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by 양영석

퇴근길에 들린 서점에서 유독 하얀 책,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눈에 띄었다. 언젠가 도입부가 아름다운 소설이라며 칭찬하던 에세이가 떠올라 값을 지불하고 서점을 나섰다.


전철에 올라 책을 펼쳤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이미 유명한 구절로 시작하는 소실이 창에 비친 요코를 묘사하는 부분을 지나자 눈밭 한가운데 깊은 발자국을 남기고픈 충동에 사로잡혔다. 이곳, 남쪽 도시의 하늘은 좀처럼 눈을 머금는 일이 없기에 충동은 더욱 간절해졌고 이내 슬픔을 몰고 왔다.


결국 나는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눈의 고장 못지않은 나만의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이렇게 크고 경쾌했던가. 바닷물이 백사장을 간지럽히는 소리가 큰 덕분에 가까운 도로의 자동차 엔진음은 들리지 않았다. 시야에 걸리는 것은 마른 모래와 젖은 모래의 경계가 뚜렷한 너른 백사장뿐. 파도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이 마치 밤중에 온 손님을 환영하는 것 같았다.


설국을 기대하는 사람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다는 환호를 그치지 않았다. 그 순간에도 난 설국을 떠올렸는데, 곧 바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등 돌려 떠나려는 순간 눈 가장자리에 무언가 걸려 걸음을 멈췄다. 순간 새카만 밤하늘의 바닥에 깔린 눈을 본 것 같은 느낌에 주변을 살폈다. 비로소 저 멀리 파도의 기포가. 놀랍도록 하얀 기포가 내게 달려옴을 알아챘다.


"눈을 감고 미안하다 웃으니 어느새 설국이었다. 밤의 바닥이 하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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