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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론의 꽃 Jun 01. 2024

꿈꾸는 디아스포라


 “여보 나 집에 갈 거야 빨리 김기사 불러줘! “

딸 손을 잡고 들어온 부인을 보고 집으로 간다며 보챈다. 경호 할아버지는 잊을만하면 집에 보내달라고 떼를 쓴다. 옆에 있던 부인이 

“우리는 여기서 살아야지 집으로 가지 못해”

부인은 어느 정도 현실의 문제를 판단한다. 두 부부는 같이 요양원에 입소했다가 지금은 다른 층에서 각자 생활한다. 같은 층 4인실 방에서 생활할 때 부인이 옆 동료들과 마찰을 자주 일으켰다. 사사건건 부딪칠 때가 있었다. 금도를 넘은 우월한 엘리트주의가 그녀의 마음속에 아직도 남아있었다. 남편은 서울대학을 나온 인재였다. 미인의 아내도 같은 대학을 나온 재원이었다. 금융계의 유력인사로 한때 승승장구하던 시절이 있었다. 출퇴근을 운전기사와 함께 했고 그의 옆에서 업무는 항상 비서가 도왔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흔히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공한 사람이었다. 몸에 밴 생활습관은 공동체 생활에서도 나타난다. 부인은 골프 친다며 방 안에서 스윙 포즈를 취하곤 했다. 옆 동료들과 언쟁이라도 나면 “당신 골프 칠 줄 알아?”

 비록 같이 생활해도 당신 같은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며 상대를 은근히 무시한 듯한 태도를 보이곤 했다. 아무것도 판단하지 못한 남편을 동료들이 무시한 다는 느낌을 받으면 그들에게 내 남편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데 감히 함부로 대하냐며 신경전을 벌이며 사사건건 부딪치는 일이 많았다.  

 그녀도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자 가족들이 병원에 몇 달간 입원시킨 후에 퇴원하면서 남편과 떨어진 다른 층으로 옮겨서 아예 시빗거리를 없애 버렸다. 


자녀들이 면회 오면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같이 만나게 하는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아내를 애타게 기다리거나 찾지는 않지만 집으로 보내달라고 운전기사를 찾을 때가 있다. 그는 원초적인 본능은 살아있어서 식사 때 식판을 가져오면 식탁 위에 앉아서 옆 사람 식판을 자기 앞으로 끌어와서 먹기도 한다. 먹는 것은 남기지 않고 잘 드셨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휠체어에 태우려 하면 꿈쩍도 안 하다가도

 “밥 먹게 일어나세요.” 하면 곧바로 일어나서 스스로 휠체어 앞으로 다가온다. 그는 배가 고프면 먹는 것과 자는 것 외에는 걱정이 없다. 다만 집으로 가자며 집을 그리워하는 회귀본능은 살아있다. 젊은 날에는 수많은 금융업무가 그의 손을 거쳐서 결정되었고 조직의 브레인 역할을 했지만 지금 쓸쓸히 요양원의 침대에서 한가로이 낮잠을 자는 그는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도 빛바랜 옛 추억이 되었다. 비록 휠체어에 의지한 몸이지만 옛날처럼 휠체어 위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를 유지한다. 자기가 살던 곳으로 가야 된다는 생각만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 첫사랑 옛 애인의 박00이름을 부르곤 한다. 요양보호사 Y가 내가 박00이라고 하자 Y의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아니라고 고개를 흔든다. 박00는 얼굴이 아주 예쁘고 날씬한 미인이란다. 왜 첫사랑과 헤어졌냐고 물었다. 결혼을 할 무렵 그녀는 폐결핵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남기고 그녀는 홀로 천국 문을 열었다. 낮에 첫사랑 얘기를 한 후에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잠꼬대로 박00을 부른다.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을 남기고 떠난 첫사랑을 잊지 못 하고 꿈속에서도 헤매고 있다.

 갑자기 열이 나서 해열제를 먹고 나서는 “나 집으로 갈 거야. 집으로 보내줘!” 넋두리처럼 외치는 그의 모습이 짠하게 느껴진다.

 “그럴 것 없어 김기사 불러줘!”

 새벽에 할아버지의 방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구 힘들어 죽겠네.” 방으로 갔더니 다리는 침대 위에 걸치고 두 팔을 마룻바닥에 짚고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조심성이 많아서 다치지는 않았지만 집으로 가려고 내려오려 했다며 낙상사고를 당할 뻔했다. 집을 두고 요양원에 와있는 대상자들은 집으로 갈 날을 기다린다. 치매로 판단을 못 해도 집으로 돌아간다는 회귀본능의 신념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과거 히브리민족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조국이스라엘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것처럼 그들은 집으로 돌아갈 날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산(離散)의 슬픈 현실이 오늘날 요양원에서 벌어지고 있다. 비단 바벨론에서 포로로 잡혀있던 히브리민족 만 이산의 아픔을 겪는 것이 아니라 요양원에서 가족의 품을 그리워하며 집으로 갈 날만을 기다리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이산의 아픔이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가족과 집을 그리워하는 그들이 영원한 안식처를 찾을 때까지는 고향과 집을 그리워하는 새로운 풍속이 이어질 것이다. 그들은 영원한 본향을 기다리는 새로운 공동체 난민이다. 두 부부가 겪는 이산의 아픔은 이사회의 현주소이다. 그는 메모지위에 비뚤거리는 글씨로 옛집 주소를 써 주며 이 주소로 데려다 달라며 내 손을 잡는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 요양원디아스포라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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