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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 기 홍 Oct 01. 2024

식탐과 고봉밥

의식은 혓바닥에서 드러난다.    

 

지치고 바쁜 일상에서 친구를 만나는 일은 큰 즐거움 중 하나이다. 더욱이 40년 가까운 세월을 녹이고 뒹군 사이라면 매번 감회가 남다르지 않을까 싶다. 건강했구나. 잘 지냈구나. 하지만 오랜 숙성을 거친 사이라도 때론 숯을 띄우지 않아 잡내를 풍기는 간장처럼, 그간에 지 못한 고약한 성향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적잖이 불편한 감정을 자아내는 고집과 은근한 자랑질이다. 특히 경제적인 여유로 기인한 자부심은 이따금 정제하지 않은 언행으로 분위기를 흩트려 놓기도 한다. 하지만 수십 년의 발효로 동화된 관계를 해치기엔 서로 너무 잘 알고 있기에 가벼운 타박 한방이면 이내 정리된다.

친구란 본래 그런 사이가 아닌가.


의외의 묵직한 타격감은 평소 가볍게 웃고 넘기는 것에서 온다. 얼마 전이었다.

주말이면 의례 예닐곱의 친구들이 캐롬 쓰리 쿠션(당구 게임의 일종)으로 어울려, 저녁 식사를 겸한 술자리로 이어진다. 대화의 주제는 매번 비슷하다. 자식 이야기와 건강과 연관된 다양한 정보 공유, 그날도 여전했다. 술을 줄이라니, 담배를 끊으라니. 영양제는 뭐가 좋다니. 그야말로 남장 아줌마들의 수다는 저마다 한 사람씩 시선에 묶어놓고 침을 튀기며 맹렬했다.  굶주린 배 허기 채우듯이 상대의 반응과 눈치는 신경 쓰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참았을까? 봇물이 아닌 뚝이 무너진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짜증 섞인 목소리가 터지면서 사달을 직감한 시선이 일제히 집중됐다.


 잠시의 침묵.

난감한 상대를 쥐어뜯을 듯한 친구의 고까운 눈초리가 제법 불안했다. 원인은 삼겹살을 안주로 공깃밥을 먹는 중에 열무국수와 계란찜을 추가로 주문한 친구에게 식탐이란 단어를 쓴 것에서 비롯됐다. 본디의 뜻에 비해 상당한 펀치로 인식되는 그 말은 먹을 양식이 없어 초근목피로 굶주림을 버티던 혹독한 보릿고개 시절에 소화되지 않은 거친 섬유질로 똥 쌀 때마다 똥구멍 찢어진다는 말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사용하던 말이었다.

그 당시 식탐자는 어른과 아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원망과 불평의 대상이었으니, 오죽 먹을 것이 없으면 식구라도 많이 먹거나 밝히는 것을 그렇게 생각했을까 싶다.

그때의 우리나라 서민의 삶은 17세기 조선을 방문한 헨드릭 하멜이 작성한 표류기에도 언급됐다. 고봉밥을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우는 사람들을 가난하지만, 식탐은 부자인 민족이라 비꼬았단다. 비록 농경사회인 당시에는 가축보다는 곡식 생산량이 많았기에, 단백질 보충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라 완곡하게 마무리했지만, 하지만 그가 간과한 점이 있다. 당시엔 아침과 저녁 식사. 하루 두 끼가 일반적으로 점심이 없던 시기였다. 동트기 전부터 해질 때까지의 중노동을 견뎌야 했고, 다른 실증 못 할 구전 중 한 가지는 소(牛)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없는 집이 더 많았던 것이 사실이고 그들도 고봉밥을 해치우는 사람들이었지만, 쌀밥과 보리나 구황작물로, 섭취하는 곡식의 질이 달랐다고 한다. 여하튼 집안의 보물인 소는 온 식구의 생계 수단이었고, 가장 큰 재산이었다. 그런 소가 병들거나 행여 다치기라도 한다면 보통 큰일이 아니었기에 노동시간을 조절해 주기 위해 본인이 두 번의 고봉밥을 먹어서라도 소처럼 일한다고 했다. 즉, 그들의 고봉밥의 의미는 식탐이 아닌 배려로,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적 의미와는 다른 면이 존재했다고 남해 시장에서 우연히 합석한 노인의 말에 수긍 됐던 적이 있다.


이렇듯 식탐이란 단어는 부족한 가운데 욕심을 빗댄 말이기에 입 밖으로 내려면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발끈한 친구는 평소에도 속이 불편하단 이유로 육류를 선호하지 않는, 술 또한 두 잔이 총량일 정도다.

그는 유독 면 종류를 좋아하며, 고기를 먹을 때면 반드시 밥 반 공기와 함께 먹기에, 사실 그다지 위대한 친구는 아니다. 반면 구박한 꼴이 되어버린 친구는 자칭 소식주의자다. 그는 친구 중에 가장 빨리 젓가락을 내려놓고, 항시 의자를 뒤로 빼서 앉아서 먹는 것을 바라본다. 여기서 자칭이라 한 것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짧은 사이에 남들이 먹는 양을 훌쩍 넘는 것을 진짜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아서다.


남, 여 가릴 것 없이 어느 정도 나이를 먹게 되면 익숙한 습관을 고집하는 경향이 사고와 언행에 도드라져, 소위 꼰데가 되어 최소한의 배려를 무시한 편리 주의 성향으로 바뀐다고 한다. 물론 경험칙에 의한 지혜로 발현되는 점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상식을 무시한 단순함에 젖게 된다면 험담의 주인공으로 부각되는 것이고, 슬기롭게 처신한다면 인품의 넉넉함을 평가를 받는다. 나 또한 순간의 단면에 상대를 평가하는 선입견을 부끄러워한 적이 많았고, 돼먹지 않은 눈길로 상대를 무시하거나 회피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중년이 되면서 세상엔 아무것도 아닌 인생은 없다는 초라한 깨달음 덕분에 급격히 줄었음이 위로가 된다.


그날의 저녁은 우리가 일상 중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말 중에는 자칫 상대의 심장과 가슴을 향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운 귀중한 촌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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