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출발을 알리는 목련을 시작으로 벚꽃이 순식간에 거리를 휩쓴다. 대체 언제 봄이 찾아왔는지도 모르게 패딩과 이별을 선고해야 하는 계절이 눈 앞에 도착한다. 나는 미처 준비되지 않은 봄을 위해 겨울 내리 날 지켜주던 패딩을 뒤로하고 옷장을 뒤적인다. 순간 따뜻함에 약간의 기대감이 부푼다.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 같은 근거 없는 기대감이 몰아친다. 그러나 잠깐이다.
겨울 내리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터라 나는 잊고 있었다. 새로움을 머금은 계절, 바야흐로 찾아온 봄에 맞서 싸울 만큼 나는 강한 마음을 갖추지 못했다. 나의 우울이 미처 준비되지 않은 날 향해 돌진했다. 아무 생각 없이 현관문을 열었던 나는 무너지듯 현관에 주저앉아 울었다. 봄 특유의 따뜻하고 서늘한 향이 불었다. 암막커튼이 쳐진 어두컴컴한 집 안으로 막을 새 없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쉽게 무너지고야 말았다. 마치 봄을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무너질 기회를 기다린 사람처럼 빠르게 주저앉아 속절없이 울었다. 뒤늦게 찾아온 이별의 후유증이기도 했고, 미래에 대한 설렘을 잃은 흔한 방어기전이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그대로야, 나는 겨울에 머물고 싶어. 슬퍼도 이상할 것 없는 겨울에 파묻혀 죽고 싶어.
나는 다정함에 쉽게 넘어갔다. 다정함이 날 뒤흔들었다. 내가 가지지 못한 다정함 내지는 따뜻한 종류의 것들에 쉽게 모든 걸 내어줄 것처럼 내 속을 훤히 보여주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결핍에 다정함도 포함되지 않았을까 하는 뭐 그런. 또다시 자기 연민이다. 나는 불쌍하다. 나는 사랑받지 못해 다정함에 약하다. 내가 조금 더 사랑을 받았으면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늘 불쌍하고, 늘 약자에 속한다. 그래야만 했다. 진실이 어떻든 아무렴 상관없다. 지금 이 거지 같은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 연민만큼 아름답고 훌륭한 자위가 없다.
머리에 빨간 불이 켜졌다. 비상벨이 울렸다. 무기력한 행진을 이어가던 나의 일상이 뒤흔들렸다.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누구보다 행복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동시에 누구보다 불행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늘 불안했다. 행복이란 쉽게 무너지고, 무너진 뒤에 찾아오는 불행은 세 배쯤 아팠다. 나는 찾아올 불행을 감당할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정함에 쉽게 무너지는 내가 불행함에 힘 있게 버티는 것부터가 모순이었다. 행복과 불안이 공존하는 연애는 결코 순탄치 않다. 파국에 이르기까지 카운트다운을 하는 것과 엇비슷하다.
그린라이트가 울린 건 어느 여름날이었다. 후덥지근한 여름, 친구의 친구로 그를 만났고, 우리는 제법 가까워졌다. 처음 만난 날 그가 날 다정히 부르지 않았다면, 듣기 좋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일상의 파동은 없었을 것이다. 생각보다 규칙적으로 일정하게 흔들림 없이 무기력한 일상이 이어졌을 테다. 다소 평화로워 보이게, 그러나 다소 지루하게. 그러나 그는 내 이름을 불렀다. 다정했다. 누군가 내 이름을 그토록 다정하게 부르면 나는 내 모든 걸 내어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날도 그랬다. 그린라이트가 켜지고 머지않아 머릿속에 비상등이 동시에 켜졌다. 이 연애를 이어가면 안 된다는 나의 오랜 동반자 우울이 내게 힌트를 내어주었다.
오랜 동반자 우울은 알고 있었다. 우리의 연애가 아름답고 찬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슬픔을 오래 간직하다 보면 그런 쪽으로 유난히 날 선 직감이 뻗쳐 나오곤 했다. 그리고 뻗쳐 나온 직감들은 제법 정답에 근접했다. 그와 만남을 갖고 일주일 되던 어느 날 행복과 동시에 경고음이 울렸다. 깊어지기 전에 그만둬. 그러나 사람은 쉽게 경고를 듣지 않는다. 상황이 닥쳐오기 전까지는 경고는 경고에 불과하다. 경고가 결과가 되기까지의 시간 동안 콩깍지에 씌어 모든 걸 무시한다. 아닐 거야, 네가 틀렸어, 이번만큼은 네가 틀렸다고. 그렇게 믿으며 귀를 막고 눈을 감는다. 사랑의 바보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한동안 나와 우울은 사이가 멀어졌다. 우울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동안은 행복과 만족, 그리고 불만과 불안들이 다소 뒤섞여 팽팽하게 내 안을 부풀리고 있었다. 내 모든 걸 터트릴 것처럼 모든 게 팽팽하게 부풀려 있을 때 어디선가 날아온 바늘이 부풀어진 풍선을 펑 터트린다. 힘겹게 가꾸었던 정원이 순식간에 몰아친 태풍에 망가진 것처럼. 내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그 관계는 모래성만큼이나 쉽게 무너지고 남보다도 못한 사이로 빠르게 돌아선다.
모든 게 다 터져 비어버린 공간 사이로 네가 밀려든다. 너는 기다렸다는 듯이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날 괴롭힌다. 겨울에 우울의 제 값을 치르지 않았으니 우울의 이자까지 얹어 봄에 나를 죽이려 함이 틀림없다. 나의 동반자 우울이 벌을 내린 것이다. 삶이 시작되고, 계절이 시작되고, 생명이 새로 자라나는 아름답고 찬란한 봄에 너는 나를 죽이려 함이 틀림없었다.
비가 왔다. 만개한 벚꽃이 달빛에 가로등만큼이나 환히 분홍빛을 뿜어대던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무르익은 목련 향이 짙은 비 냄새와 교차되며 한껏 서늘하고 서글픈 향을 내뿜는 봄이 저문다. 즐긴 적도 없고, 온전히 느끼지도 못했는데. 어디선가 불어온 비바람에 자취를 감춘다. 사랑은 4월의 벚꽃과도 같다. 한껏 아름다울 때, 그때가 영원할 거라 착각하며. 그 아름다움을 시간이 나면 제대로 즐겨야지, 여유가 생기면 찾아가야지. 미루고 미루다 생각지도 못한 날씨와 함께 쉽게 져버리는 4월의 벚꽃 같다.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것들은 쉽게 곁을 떠난다. 남은 내게 아무런 미련도 없는 것처럼.
강렬한 그린라이트. 초록불이 꺼진 자리엔 빨간불이 들어온다. 봄이 시작됐다. 빨간불이 들어왔다. 처절한 사투가 시작되고야 말았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 바깥은 여름 中, 김애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