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네이버 이미지
얼마 전이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거의 연락 없이 지내다가 친정옆집에 살던 남자 친구의 연락을 받고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갔다. 친정집에 연락까지 취해서 전화번호 알아냈다는 그 친구는 동창회에 와서 옛 친구들 얼굴도 보고 어린 시절 추억도 더듬어 보라면서 꼭 나오라고 신신당부하는 목소리가 정겨웠다.
몇십년 만의 만남이다. 약속장소로 하나둘씩 들어오는 친구들의 모습에서는 어렸을 적 그림자가 조금씩 남아있었다. 살아온 세월의 두께만큼 삶의 세파에 시달린 듯 나이에 비해 훨씬 늙어버린 친구들도 있었지만 서로를 알아보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더욱더 반가운 일은 나를 기억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던 것이다. 뛰어나게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었고 주목을 받을수 만큼 뛰어난 구석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들은 나의 그 시절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유년기의 동창생들 이어서일까. 반세기 가까이 떨어져 살았어도 어색하거나 부담스러운 구석이 없어서 좋았다. 수십 년 전으로 되돌아가 모자이크 된 기억의 퍼즐조각을 맞추기 시작했다. 추억 속의 지난날의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결국엔 자연스럽게 담임선생님 얘기로 이어졌다. 저마다 잊지 못할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을 늘어놓자 나에게도 한 얼굴이 떠올랐다.
4학년 때 담임 박양순 남자 선생님이다. 그는 학교 사택에서 살고 있었다. 잠자리에서 곧바로 나온 것처럼 머리는 늘 부스스하고 세수는 안 한 것처럼 푸석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가끔씩 구두대신 슬리퍼를 신고 오기도 했다. 그러니 수업시간 그의 모습은 잠에서 덜 깬 듯한 얼굴 그 자체였다. 신기한 일은 수업분위기가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았는데 수업내용이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도 초등학교 6년 동안 지도해 준 선생님 중에서 그가 수업진행을 가장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적어도 4학년이 될 때까지만 해도 나는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아이가 아니었지만 놀랍게도 4학년이 되면서 성적이 올랐고 공부하는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사실 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이 된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선생님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해 하필이면 아들의 반 담임이 된 것이었다. 부자간에 같은 교실에서 가르치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께 반을 바꿔 달라고 했고, 그로 인해 우리 반 담임이 되었던 것이다. 아들 반을 피해서 옆 반인 우리 반으로 온 선생님 이름은 그야말로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다름 아닌 성만 다를 뿐 나와 이름 두 글자가 똑같은 박양순이었다. 그러니 나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편한 일은 첫 수업부터 일어났다. 번호 순서대로 이름을 불러서 얼굴을 익히는 시간이었다. 나이 생일 순서대로 번호가 주어졌기 때문에 나는 끝 번호에 가까웠다. 내 앞 번호까지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확인한 후 선생님은 “그다음, 음...”하고 말끝을 흐리더니 어쩔 수없이 “이...양순”하고 호명을 했고 순간 반 아이들은 “와”하고 웃어버렸다. 1학년 때부터 3학년까지 반 가름 없이 줄곧 같은 반으로 지내다가 4학년에 올라오면서 반이 나뉘어 새로운 얼굴이 많았기 때문에 가뜩이나 서먹서먹하던 터에 첫 시간부터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 순간 나는 부끄러워서 고개만 숙이고 있었고 선생님도 몹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었다. 그 후로 반 친구들은 선생님이 없으면 “박양순 이양순”하고 놀려댔다. 같은 이름 때문에 괴로운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선생님도 수업시간이면 난감한 상황과 부딪히곤 했다. “이 문제 궁금한 사람 손들어!” 하면 여러 아이들이 손을 들어 질문을 했지만 유독 나는 질문자로 받아주질 않았다. 나를 시키려면 “이양순 말해봐” 해야 되는데 반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게 부담스러웠던 거였다. 결국 나는 불이익당할 때가 많았다.
