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책상 앞에 다소곳이 앉아있다. 주변에 신경 쓰지 않고 독서삼매경에 빠진 모습을 보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손자가 처음 독서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단순히 용돈을 타려는 목적이었지만 어느새 독서가 취미로 바뀌어 졌다. 유치원 다닐 때 게임기를 손에 쥐고 사는 손자가 걱정되었다. 한번 게임에 빠지면 그칠 시간을 넘기고 자제력을 잃는 순간도 있었다. 게임을 전혀 안 하고 살 수는 없지만 게임의 유혹을 이겨내는 마음근육이 필요했다. 집에 있는 그림책을 한 권씩 읽을 때마다 오백 원씩 용돈을 주겠다고 했더니 눈동자가 커다랗게 변했다. 용돈을 벌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책을 많이 읽을수록 용돈액수가 늘어나니 아이에게 다다익선의 효과는 빛을 발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손자의 통장으로 입금해 주었다. 통장에 쌓인 용돈 액수가 늘어가자 녀석은 흐뭇한 표정이다. 아이에게도 돈의 위력은 대단했다.독서 대비 용돈 지급의 조건을 바꾸기로 했다. 조금씩 푼돈으로 주는 것보다 읽은 책 목록과 날짜를 기록해 놓으면 한 달에 한 번씩 결제해 주겠노라고. 한번 결제하는데 수 만 원 의 돈이 통장에 쌓여간다는 경제관념을 터득했다. 초등학교 사 학년이 되었다. 언제까지 그림책 수준에 머무를 수는 없다. 성장 단계에 따라서 신체변화가 있고 식생활이 달라지듯이 읽는 책도 그림동화에서 초등학교 고학년 아동문학으로 바뀌었다. 그림동화는 하루에 여유 있게 서너 권씩 읽었는데 글자가 빽빽이 들어찬 아동문학은 며칠 동안 읽어도 속도가 나가지 않고 지루하기도 했다. 할머니에게 받아내는 용돈의 액수가 형편없이 줄어들었다. 다시 녀석과 협상에 들어갔다. 한 권 읽을 때마다 오천 원의 금액을 제시했다. 단 순간에 열 배의 금액으로 협상카드를 내밀자 바로 OK사인이 떨어졌다. 두 사람이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달랐지만 같은 목표를 지향했다. 손자는 독서라는 매개체를 활용해서 용돈을 벌려는 목적이 있고 할머니는 손자의 욕구를 일부분 채워주면서 자연스럽게 독서하는 방향으로 끌어내려는 목적이었다. 비록 생각하는 바는 다를지라도 서로 자기 뜻을 유리하게 해석하는 동상이몽을 가지고 줄다리기를 했다.
딸 집에 가면 손자는 집에 없을 때가 많았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곧장 오는 것이 아니라 도서관에 가서 독서하고 오는 날이 잦았다. 책을 보면서 재미있는 내용에 빠져들었다. 나라를 구한 위인전을 읽는 재미로 도서관을 자주 찾는 듯하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 고려를 세운 왕건,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과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이순신장군을 섭렵하고 통일제국인 진나라를 건국하고 개혁을 이룬 시황제, 분서갱유를 일으키고 만리장성을 쌓아 폭군으로 불리는 인물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개혁과 폭정이라는 공과 과를 따지기 전에 통치의 이념보다는 도덕성을 우위에 두고 평가한다. 삼국지의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나름대로 인물평을 한다. 유비는 제갈량을 책사로 얻기 위해 삼고초려 끝에 목적을 달성했다며 지금 우리니라에 제갈량 같은 책사가 있다면 남북통일이 앞당겨질 수도 있는데 그런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손자의 생각이 기특하다. ㅡ
여섯 살 손녀가 그려서 보내준 그림선물
최근에는 인류문화를 혁신한 스티브잡스로 옮겨갔다. 과학자는 세상을 개척하는 등불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면서 녀석의 장래 꿈도 선생님에서 과학자로 바뀌었다. 독서는 재미도 있지만 마음에 풍성한 지식과 교양을 쌓아주었다. 이제는 쌓아온 지식의 높이를 자랑하려고 할머니한테 토론을 요구할 때도 있다. 슬쩍 모른 척하면 신이 난다. 할머니의 지식을 능가하는 실력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계좌이체를 할 때마다 손자와 나는 기분 좋은 시간이다.
“할머니,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카이스트에 들어가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에요.”
초등학교 사 학년이 되면서 자기 목표를 정해놓고 있는 손자 모습이 기특하다.
“그럼 입학금은 할머니가 대 줄 테니 네 꿈을 꼭 이루어라. ”
“그런데 할머니...,... 내가 대학교 들어가기 전에 할머니가 죽어버리면 어떻게 하죠?”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아무려면 그렇게 죽기야 하겠냐? 혹시 죽게 되어도 네 등록금 정도는 챙겨놓을 거니까 전혀 걱정 안 해도 돼.”
할머니의 부재로 받아낼 수 있는 등록금을 눈앞에서 놓칠까 봐 내가 생각지도 못한 걱정을 하고 있다. 갑자기 손자의 후원자가 아닌 채무자가 된 느낌이다.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돈이 넘어가는 순간 위치가 갑에서 을로 바뀌어버린다. 배 째라 식으로 나오면 채권자는 어떻게 해서라도 채무자를 달래려고 한다. 채무자가 잘 먹고 떵떵거리며 살면서도 빌려간 돈을 갚지 않아도 기분 나쁜 소리 못 하고 숨죽이며 기다린다. 혹시 채무자가 밤 봇짐을 싸서 도망가는 날이면 낭패다. 그보다 채무자가 원치 않게 사고로 죽거나 최악의 경우 벼랑 끝에 몰린 채무자가 자살해 버리면 채권자는 그야말로 끈 떨어진 연이다. 돈을 받아 낼 때까지 큰소리 못 치고 숨죽이며 기다리는 채권자의 위치를 생각해 보았다. 손자는 할머니가 죽는 게 슬픈 게 아니라 할머니의 죽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대가가 사라지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셈이다. 손자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열 살짜리가 어떻게 죽음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수 있을까.
사람에겐 어떤 강렬한 느낌이 있었던 어릴 적 기억이 잊히지 않은 경우가 있다. 손자가 다섯 살 때 친할아버지가 암 진단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칠십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손자라곤 하나뿐인 녀석이 영정사진을 가슴에 안고 할아버지 장례를 치르면서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삶과 죽음의 현실세계를 미리 알아버렸다. 칠십 쯤 되면 죽는다는 게 자연스럽게 체험을 통해서 다섯 살 아이의 기억에 각인돼 있었다. 할머니도 그 나이가 되면 죽을 것이고 만약 죽으면 받을 수 있는 등록금 혜택이 사라질 것이라서 죽기 전에 등록금을 미리 주면 하는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다.
나는 손자와 다시 협상에 들어갔다. 약속한 대로 읽은 책을 기록해 뒀다가 연말정산해서 해외여행비용을 마련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책을 읽어서 할머니한테 받을 수 있는 복지 혜택의 폭을 넓혀놓았다. 약속을 달성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달았다. 손자는 독서해서 할머니한테 받은 용돈은 대학교 들어가면 해외여행 가겠다며 모으고 있는 중이다.
손자는 하굣길에 매일 도서관으로 간다. 읽은 책을 기록해서 월말에 매일로 보낸다. 나는 손자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할 의무를 충실히 이행할 것이다. 오늘도 미래의 꿈을 안고 도서관으로 간 손자는 독서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