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남>
이번 겨울 감기는 참 오래도 간다. 한 달을 넘게 코를 풀며 고생했다. 오늘 아침에야 몸이 좀 나은 느낌이 들었다. 마침 주말이었고 기운을 북돋을 따뜻한 유자차 한잔이 절실해서 카페로 외출을 했다. 창가자리에 앉아 책을 보고 있을 때, 한눈에 보기에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맑은 눈에 피부가 보드라운 미인이 옆자리에 앉았다. 단정한 세미 정장. 차가운 아메리카노에 달콤한 초코파운드케이크. 정석적인 조합이 취향인 듯한 그녀는 포크로 케이크를 떠먹는 모습마저 복스러웠다. 휴대폰에 집중하며 이따금 입꼬리가 씰룩였는데, 웃음을 감추지 않는 걸 보면 일부러 차가움을 가장하지 않는,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활달한 성격으로 분위기를 유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인 듯 싶었다.
관찰을 멈추고 다시 책으로 고개를 떨구려던 순간, 문득 한 가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 사람은 겨울에 태어났을 거라는 근거 없는 짐작. 그렇게 짐작한 이유는 아마 내가 겨울에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2월. 겨울에 태어난 나와 닮은 구석이 몇 가지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투영된 짐작. 잠시 후, 나도 모르게 노트에 뭔가 끄적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읽고 있는 책의 내용과는 전혀 관계없는 머릿속 생각을 옮겨 쓰고 있었다.
[내 옆에 미인이 있다.]
[지금 흘러나오는 이 노래, 제목이 뭘까?]
[겨울에 태어난 사람]
[처음 본 사람을 관찰하며 멋대로 짐작하는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
하는 식의 낙서들. 괜히 민망해서 몰래 웃음 지었다. 화장실에 가야지,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나도 모르게 미인의 휴대폰 화면에 눈이 갔다. 강아지가 뛰놀고 주인과 엉켜 애교 부리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훔쳐볼 생각은 없었는데, 멋대로 사람을 짐작한 것도 모자라 사생활을 엿보다니. 나란 인간 참 별로네. 생각하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때, 미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괜스레 민망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맨스영화서는 낯선 장소에서 낯선 이와의 인연이 사고처럼 시작되곤 하지만 그야말로 허구의 일. 낯선 사람에게 말을 붙일 생각은 애초에 없었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 처지도 아니라고 생각한 나는 그냥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밖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미인>
구직난이 심하다더니. 언제든 이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회사를 그만뒀다가 반년 만에 간신히 면접에 합격했다. 달이 바뀌는 보름 뒤부터 출근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지난 경력을 입증할 서류와 자격증 사본, 거기에 더해 사원증에 쓸 증명사진이 필요하다기에 모처럼 외출을 해 사진관에 들렀다. 면접용 세미정장을 다시 꺼내 입고 거리를 걷자니 그동안 초조했던 마음속 시름이 조금은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다.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쉬려는데 길가 카페의 통유리 너머로 책 읽기에 여념 없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유행 지난 투블럭 헤어지만 길이감이 있어 자연스럽게 굴곡을 이루고 있었고, 동그란 안경 너머에서 활자에 집중한 눈이 깊어 보였다. 길거리엔 펑퍼짐한 바지를 입은 남자들 천지인데도 테이퍼드 핏의 청바지를 입은 것이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인상을 줬다. 슬쩍 보기에 키가 큰 편이 아닌 것 같은데도 단화를 신고 있는 걸 보면 다만 몇 센티미터라도 허세를 부리려는 욕심이 없는 사람인 듯하다.
그 모습에 끌려 나도 모르게 카페로 들어섰다. 마침 점심때라 세트로 구성된 아메리카노와 초코파운드케이크를 주문해 창가자리에 앉았다. 남자의 옆얼굴이 보이는, 하지만 너무 가깝지는 않은 자리에 앉고 보니 일면식 없는 사람을 훔쳐보기 위해 카페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새삼 웃겨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휴대폰을 꺼내 유튜브를 켜 뉴스라도 들으려는데, 문득 그가 골든레트리버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아지 영상을 연이어 재생하면서 그를 힐끗 바라봤다. 그는 책을 읽는 듯하다가도 이따금 노트에 뭔가를 끄적였다. 독서를 깊게 하는 사람인가, 싶어서 호감이 더욱 커졌다.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선뜻 용기 내기가 힘들다. 가방에 필기구와 포스트잇이 있는 게 떠올라서 쪽지라도 써붙이고 싶었는데, 갑자기 그가 일어서더니 내 곁을 스쳐갔다. 아마 화장실에 다녀올 모양이다.
로맨스소설을 보면 주인공 남녀가 대화를 주고받기도 전에 서로의 호감을 포착하던데, 역시 그것은 허구의 일. 다음 순간 남자가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과 노트를 주섬주섬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남자의 다음 행선지보다 노트에 쓴 내용이 더 궁금해졌다. 뒤따라 나가 말이라도 붙여볼까… 생각은 굴뚝같은데 발걸음도 입술도 쉽사리 떨어지지 않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