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샤론의 꽃 May 23. 2024

뒤바뀐 배우자

 날씨가 변덕을 부린다. 물러가지 않을 것 같은 추위가 모습을 감추고 오늘은 활짝 웃고 있다. 살며시 안방을 기웃거리던 햇볕이 어느새 도망치듯 사라졌다. 신혼 방을 훔쳐보기라도 하듯 잠시 머물던 자리는 싸늘한 기운만이 남아있다. 싸늘한 날씨만큼 외로운 삶을 사는 P의 어머니를 찾았다. 무슨 일이냐며 깜짝 반기는 영주어머니는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른다. 걷지 못해서 머문 자리에서 내가 있는 곳으로 뭉쳐서 이동해서 반갑게 손을 잡는다. 고향에서 옆집에 살았던 이웃이기도 했지만 친정어머니의 절친이었다. 조용한 성격에 절제 있는 말씨와 깔끔한 인상은 참 분위기 있는 여인이었다. 아들 네 명을 기르면서도 집안에 티끌만큼도 흐트러지지 않고 항상 정갈한 모습은 옛날에 지닌 그 습성이 살림살이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다만 바뀐 것이 있다면 중년여인의 모습은 간곳없고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있는 모습은 낯선 모습이다. 손을 잡고 반가워하는 영주어머니는 옛날 그 시절에 여성으로서 갖춰야 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여염집여인이었다.  영주어머니가 살아온 인생여정은 눈먼 아버지를 위해 공양미삼백석에 팔려가는 심청이보다도 더 서럽고 억울한 결혼이었다. 심청이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는 확고한 목적이 있었기에 자신의 몸을 희생의 제물로 내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록 목숨 값으로 아버지가 새로운 세상을 살 수 있는 길이 있기에 아버지를 위한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처녀집에 결혼 말이 오간 집은 잘 사는 부잣집아들이었다. 당사자들끼리 맞선 보는 시절이 아니었다. 부모들끼리 가정환경과 가문이 비슷하면 부모가 결혼대상자를 보는 것으로 결혼을 정하던 시기였다. 처녀의 부모가 총각의 집에 선보러 왔다. 대궐 같은 집에 마당에는 집 앞뒤를 둘러서 화단에 아름다운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났고 안 방 앞 대청마루 쪽에는 밀레의 ‘만종’이 걸려있었다. 비록 시골이지만 시골집에서 볼 수 없는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하는 집이었다. 선보러 온 부모님께 훤칠한 미남청년이 들어와서 공손하게 인사하는 것을 보니 듣던 소문처럼 높은 학식과 잘 생긴 외모 높은 생활수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은 집이었다. 처녀의 부모는 만족한 혼인이라며 혼인 날짜를 잡아왔다. 


 처녀집 마당에 차일이 쳐지고 마을 사람들은 신랑구경 한다며 모여들었다. 학식 있고 잘생긴 미남청년의 모습이 마을 사람들은 궁금했다. 혼인날 아무리 기다려도 신랑은 오지 않았다. 신부 집에서 신랑집까지는 6,7킬로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걸어서 와도 몇 번은 오고도 남을 거리였다. 기다림에 지쳐 해가 어둑어둑할 때 신랑일행이 신부 집 마당에 도착했다. 신랑 구경하러 왔던 마을 사람들은 각자 자기 집으로 가고 집에 남은 사람들은 집안 일가친척들뿐이었다. 마당에 들어선 신랑을 본 처녀의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선보러 갔을 때의 잘생기고 키 큰 총각이 아니고 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 보이는 남자였다. 해는 져서 어둑한데 신랑이랑 같이 온 신랑 친구들도 술을 마신 것 같이 취기가 돈 상태로 신부 집에 도착했다. 신랑은 외모도 확연히 다른 데다가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말을 해도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신랑을 보고 신부는 울면서 시집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시집을 가도 걱정, 안 가도 걱정 어느 쪽을 택해도 가문의 명예는 상처를 입어야 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딸을 생각하면 이 혼인은 해서는 안 된다. 제대로 소통도 할 수 없는 장애인에게 시집보내는 일은 딸의 앞날을 망치는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울 수 없는 가문의 명예가 훼손되는 수치스러운 일로 불명예스럽게 살아야 하는 일중 어느 쪽을 택해도 가문과 딸 중 어느 한쪽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신부어머니는 딸을 설득했다. 어차피 운명으로 받아들이라고, 딸을 달래기 시작했다. 신랑이 장애가 있기 때문에 전쟁에 참전 안 해도 되고 결혼하고 나서 전쟁터에 끌려가서 생사를 걱정해야 하는 일은 없겠다며 오히려 딸을 달랬다. 딸이 앞으로 장애인과 살아가야 하는 것보다는 가문의 체면을 더 중요시 여겼다. 신랑 집에 선보러 갔을 때 키 크고 잘 생긴 남자는 누구였던가? 그는 신랑의 바로 손위 형이었다. 신랑의 부모는 장애가 있는 아들을 숨겨놓고 이미 결혼한 큰아들을 신랑인양 신부 부모에게 인사를 시켰었다. 지금으로 보면 사기 결혼 이었지만 그 시절에는 가끔 있는 일이었다.

 일제 삼십 육 년을 겪으면서 농사지은 쌀은 먹어보지도 못하고 벼를 탈곡하면 전쟁군량미로 그대로 빼앗기면 굶고 살아야 하는 가난을 숙명처럼 여기는 시절이었다. 해방이 되면서 육이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 식량난에 허덕이는 집이 많았다. 없는 집에서는 시집가면 딸이 굶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집들이 많았다고 한다. 딸을 시집보내려면 밥을 굶지는 않을지부터 보던 시절이었다. 간혹 처녀부모가 총각 집으로 선보러 가면 대궐같이 큰 부잣집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 집 행세를 하던 일도 있었다. 


 신랑이 일찍 장가를 오면 신부 집에서 혼인을 무효로 하기 쉬울 것 같아 생각할 여유를 할 수 없게 일부러 어둑한 저녁에 장가가는 시간을 택했다. 신부는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평생을 장애인과 살아야 하는 고달픈 생을 시작해야 하는 앞날을 생각할 때 아무리 운명이라지만 살아가야 할 장래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시댁이 부자면 어떻고 집이 대궐처럼 크면 어떤가 불행의 서막이 열린 것 같았다.  신부는 속으로 목놓아 울었다. 영주어머니의 결혼은 슬픔 속에서 시작되었다. 아들들을 다 결혼시키고 시골집에 부부만 남았다. 심한 골다공증으로 걷지 못하자 둘째 아들인 P가 부모님을 모셔와서 옆집에 살면서 부모님을 부양한다. 비록 장애가 있었어도 성실하게 살아온 아버지가 노환으로 돌아가시자 혼자 생활하는 어머니를 알뜰히 챙긴다. 어머니가 평생을 희생하고 살아온 은혜에 보답이라도 하듯 극진히 모시는 P의 모습을 보고어머니의 한을 풀어주는 효자다. 집으로 오기 위해 밖으로 나온 나는 잠시방안에 머물던 햇볕처럼 아쉬움만 남기고 돌아서는 나를 보고 눈물을 훔치는 영주어머니의 모습에서 친분이 각별한 친정어머니와 두 분이 정답게 이야기하던 모습이 보인다.


작가의 이전글 가시고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