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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 기 홍 Jun 14. 2024

속상해? 왜?

   오늘 하루, 거울이 먹어버렸다.


   늘 얌전히 욕실 한 면에 다소곳하던 그녀가 단단히 심술 난 모양이다. 하루에도 대여섯 번, 매번 콧구멍만 후비고 지저분한 코털을 면상에 대고 자른 뒤, 쌩하고 돌아선 나를 기어이 밉상으로 박아버린 것 같다.

무심했었다. 그녀의 바람은 너무 사소해 그저 얼룩과 물때만 닦아주면 사계절 내내 봄날의 햇살로 반짝반짝 반겨주건만, 마침내 게으름은 무성의한 손바닥 문지름에 비친 이마로 대가를 치렀다.


   한때 대리석 사촌과 비겼던 자리에 어느 틈에 꼰 명주실 주름이 난초 줄기로 음영 졌고, 매끈 빤질 은행알 같던 속칭 애굣살은 난잡한 실금이 진 살점으로 중력에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성이 차지 않은 그녀의 작심은 흠칫해 닦은 수건 끝자락에 회심의 방점을 찍었다.

관자놀이 부근엔 희미한 먹물 점을, 콧방울 땀구멍에는 검은깨를 잔뜩 박아 놓은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곰곰이 생각해 보니, 특정 시기라기보단 그녀를 홀대하던 때부터 아닌가 싶다.

보는 족족, 비쳤음에도 무신경과 얼룩진 때로 알지 못해 자연스레 눈에 익힐 기회를 놓친 것이 일시의 충격이 됐으니, 허! 하는 웃음이 나온 작은 사달은 뜻밖의 깊은 사유를 일으켰다.


   돌이켜 보니 살면서 의외로 기겁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천재지변 또는 돌발적인 사고나 상황을 제외하곤 대부분은 어떤 징후가 먼저 있었다. 흔히 “전엔 안 그랬는데.” 마치 갑작스러운 일로 치부하는 전형적인 생활 감정을 조금만 되짚으면 조짐인 무언가 존재했었다. 이따금 아팠던 속이 위궤양 진단을 받은 것이며, 어느 날 묵직해진 허리와 종아리를 콕콕 찌르는 저림 증세를 무시한 아둔함이 허리 디스크로 발전한 고통의 대가를 치르는 것도 그렇다. 통증은 대부분 앉아서 작업하는 내겐 더욱 가중하니, 30분을 유지하기가 끔찍하다.

좀 더 아찔한 사건을 떠 올리자면, 20여 년 전 큰 병의 징후를 그와 같이 익숙한 무시로 자칫 사진 속 미소 짓는 자가 될 뻔한 적이 있었는데, 천운을 입은 덕에 다행히 이 글을 쓰고 있다.


   그 이후 5년간 중증 환자로 분류된 나는 한동안 의식이 요구한 가치 부정을 심하게 앓았었다. 첫 번째는 매사 전투적인 싸움닭 생활에서 무디고 순응하는 삶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주인공이 아닌, 낮은 비중의 조연이나 카메오로의 역할에 만족하는 겸손이었다. 마지막은 그동안 소중하고 특별한 것들의 평가가 뒤바뀐 것인데, 장미의 자리에 들꽃이 들어오고, 소소하지만, 손때 묻은 오브제에 느끼는 행복이었다. 물론 그전 삶의 방식들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했기에 살고, 살아냈기에 지금이 있지 않겠는가? 단지 큰일을 겪은 뒤 인생의 짬이 생기니, 비로소 주변의 아름다움을 담는 혜안이 생긴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항상 반짝였다면 시나브로 자연스러웠을 주름이 무관심한 시간의 틈에서 이끼로 자란 것을 누굴 탓하랴.

냉담해진 그녀가 밝힌 주름살에 결코 화가 나거나 초라하단 거슬림은, 언급했듯이 무디고 순응하는 삶을 노력하기에 크지 않았다. 그저 삶의 이치에 또 한 번 경탄할 따름이다. 무엇이 됐든, 잠시의 소홀함과 외면은 하시라도 “이게 언제?”라는 부정적 놀라움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재차 일깨운 하루였다.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처음 얼굴의 주름살과 기미에 잠시 놀랐던 것은 진부하게도 인생의 수고로움을 이겨낸 산물로 여겨졌다. 모두 내 삶이 집약된 시요,노래추억이다. 수 없이 지난했던 평생의 일상을 매듭에 맞춰 애를 쓴 빗질이었다. 그러므로 잘 살아낸 나를 칭찬할 증거로 여기고 싶다.


사연의 터전이 인생 아니던가?


사연은 곧지 않은 주름이 중첩되고 굴곡진 흔적으로 삶이 된다. 장미도 백합도 하물며 들꽃 역시 평면의 잎사귀에 주름이 있기에 아름답지 않은가? 주름은 사람을 꽃으로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발자취다.

순수하게 늙어가는 일보다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어쩌면 궁극의 아름다움이란 세월의 흔적에 미소 짓는 친절함이 아닐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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