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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moca Dec 14. 2019

거기 아무나 갈 수 있어요?

네. 아무나 갈 수 있습니다



30년을 살고서 인정한다. 선천적으로 마르고 허약한 유전자가 있는 것 같다. 빼싹 말랐다는 표현만큼 날 한방에 설명해주는 표현도 없다. 생각 없이 멸치 똥을 빼고 있다가도 어쩌다 대가리와 눈이 마주치면 왠지 모를 동포애 같은 것이 밀려오기도 한다. 길거리를 걷다 뼈밖에 안 남은 다리를 보고 저 다리로 어떻게 걸어 다니나 궁금해하다가도 통유리 건물에 비친 내 다리임을 알고 깨달음을 얻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 저렇게 말라비틀어져도 걷는 게 가능하구나! 좀 힘들지만!


식욕은 인간의 3대 욕구 중 하나라는데, 나는 정말 식욕이 없다. 먹는 게 별로 없으니 활동도 잘 안 하는 것 같은데 왜 하루하루는 그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뭐라도 하려는 마음에 유튜브에서 '홈트'를 검색해 찾아본다. 연관 동영상에 재밌(게 보이려고 자극적인 썸네일과 제목으로 어그로를 끌고 있)는 게 있어서 한번 눌러봤다. 그 동영상을 눌러본 것이 한 시간 전의 마지막 기억이다. 오늘도 만성 안구건조증 악화에 이바지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내일 또 출근하려면 자야지.





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퇴사를 결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에게도 이러한 일상이 결정적 이유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이렇게 늙기는 싫었다. 몸을 고치고 싶은 게 아니라 정신머리를 고치고 싶었다. 일에 성취를 느끼지 못한다면 다른 곳에서 보람을 찾든, 아니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다시 찾든, 뭐든 하고 싶었다.


주변의 만류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때 조금 더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 빠르게 후임자를 뽑고, 인수인계 일정을 잡고, 남들 다 하는 것처럼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을 다잡자는 핑계로 내 퇴직금을 탕진할 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히말라야라는 미지의 땅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다들 알다시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웃도어 열풍은 어마어마했다. 덕분에 주말 아침 1호선과 7호선 상행선에서는 어김없이 볼 수 있는 알록달록한 풍경이 있었다. 사람들은 저 차림으로는 히말라야도 등반할 수 있겠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그런 농담을 하면서도 실제로 히말라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히말라야. 모르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 단어의 묵직함은 어떤 투철한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전문 산악인만이 오를 수 있는 극한의 땅처럼 느껴졌다.


요즘은 아웃도어의 인기가 식다 못해 고꾸라지고 있는 만큼 한동안 그쪽 이야기는 관심 밖이었다. 그러다 여행지를 찾던 중 히말라야에 대한 포스팅이 눈에 들어왔다. 내 머릿속에 막연히 그려져 있던 그림과는 조금 달랐다. 생각보다 만만해 보였다.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아닌 게 아니라 초등학생도 다녀왔단다. 굳이 도봉산 초입에서 막걸리 한 잔 걸치고 계시는 분들 수준으로 장비를 갖출 필요도 없어 보였다. 이렇게 만만한 생각이 나를 움직였다. 까짓 거 남들 다 가는데 나라고 못할까. 세상 이렇게 억지스러울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냈고, 그렇게 내 퇴직금 탕진 여행의 목적지를 정했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비슷했다. (내가 몰랐던 것처럼) 먼저 일반인들도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코스가 많다는 걸 설명해야 했다. 그럼에도 내가 평소에 운동과는 별로 친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친구들은 이런저런 우려와 걱정하는 말들을 건넸다. 보험금 수령은 자기 명의로 해달라는 진정한 친구들도 몇몇 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별도로 보험을 안 들고 갔던 건 정말 미친 짓이었던 것 같다.) 사실 나를 잘 모르는 지인들도 딱 보면 저 앙상한 팔다리로 객기 부리는 건 아닌가 걱정했을 것이다. 나도 거울 보면 안다.





남들이 뭐라 하든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카트만두행 항공권을 끊고, 현지 에이전시를 통해 가이드를 구했다. 준비물을 하나하나 챙겼다. 등산화, 양말, 바람막이를 제외한 모든 물품은 네이버 쇼핑 최저가로 샀다. 부피가 큰 침낭과 패딩은 현지에서 빌리기로 했다. 준비 하나는 일사천리였다. 산의 시옷도 모르는 내가 히말라야를 가는 준비를 마치는 데 2주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모든 게 처음이었고, 심지어 혼자였기 때문에 이러다 훅 가는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상상하고 있었던 것과 다른 글들을 보고 나니 왠지 참을 수 없어졌다. 무지의 소치가 자기 탓인 줄 모르고 히말라야가 '나도 다녀올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증명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한테?) 그렇게 사서 가는 고생길이 열렸다.






이 글의 사진은 모두 히말라야에 가기 전 몸풀기로 다녀온 지리산 풍경이다. 카톡 프로필 사진에 걸어놨더니 "역시 히말라야네요."라는 몇몇 지인들의 반응이 흥미로워 넣어봤다. 누군가 나의 글들을 읽는다면 히말라야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달라질까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히말라야는 누구나 갈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니 꼭 가보길 권한다'는 뜻이 아니다. 누구나 갈 수 있다고 해서 아무나 다녀온다면 지금의 히말라야는 절대 그 모습이 아닐 것이라는 사실은 다녀온 내가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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