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한 지 반년, 오래 사귀었던 옛사람의 빈자리를 돌아보는 지금 나도 모르게 '다행이다' 중얼거린다.
헤어지던 날에는 마당의 고목이 뿌리째 뽑혀나간 것처럼 마음 한편이 휑했다. 행여나 새벽 감성에 젖어 '자니...?' 하는 메시지를 보내게 되진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다행이랄까. 난 잘 지낸다.
원래도 혼자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겼기에, 지금이 외롭진 않다. 그 사람과의 연애 덕분에 싸우지 않고도 연인은 헤어질 수 있음을 알게 됐고, 한때 소중했던 사람의 부재가 절망으로 귀결되는 것만은 아니란 사실도 알게 됐다. 내 인생 가장 생기 넘쳤던 그 시절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으리란 이야기를, 이제는 할 수 있게 됐다. 다만 여러모로 부족한 나를 만나 마음 고생했던 그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남는다.
어제는 오랜만에 독서모임에 나갔다. 저마다 각별히 여기는 책에 관해 이야기하다 주제가 '편지'에 이르렀다. "편지 써본 적 있어요?" 하는 질문에 나도 모르게 "많이 써봤어요. 쓰는 거 좋아해서." 답하고 말았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종이에 감정을 옮기는 거. 웃음을 쓰고 부끄러움은 숨기는 거. 마음을 전할까 말까 고민하는 거. 연애편지라는 거. 좋아한다. 뭐든 쓰는 거라면 다.
그이와 만났던 5년의 시간 동안 쓴 수십 통의 편지는 내 손에 없지만, 편지의 흔적은 여전히 내 책상 서랍에 남아있다. 편지를 쓰려고 마음먹은 때마다 사온 편지지 세트. 그 속에 든 대여섯 장의 편지지 중 쓰지 못하고 남은 낱장들이다. 다시 사용하지 않을 그것들이 내 허물인 것 같아서, 내 부족함의 측량인 것 같아서 '서랍을 비울까' 생각도 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 먹고 그것들을 갈무리 한다. 그저 좋았던 한 시절 기억이 입가의 미소로 화해 스치는 걸 보면, 난 앞으로도 연애편지를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 다행이랄까. 난 잘 지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