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들자 늙는다.’ 나를 두고 한 말 같다.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신지 십 년이 넘었지만 내게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나 애잔한 감정 따위는 전혀 없었다. 살아 계실 때에는 전화도 제대로 하지 않고 지내온 나는 어린 시절부터 잔정을 느끼지 못했던 아버지와의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불편했던 아버지와의 감정을 정리하고 싶었다. 철원에 놀러 온 오빠의 연락을 받고 아버지의 발자취를 둘러볼 겸 오빠와 만났다. 군 생활을 철원에서 했던 남편은 40여 년 전의 기억을 어렴풋이 살려 철원노동당사로 갔다. 유령처럼 서 있는 노동당사 건물 앞에는 주민들이 농산물을 펴놓고 관광객들에게 판매하고 있다.
노동당사를 두고 뺏고 뺏기는 그날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총탄파편 자국에 몸이 벌집이 되어 주인이 바뀐 채 과거의 아픈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흉탄을 맞고 서 있는 침묵하는 노동당사 건물만 아니면 70여 년 전의 전쟁의 비극을 연상하기 어렵다. 건물 주변에는 과거의 슬픔을 잊은 나무들이 충천하는 기운을 뿜어내며 우뚝 서서 바람 따라 푸른 잎을 휘날리고 있다. 부는 바람은 남과 북을 가르지 않고 흘러간다. 하늘을 떠도는 구름도 남과 북을 자유로이 흘러가건만 가로막힌 삼팔선의 장벽은 아직도 견고하다.
육이오 전쟁 중심에 서 있었던 아버지의 흔적을 찾고 싶은 오빠는 아버지가 근무했던 X연대가 철원에 있다는 말에 잘린 과거 기억의 끈을 잇기 시작했다. 그 당시 아버지가 소속된 부대가 있던 최전방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그곳이 화천 지역이었다는 아버지의 생전말씀을 어렴풋이 기억해 냈다. 오빠는 X연대가 철원이 아닌 화천 지역 같다고 말했더니 연대는 꼭 그 지역이 아니어도 다른 지역으로 옮겨지는 일도 있고 다른 연대와 합병되는 일도 있다는 말을 군 출신 주민에게서 들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한국 땅에서 젊은이들을 징집할 때 일본이 벌인 전쟁에 총알받이가 될 수 없었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마련해 준 돈을 받아 야음을 틈타서 국경을 넘었다. 만주로 이주해서 정착한 아버지 외가로 피신했다. 만주에서 떠돌던 아버지는 해방이 되면서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육이오 전쟁이 일어나자 또다시 집을 떠나 전쟁터로 향했다. 기아에 허덕이는 홀어머니와 아내를 남겨두고 참전하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고향산천을 뒤로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숙이고 걷는 안개 자욱한 미명의 새벽길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아버지의 운명을 말해준 것 같았다.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전쟁터를 누빌 때는 본인의 생사보다는 굶주림에 처해있을 가족의 안위가 더 다급했었다는 당시 절박한 심경을 친구 분들과 하는 얘기를 흘러들었었다.
아버지는 X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에 배치됐다. 최전방 치열한 전투현장 선봉에 섰다.
“처음부터 끝까지 1로 된 부대였으니 적군이 바로 눈앞에 있고 뒤로 물러설 수 없는 그야말로 최전선 선봉 부대였지. 어차피 목숨은 하늘에 맡기고 전장에서 삶을 마감한다는 각오로 싸운 거였네, 총알이 빗발치는 곳에서 어깨를 마주하던 전우들이 옆에서 적군의 총탄에 퍽퍽 쓰러질 때면 그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눈앞에서 죽어가는 동지를 잃은 분노에 몸을 사리지 않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며 우리는 싸웠다네.”
