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잘 먹고 소화시키는 편이지만 독서에 관해서는 또 그렇지 않아서, 필독서로 분류되는 책 중에는 아직 낯선 책이 많다. 수필가 피천득에 관해서는 학창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으나, 그의 수필을 부러 읽으려 애쓰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필이라는 형태의 문학 자체를 관심밖에 두었다. 그 이유랄까, 변명을 하자면 학창 시절 스승 한 분이 '수필은 일기다.'라는 실언을 내게 한 탓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언젠그 피천득의 글을 읽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미루고 미룰 뿐, 피할 수는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서점을 둘러보다 우연히 그의 책 [인연]이 눈에 들어왔고 난 그 책을 집어들었다.
자고로 문학이란 함축적이거나 서사적인 것이라는 이분법에 만족했던 내게 수필이라는 형식의 글이 생소했다. 하지만 피천득의 글을 읽고 문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새로 뜨였음을 인정해야겠다.(너무나 상투적 표현임에도 이 이상 적확한 표현을 찾지 못하였다.)
수필 <인연>의 전문을 읽으며 작가의 윤곽을 그려보았다. 열일곱 젊은 피천득은 아사꼬를 만났고. 그리고 십삼사 년 후에 만난 또다시 그녀, 아사꼬를 만났고. 그리고 또 십여 년 후에 그는 그녀, 아사꼬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인연' 두 음절 제목만큼이나 짧은 글에 그는 그만의 아사꼬를 완벽히 우리 앞에 그려 놓았다. 아사꼬의 생김도 체형도 목소리도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우리 모드는 그녀를 알게 된다.
열일곱 피천득이 팔십의 나이에 발표한 이 글에서 가장 눈부신 점은 뛰어난 묘사도 어휘도 아니다. 우리가 무심코 뱉는 종류의 것과 다를 게 없는 언어. 마치 중얼거림과 같은 문체로 그는 우리 앞에 아사꼬와의 인연, 그 아련함을 이리도 아름답게 그려낸 것이다. 두 사람의 인생과 애잔함이 그려진 이 글은 수필이기 전에 얼마나 감동적인 소설인가?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의 시작과 끝이며 혹은 얼마나 완벽한 순환인가.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이 얼마나 완벽한 결말인가.
문학에 경계란 없음을, 나는 이미 배워 알고 있지만 피천득을 읽음으로써 알고만 있던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소설에 수많은 인물이 있고, 시에 셀 수 없는 다양한 심상이 있듯이. 수필엔 그 얼마나 많은 우리가 있고 우리네 인생이 녹아 있는가?
소설 속에 시와 수필이 있고
시 속에 수필과 소설이 있으며
수필 속에 시와 소설이 잇다.
본인의 졸작 <작가>라는 시가 있다.
이 시 속에서 작가란 손 끝에 꽃이 피는 사람이다.
발자국에 노래가 흐르고, 어제의 슬픔을 굳이 모아 오늘의 차비로 쓰는 사람이다. 음악가의 연주가 부럽고 화가의 붓터치를 질투하지만, 이내 자신도 같은 것을 가졌음을 깨닫고 환희하는 사람이다.
작품이라 할 수도 없는 이 작은 시를 읽는 사람이 있어, 혹시라도 시의 주인공이 누구냐 묻는다면 나는 이제야 감히 말하고 싶다.
‘무지한 상놈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쓴 시지만... 어쩌면 그분, 진짜 작가를 저도 모르게 그리며 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