. 같은 반의 책을 좋아하던 친구에게 추천을 해달라고 졸라 처음으로 읽은 책이 재클린 윌슨의 <잠옷 파티>였다. 그때 그 책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책에 빨려 드는 느낌. 독서를 좋아하게 된 시작이었다. 도서관이 닫을 때까지 나는 줄기차게 그 떠들썩한 곳에서 책을 읽었다. 도서관이 닫을 즈음에는 미처 읽지 못한 책을 대출해와 집에 와서 책을 읽었다. 자기 전까지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유일한 아무것도 방해받지 않는 즐거운 세상이었다.
이제는 자라 버린 내 시간들은 별 볼 일 없지만 하고 싶은 것들은 가득하다. 친구들과 만나 시간을 보내고 싶고, 내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러나 가족은 그렇게 두지 않는다. 시간은행에서 언젠가 빌려주었던 것을 회수라도 하는 것처럼 자식의 시간을 자식만의 시간으로 두지 않는다. 내 어린 시절의 부족했던 관심을 그들은 내게 바란다. 어린 시절 갈구하던 함께하는 시간을 그들은 이제 내게서 바란다.
나는 잘 모르겠다. 함께하고 싶은 눈물겨운 마음도 있지만, 함께 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마음도 자식에게 있다는 것을 부모도 알아주었으면 한다. 언젠가 그들이 자식을 뒤로했던 것처럼. 내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눈치채 주길 기다릴 뿐이다.
모든 걸 내어줄 것처럼 했지만 결국 모든 걸 앗아간 어린 시절의 부모님과 눈물을 쏟으며 반성하는 듯했지만 결국은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지금의 나는 모두에게 가해자다. 우리는 서로에게 있어 결국 아픔만을 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나는 가족을 그렇게 정의 내리고 싶다. 멀어지기에는 아프고, 가까이하기에는 아픔을 들쑤시는 독. 바람 잘 날 없는 가족의 굴레.
멀어지지 마, 그렇다고 너무 가까워지지도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