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마다 다니며 작별인사를 했다. 근무는 전날 오전 7시에서 당일오전 7시까지 마치고 퇴근하면 3년 넘게 근무하던 정들었던 곳에서의 마지막 근무였다. 일정을 채우고 내 업무는 종료된다. 거실에 나와서 TV를 보던 희정 할머니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가버리면 못 볼 텐데 어떡하냐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혈육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지만 단순한 요양보호사와 대상자의 관계를 떠나서 인간적인 정이 가슴 끝에 저려왔다.
정윤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자 침대한쪽에 앉아서 유리창 밖을 응시하고 있는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할머니의 얼굴을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나로 인해서 또 마음 아파할 것 같은데 어떻게 말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마지막 인사라며 손을 잡자 역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손으로 눈물을 훔치더니 주머니에서 1000원짜리 세장을 내 손에 쥐어주며 음료수 사마시라고 두 손을 꼭 쥐었다. 보호자가 자주 방문 한 것도 아니고 간식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같이 있었다는 인연 때문에 손에 쥐어준 돈이었다. 뿌리치자 얼마 되진 않지만 내 마음이니 꼭 받아달라고 간절한 부탁을 했다. 지폐를 주머니에 넣고 동료 요양사를 시켜서 내가 간 다음 할머니 간식 사다 드리라며 부탁했다. 항상 말없이 앉아서 먼 하늘만 바라보는 모습이 해바라기 꽃 같았다. 가끔 작은며느리가 방문해서 빳빳한 1000원짜리 지폐 몇 장씩 주고 가지만 그 돈으로 간식 사서 드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언젠가 할머니는 손자와 손녀가 다녀간 뒤로 흐느끼고 있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냐고 묻자
“엄마가 남의 엄마면 아빠도 남의 아빠야, 어린 두 남매를 두고 며느리가 병으로 세상 떠났어. 재혼할 때 새 며느리가 어린 두 남매를 책임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들어왔어. 손녀 100일 안에 세상 떴으니 아이들이 제 어미 얼굴도 기억 못 할 거야 내가 아파서 요양원으로 들어오면서 손자는 제 아빠한테 갔어도 새엄마가 둘은 책임 못 진다며 거부하는 바람에 손녀는 어디 지방에 복지 시설로 갔다는데 두 아이들 생각하면 기가 막혀서..”
주머니에 모아뒀던 1000원짜리 지폐를 손자나 손녀가 오면 용돈으로 주는 돈을 내 손에 쥐어준 것이다. 내가 대상자들에게 베푼 사랑보다 몇 곱절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일하던 곳에서 쉽게 떠나지 못한 이유도 이런 사연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심리적인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고 아무리 고의적이 아니라도 돌보던 환자가 낙상했으니 책임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일이 수습되면 쉬고 싶었고 결심을 하기까지는 두 달 가까이 됐다.
밤에는 두 사람이 교대로 근무를 한다. 한 사람은 취침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요양원 내부를 책임진다. 각층마다 한 사람씩 교대근무 시간 때는 무사하기를 바라지만 뜻 하지 않게 돌발적인 사고가 일어날 때가 있다. 가장 힘든 점은 누적된 피로 때문에 졸리는 잠을 쫓기가 힘들었다.
그날 밤에도 모두 취침한 것 보고 책상 앞에 잠시 앉아있었다. “쿵” 하는 소리가 들리자 꽃분 할머니 방으로 뛰어갔더니 일이 이미 벌어졌다.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왔는데 꽃분 할머니가 침대 안전바를 내리고 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있었다. 흡사 굼벵이가 사람손을 피해서 몸을 동그랗게 움츠린 것처럼 몸을 말아서 침대아래 뒹굴었다. 뜨거운 열기가 등줄기를 타고 밑으로 내려온 것 같았다. 순간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래층에 전화해서 도움을 요청해서 침대에 다시 올렸지만 대퇴부 부위가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골절됐다는 예감이 왔다. 안전사고에 무방비로 노출된 어르신들이 일어날 수 있는 사고였다. 낙상사고가 위험하다고 지지대를 사용하면 인권침해 때문에 말썽의 소지가, 편히 취침하게 놔두면 언제 어떻게 안전사고가 일어날지 모르는 판이다. 흔히 있는 사고지만 보호자의 성향에 따라서 뒷일이 수월하기도 하지만 복잡하게 꼬이는 경우가 있다. 이 환자의 경우는 후자에 속 했는데 보호자가 까다롭다고 정평이 난 데다가 이런저런 주문이 많아서 그 보호자가 오면 요양보호사들이 바짝 긴장한다. 요양보호사들이 이젠 우리들 작살났다고 한 마디씩 했지만 책임이 여럿에게 갈 이유도 없지만 조용히 일이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보호자는 이리저리 계산을 한 것 같았다. 어차피 걷지 못하니 수술보다는 안정을 취하라는 의사의 소견과 수술하라는 병원 의사의 진단을 놓고 고민하더니 수술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는 특실에 개인 간병인까지 요구한 바람에 요양원에서는 보호자의 입맛을 다 맞춰도 보호자의 성에 차지 않은 듯했다. 요양원은 그날부터 비상상태였다. 원장도 보호자한테 많이 시달림을 당했다. 보호자 입장에서야 당한 사고에 후유증이라도 생길까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요양원 측은 기준선을 넘어서 요구하는 것이 많아서 이래저래 걱정이 많았고 금전적 손실도 무시할 수 없다.
나는 어두운 터널에 갇힌 것 같았다. 집에 오면 축 늘어졌다. 결박된 사지가 풀린 끈의 압력에 짓눌려 구속에서 풀렸어도 해방된 느낌을 알지 못한 것 같았다. 출근하면 보호자가 오늘은 또 어떤 요구를 할까 신경이 쓰였다. 내 개인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일을 당장 그만두면 골치 아픈 일에서 해방되지만 문제를 그렇게 해결하면 요양원 측이나 환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힘든 상황에서 나만 쏙 빠져나온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아 두 달 가까이 어둠 속에 갇혀있었다. 심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몸도 붓고 늘 피곤했다. 내 건강에 이상이 오기 전에 휴식이 필요했다. 두 달 동안 어떻게 근무했는지 정신이 아득했다. 3년 동안 일했던 것보다 두 달간의 시간이 훨씬 길고 지루했다.
환자는 아직 퇴원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간다고 했고 환자가족과도 원만하게 일이 해결되자 퇴직을 결심했다. 가끔 정들었던 어르신들이 동요하는 경우가 있기에 마지막 근무 날에는 조심스럽게 그만둔다고 말하자 몸 아프냐고 묻는 분들이 많았다. 몸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긴장감에서 해방된 것에 기쁨이 찾아왔다.
나는 아주 기본적인 일을 했을 뿐인데 어르신들은 내게 과분한 사랑을 베풀어줬다. 정윤 어르신이 준 3000원의 사랑은 언제까지나 잊지 못할 소중한 아름다운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