선생님을 잊을 수 없게끔 내 기억 속에 각인시킨 사건도 있었다. 선생님에게는 다섯 살쯤 먹은 막내아들이 있었는데, 꼬마는 학교 우리 교실 옆에 와서 놀 때가 많았다. 내 자리는 벽쪽 문가쪽 이었다. 교실 벽 옆 유리창 아래엔 작은 목재 반쪽 미닫이문이 있었는데 여름이면 꼬마는 교실 밖 복도에 와 앉아서 미닫이쪽문을 열고 손가락으로 창가 벽 쪽에 앉은 내 다리를 꾹꾹 찌르고 장난을 했다. 발로 문을 밀어서 닫으면 다시 열어서 손가락으로 찌르고 나는 의자에 앉아서 미닫이 쪽문을 닫으려 하고 신경전이 수시로 벌어졌다.
한 번은 조그마한 막대기를 가져와서 또 내 발을 쑤셔댔다. 칠판에 필기를 하던 선생님은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꼈던지 나를 째려만 볼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가 그랬다면 이름을 불러서 호되게 야단을 쳤겠지만 자기 이름을 부른다는 게 썩 내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계속해서 집중을 못하고 교실바닥 쪽에 신경을 쓰자 선생님이 내 앞에 와 있는 것도 모르고 발로 미닫이문을 밀어 닫고 있었다. 회초리가 “탁” 소리를 내며 내 머리 위로 떨어졌고 눈에서는 불이 번쩍했다. 좀처럼 매 때리는 법이 없이 이름을 불러서 야단만 쳤지만 나에게는 달랐던 것이다. 자신과 이름이 같기에 이름을 불러서 야단치는 대신 애꿎게 매를 때린 것이었다. 선생님 눈에 보이지 않은 복도에 앉아서 쪽문을 열고 아들이 장난을 친다는 생각은 못 하고 무언의 경고를 했는데도 내가 한 눈을 판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6학년 때 전교생 전 과목 일제고사가 있었다. 개인성적뿐만 아니라 시험성적에 따라 학년 학급 성적순위가 매겨지기 때문에 선생님들끼리도 불꽃 튀는 경쟁을 해야 했다. 시험채점 과정에서 혹시 부정이 있을까 봐 선생님들끼리 제비 뽑기를 해서 채점을 했다. 우리 반 은 4학년 때 담임을 했던 박 양순 선생님이 채점을 하러 교실로 들어왔다. 아이들은 수업이 끝났는데도 집으로 가지 않고 누구의 성적이 좋은지 확인하고 싶어서 채점하는 선생님 책상 옆에 빙 둘러앉아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고득점자가 나오면 “와”하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선생님은 “누구 것이지?” 하고 흐뭇한 표정으로 제자의 이름을 확인하곤 했다. 그날 나도 선생님 곁에 바짝 붙어서 채점과정을 구경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와!”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답안지 글씨모양을 보고 직감적으로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웅성이자 “누구 것이지?” 하며 이름을 들쳐보더니 “음”하고만 말았다. 다른 학생 것이라면 “00 시험 잘 봤네” 하고 칭찬이라도 한마디 했을 텐데 역시 이름 부르기가 쑥스러운 것 같았다.
선생님은 별명이 게으름뱅이였지만 수업에 소홀한 적은 없었고 인정도 많고 실력도 대단 한 분이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후에 교감으로 발령받아서 다른 학교로 갔다는 소식 들은 것이 마지막이었다. 내 유년시절의 영원한 스승으로 남아 있는 박 양순 선생님. 그날 나는 친구들에게 박 양순 선생에 대해 물었다.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부스스한 머리와 슬리퍼를 끌고 교실에서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의 모습이 아련히 스쳐간다. 지금은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고 생존해 계시면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 보고 싶은 선생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