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방 문을 열면 환히 보이는 집 앞 화단에 서 있는 나무로 눈길이 자꾸 간다. 푸르던 나뭇잎이 수액이 말라가며 날마다 색깔이 옅어진다. 바람에 수런거리는 단풍잎이 가을 햇살에 마지막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하룻밤 자고 나면 변해가던 나뭇잎이 제 몸을 붉게 불사르고 있다.조바심을 내며 베란다에 서서 보던 단풍잎도 이제는 잎을 떨구어 보내는 이별의 순간이 왔다. 계절의 흐름에 순응하며 욕심부리지 않고 떠나야 할 때를 아는 나무처럼 나도 비울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나 생각해 본다.
울적한 마음이 들면 공원을 산책한다. 일요일이어서인지 개구쟁이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다. 공원길은 노랗게 쏟아놓은 은행잎으로 카펫을 깔아놓은 것 같다. 낙엽을 밟으며 은행나무 터널을 지나가는 여학생이 스마트폰으로 아름다운 정경을 담고 있다. 나뭇가지에서 나비처럼 춤추며 흘러내리는 은행잎이 머리 위에 살포시 앉는다. 어떤 나무는 잎을 다 떨구고 맨살을 드러내놓고 있다. 낙엽 지는 쓸쓸한 거리의 풍경은 공원 옆 학교 안에서 서너 명의 아이들이 공을 차며 놀고 있는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와글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사라진 학교의 운동장이 텅 빈 광장처럼 쓸쓸하다. 가을날의 풍경 속에 마음속에 꽉 찬 외로움이 나를 공원으로 끌어냈지만 아름답게 지는 낙엽은 나를 더욱 고독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공원 한쪽 정자에서 노인 서너 명이 앉아서 놀고 있다. 집을 나온 그들은 세상의 관심에서 밀려난 아웃사이더의 외로움을 쌀쌀한 날씨임에도 마음 기댈 곳이 없어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끼리 모여 시간을 보낸다. 주머니가 넉넉지 못하니 갈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고 어느 곳에서도 오라는 데가 없으면 공원 구석이나 거리를 배회하는 현실이 노인들의 현주소다. 사람들의 행복은 풍요로운 물질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감이 인정될 때이다. 같은 동료 속에 있을 때 존재의식이 그들 세계에 함께 하기 때문에 자존감이 생긴 모양이다.
고독, 외로움, 여행 등의 단어는 내가 서 있는 현시점에서 내 감성을 낭떠러지에 올려놓는다. 뼛속 깊이 스며드는 외로움이 날아가는 낙엽처럼 떠나갈 시간만을 기다린다. 가을만 되면 살며시 찾아온 불청객은 바람결에 떨어지는 낙엽같이 방황한다. 바람결에 뒹구는 낙엽은 가는 곳이 정해지지 않고 멈추는 곳이 정착지다. 내 마음의 정착지는 어디쯤 있으려나.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언제부터 무심히 걷는 사람들 무리에서 얼굴에 나타난 행복지수를 헤아려 본다. 명품으로 치장한 사람들도 그 속에 숨겨진 그늘이 엿 보인가 하면 비록 평범한 편한 복장으로 일터로 향한 꾸밈없는 이들의 밝은 햇살 같은 모습에서 행복지수를 읽을 수 있다. 결코 물질의 풍요가 행복지수는 아니라는 증거다.
봄에 남편과 사별한 S에게 전화했다. 신변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내가 공허함 속에서 정신적 방황을 하는데 동반자를 잃은 그녀는 어떻게 생활하는지 궁금했다. 비교적 밝은 톤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 남편을 폐암으로 떠나보낸 후 정신적 공황상태에서 헤맬 때 그녀는 콘크리트 장벽같이 굳건한 신앙의 힘으로 버틸 수 있었고, 스스로 몸을 추스르기 위해서 보약까지 먹었다는 말을 했다. 자기의 인생은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일어서는 지혜를 가진 그녀의 말에 공감했다.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하려 했던 나는 비 오는 날 오히려 자기가 쓰고 있던 우산 속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느낌이다. 그녀가 무더위에 목말라할 때 나는 그녀에게 시원한 물 한 컵도 주지 않았다. 아니 그녀가 목마르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잊고 있던 그녀를 가을 앓이 하는 내 의식의 주변에서 겨우 찾아내었다. 그녀는 내 마음을 꿰뚫기라도 하듯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면서 기쁘게 살아가야지.” 씩씩한 한마디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그래 기쁨은 자기가 심은 농작물을 거둬들이는 농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가시를 뽑아버리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자. 마지막 가을바람에 떨어진 은행잎을 보고 외로워할 게 아니라 낙엽 가득한 거리가 아름다운 자연의 세계로 변한 이 가을을 기쁨으로 노래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