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생김새가 다르듯이 생각과 취미도 각각 다르다. 어떤 사람은 화려했던 젊은 시절의 자신만을 생각하고 과거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힘든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는가 하면, 코스모스를 연상케 할 만큼 연약한 것 같아도 어둠에 갇힌 듯 한 환경 속에서도 희망의 길을 찾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노트에 끊임없이 글을 쓰다가 어떤 날은 스케치북에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서희 할머니는 자는 시간 빼고는 손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요양원 침대 좁은 공간에서 그는 자기의 생각이 그림과 글이 되어 상상의 세계를 펼치고 있다.
스케치북을 들여다보았다. 연필로 그려진 그림은 어느 항구의 어촌 풍경을 담고 있다. 연필로 스케치한 색채가 없는 그림이 은은하고 멋스러워 그림 속의 상상력을 동원해 준 것 같다. 화려하진 않지만 어딘지 신비감이 숨어 있는 매력이 있다. 파도치는 물결과 항구에 매어둔 어선, 방파제 너머에 옹기종기 모인 집들은 한적한 어촌모습을 잘 표현했다.
“어르신, 예전에 그림공부 하셨어요?”
“심심해서 그냥 그려본 거예요”
그림엔 문외한인 내가 봐도 잘 그려졌다. 시골집의 마당에 장독대가 즐비한 농촌풍경도 그려져 있다. TV에 나온 풍경을 기억해 뒀다가 스케치하기도 하고 잡지 사진에 나온 풍경을 보고 그려놓기도 했다. 굴곡진 산봉우리와 숲을 표현한 그림도 있다. 그림과는 인연 없이 살아왔지만 종일 침상에 누워서 하루하루 무의미하게 보내느니 조금씩 그리다 보니 이제는 그림 그리는 일이 하루 일과가 되어 버렸단다.
깔끔한 외모에 고운 목소리와 품위 있는 말씨, 하얀 머리카락은 나이에 걸맞게 멋스러움을 은은히 풍기고 조용한 성격을 대변하여 주었다. 가정주부로만 살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일 했냐는 내 질문에 고전무용을 전공했고 학교에서 무용교사로 제직 중일 때 군인인 남편을 만났단다. 하얀 피부에 고운 자태, 교양 있는 모습은 남자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남자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프러포즈를 했다. 직업군인인 남자의 청혼을 받아준 다는 것은 직업상 한자리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근무지를 옮겨 다니는 군인의 아내로 살아가려면 자기의 꿈을 펼치기 힘들기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그녀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하루는 Yes냐 No냐 둘 중에 선택하라며 차고 있던 권총을 꺼냈다. 청혼이 거절되면 같이 죽겠다며 뽑아둔 권총 앞에 놀라서 얼떨결에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단순히 위협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권총에서 총알을 여러 발 꺼내더라며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났다며 한마디의 말이 순간의 선택으로 지금까지 살아있다며 잔잔한 미소로 지난날을 회상했다.
남편의 반대로 학교를 떠났지만 고전무용에 대한 꿈을 완전히 꺾어 버리기에는 그녀의 열정이 식지 않았다. 후학 양성 하는데 참여해서 딸을 리틀엔젤스 단원으로 무용계에 참여시켰다. 세계 각국을 다니며 민간외교를 톡톡히 한 딸이 자랑스럽다했다. 그 딸도 이제는 어머니처럼 예술단 인재 양성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단다.
과거를 회상하는 쓸쓸한 미소속에 지난날의 기억의 잔상이 고요하게 비쳤다. 그녀는 침대 위에 앉은 상태에서 몸의 각도를 틀자 춤사위가 바로 나왔다. 고운 어깨선은 잔잔한 물결이 흐르는 것 같고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한 아름다운 학 같은 자태로 변했다. 일어서기만 하면 아름다운 선율이 물결칠 것 같았다.
딸이 시간 날 때마다 찾아온다는 말에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딸은 어머니의 뒤를 이어서 예술의 혼을 펼치며 살고 있고 젊은 날에 활동하던 본인은 요양원 침대에서 스케치북에 세상의 풍경을 손끝으로 펼치고 있다.
젊어서 유복한 삶을 살았고, 요양원에 들어오면서 우아하고 격조 높은 그녀의 삶도 끝이 났다. 아니 이제 새로 시작이다. 그녀에겐 또 다른 일이 있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서 본 금강산도 기억력과 상상력을 동원해서 화폭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로 살아 움직인다. 비록 몸이 자유롭지 못해도 팔십이 넘은 나이에 정확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고 숨은 재주를 발굴하는 놀라운 신념도 있다. 꿈처럼 사라진 사막의 신기루를 쫒는 환상에 빠진 것이 아니라 현실에 적응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수많은 책들이 사물함에 가지런히 정리돼 놓여있다. 대하소설을 읽고 추리소설을 읽는 독서로 내적 지식을 쌓고 있다. 웬만한 명작소설을 거의 섭렵한 독서광인 그녀는 책과 그림이 있어서 아픈 현실을 잘 이겨낸 것 같다. 마가렛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를 몹시 좋아했다는 그녀는 스칼렛 오하라 보다는 섬세하고 정숙한 멜라니 같은 모습을 연상케 한다. 결혼해서 함께 살아온 레드버틀러 같은 야성적인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요양원한쪽에 놓인 침대가 그녀의 서재이고 화실이다. 몸이 불편해서 움직이지 못 하자 손끝을 통한 예술적인 감성은 눈앞에 다가온 절망적인 현실을 희망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이 당신에게 불만스럽게 생각된다면, 세계를 소유하더라도 당신은 불행할 것이다."
그녀는 작은 것에서 희망을 찾았고 어둠의 빛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레드 카펫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험한 길 위에 있지만 그 길을 슬기롭게 갈 수 있는 지혜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