어느 날 밤 전쟁의 참상을 친구에게 이야기하셨다. 적과 대치한 화천전투에서 화천댐을 눈앞에 놓고 뺏고 빼앗기는 총성이 요란했다. 선봉대에 선 1소대는 적군의 저항선을 뚫고 화천댐을 되찾기 위해 앞장섰다.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아버지가 소속됐던 1소대가 전멸하다시피 했다. 통째로 소대가 사라지자 군에서는 소대원 전원을 전몰부대로 처리하고 집으로 전사 통지서를 보냈다. 생과 사의 경계선에 섰던 아버지는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패잔병이 되어 산속에 숨어 있다가 중대를 찾아갔다. 중대에서는 아군인지 확인하기 위해 아버지 가슴에 총부리를 대고 암호를 대라고 하면 암호를 외치고 다시 중대에 합류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할머니의 하루는 새벽에 일어나 샘에 물 뜨러 가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아무도 떠가지 않은 첫 샘물을 떠다가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놓고 날마다 아버지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할머니는 집안의 기둥인 아들의 전사 통지서를 세 번씩이나 받았었다. 그때마다 당신의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고 온몸이 오그라드는 참담한 느낌이었다고 말씀하셨다. 먹을 게 없어서 초근목피로 생활하면서도 아들을 향한 애끓는 마음은 신앙에 가까웠다. 시시각각 마음 졸이던 할머니는 아버지의 생사를 알아보려고 전사 통지서를 들고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이장 집으로, 면사무소로 미친 듯이 찾아다녔다. 정신 줄을 놓지 않으려고 한겨울에 찬물로 머리 감고 점집을 찾아가서 점을 보는 일까지 있었다. 통신 시설이 좋은 것도 아니고 전산처리가 된 시절도 아니었으니 전쟁터에서 날아온 아들의 전사통지에 할머니의 탄 가슴은 숯덩이가 되었다.
휴전 직전에 땅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그야말로 포탄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면 포 소리가 콩 튀듯 했다는 아버지의 증언은 지금도 생생하다. 전쟁은 민간인을 포함한 헤아릴 수 없는 사망자를 내고 휴전에 들어갔다.
휩쓸고 지나간 전쟁의 상흔은 고향마을이라고 피해 가지 않았다. 제대하고 돌아온 집에는 먹을 식량이 없는 빈 항아리뿐이었다. 빈곤에 허덕이는 현실은 아버지의 두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워졌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아버지는 황무지를 개간하고 일궜다. 아버지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일군 척박한 땅은 옥토로 바뀌었다.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의 뒷모습만 보았지 갈라 터진 아버지의 손을 그때는 왜 못 보았을까. 아버지의 성실함은 주변에서 인정할 만큼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가 돈독했다. 아버지는 외유내강형이었다. 남들에겐 한없이 부드러웠지만, 가족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자녀들에게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완벽을 요구했다. 아버지 앞에서는 진실이라 할지라도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이 우리 가족의 규율이었고 불변의 법칙이었다. 자상하지 못한 아버지에게 살갑지 못했던 나는 아버지에 대한 미운 감정의 벽을 높이 쌓았다.
자녀들이 결혼해서 집을 떠나자 자녀들에게 좀 더 자상한 엄마가 되지 못함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마 아버지도 나와 똑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표현방법이 서툰 분이었는데도 원래 잔정 없고 냉정한 분으로만 치부해 버린 나의 속 좁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지금도 육이오 전사자 유골이 나오면 나라에서는 이름 없는 국군전사자 묘역에 안치한다. 나는 아버지가 잠든 고향 묘역을 몇 번이나 다녀왔나 생각해 본다. 메마른 정서로 자신을 어우르지 못했던 나는 부녀간에 매끄럽지 못한 관계원인을 아버지한테서만 찾았었다. 언제나 냉정한 딸이었던 나는 먼 길을 돌아온 길손처럼 아버지께 때늦은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비록 아버지가 누볐던 전투현장인 화천에는 가지 못했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최전방에서 나라를 지켜낸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한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산화한 장병들이 잠든 곳을 두고 부대를 따라 전선을 누비던 아버지를 그린다. 지나가는 바람처럼 흘러버린 세월에 이제야 아버지를 이해하는 나 자신의 철없었음을 깨달았다. 가로막힌 삼팔선의 장벽보다 더 두꺼운 장벽을 쳤던 나의 어리석음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한 가정의 절대 권력자였던 아버지도 세월은 피해 가지 못했다. 사막 길을 묵묵히 걷는 낙타처럼 가족이라는 등짐을 가득 지고 거센 세파를 견디며 평생을 살다가 자연의 섭리대로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총소리가 난무했던 철원에는 지금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아름다운 새소리가 평화롭기만 한 이곳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 같다. 나비가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부모 손을 잡은 꼬마가 나비를 잡겠다고 팔을 벌리고 쫓아간다.
“아버지! 아버지 동기들이 산화한 피의 능선을 이루던 이곳은 눈부신 햇살 아래 아름다운 꽃이 피었습니다. 아버지가 계신 그곳도 아름다운 꽃이 피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