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 기 홍 Mar 16. 2024

인공지능

   내가 자주 이용하는 카페는 큰 유리 창문 너머로 야트막한 산 풍경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직접 발품을 팔아 찾은 장소로 스스로 기특하게 여기며, 한편으론 행운의 기쁨을 주는 곳이다. 네겐 나름으로 외부 작업 공간의 적합성을 고려하는 세 가지 요건이 있는데, 첫 번째는 시야가 자유로운 곳이요, 두 번째는 잠깐씩 서성이며 생각을 정리하는 공간이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커피가 입에 맞아야 한다. 다행이었다. 가벼운 주머니 사정에 어울리지 않는 훌륭한 맛이어서, 그저 카페 주인에게 감사, 감사. 자꾸 감사하게 된다. 아쉬운 점이라면 국립공원 내 지역이라 흡연이 제한된다는 것이지만, 덕분에 몇 시간이라도 금연하는 셈이니 그 또한 감수할 수 있다. 


   고정석처럼 돼버린 자리에선 풍경을 제대로 즐길 수 있고, 다수의 대화로 인한 실내 공명이 최소화되는 위치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선 남들보다 일찍 자리 잡는 수고가 필요하지만, 시간효용 가치의 만족도가 높은 편이기에 불편함을 느낄 새가 없다. 그날은 의외의 손님들이 먼저 와 앉아있었다. 까만 백 팩을 옆에 놓고 노트북을 쳐다보고 있는 이들은 청년 둘이었다. 평소 이 시간엔 잠시 들러 커피를 마시고 가는 등산객들뿐이었는데, 평상복차림의 그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다행인 것은 내가 찜해 놓은 테이블 하나 건너였다. 불과 1미터 간격으로 머리가 지끈거릴 공명을 피했다고 안도한 순간, 얄팍한 편리에 화색이 돈 내게 실소하며 서둘러 노트북을 펼쳤다. 그들의 대화는 굳이 듣지 않으려 해도 자기소개서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AI(인공지능)를 통해 작성하는 모양이었다. 그동안은 다양한 매체나 뉴스를 통해 멀리서 봐 왔던 현시점의 가장 핫한 미래 지향적 분야를 코 앞에서 접한 것이었다. 그러나 호기심을 갖고 그들을 지켜봤던 오 분여의 시간은 뜻밖의 한숨을 쉬게 했다. 다음 절차로 이끌어 줄 자기소개서란 대단히 중요한 서류를 작성하는 중임에도 그들의 표정에서 진지함이나 절박함은커녕, 마치 게임하듯 키워드마다 킥킥대는 가벼운 어투에서 오는 실망이었다. 부인하진 못하겠다. 꼰대의 선입견이나 반감이 은연중 작용했으리라. 오늘따라 유독 쌉쌀한 크레마를 다시면서 새삼 세상이 참 편리해졌다는 씁쓸함은 하루의 시, 분, 초의 진화에 적응 못 한 고루한 사람임을 실감하게 했다. 


   불현듯 나의 현재와 청년들의 과거가 공존하는 인터스텔라의 시공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 고루하다고 인정하니 그 증상은 곳곳에서 보였다. 노력 없이 살을 뺄 수 있다는 식품, 앉거나 서 있기만 해도 알아서 운동을 시켜주는 장비 등등. 뭐 자율 운행이라든지, 휴대폰 하나로 가전제품을 제어하는 기능과 관심 분야를 알아서 추천해 주는 인공지능형 제품들은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은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진보된 것들이니까.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눈가의 잡티처럼 거슬리는 것들은 한 번은 잡고 늘어져야겠다. 인간이 번영을 이룬 원동력 중에 실패를 통한 교훈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것이든 간에 실패 후에는 단념 아닌, 부단한 노력과 집념을 바탕으로 새롭게 방법과 방향을 모색해 기어이 목표에 닿는 건 인간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입에서 단내 나는 고통의 과정은 지금이 아닌 향후 자존과 자신감의 토양이 되고, 비록 당장은 한계에 굴복한 비참한 심정에 펑펑 울지언정, 결국 성찰을 통한 내면의 단단함으로 재도전 의지를 북돋을 건강한 실패가 아니겠는가? 성공이란 실현을 맛본 감정 또한 비슷하다. 과정과 경험은 또 다른 발전과 진화의 양분으로 축적되어 상호연계의 시너지로 상승해 사회를 윤택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된다. 


   실제 눈앞에서 벌어진 AI의 결과물에 마음이 착잡했다. 완성된 내용은 모르겠지만, 청년들의 얼굴이 흡족한 건 짜 맞춤이 끝났음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같은 키워드에 자기소개서를 생성한 그들이 여기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얼추 이 십여 년 전, 결은 다르지만, 이와 비슷한 일이 실제로 벌어진 적이 있었다. 전국 각지의 미술학원에서 배운 학생들의 그림이 주제별로 대동소이해 빈축을 샀던 때가 있었다. 나무와 사람. 자연과 풍경을 그린 학생들은 학원마다 획일적인 지도로 인해 특징은 없고 예쁘기만 했던 그림들이었다. 현재 가십거리로 종종 입방아에 오르는 성형미인들의 닮은 꼴도 당시 그림의 데칼코마니엔 미치지 못할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 역시 단어와 문장 몇 개만 다른 수천수만 장이 평가자 앞에 놓일 텐데,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편리함의 지향과 인간 고유영역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필요와 필수가 헛갈리는 세상이다. 

필자부터가 원고지가 아닌 노트북을 사용하고, 필기구가 아닌 자판의 편리함에 젖어있다. 

그러나 편리함은 거기까지다. 정신과 육체의 고통을 극심한 한계점까지 몰아붙여야 하는 퇴고와 탈고는 때론 집필을 망설이게 하는 두려움일 정도로 끔찍하지만, 오직 나만이 집필 의도의 숨을 불어넣을 수 있단 자부심으로 지난한 작업을 견뎌내는 것이다. 그 과정은 누구도 대체하지 못할 필자의 고유영역이고, 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영화인 아바타가 현실로 올지도 모르겠다. 아니, 좀 더 나가서 아바타 같은 존재가 모든 행위를 대신하면서 인간은 그저 감정의 향유를 즐기는 세상도 상상하게 된다. 나는 이 땅에 티끌의 존재로도 남아있지 않을 때겠지만, 현재를 사는 사람으로서, 지구상 종족의 한 일원으로서 딱 한 가지만 바란다면, 새 생명의 잉태와 출산만큼은 인간의 사랑 행위를 통해서 유지되길 간절한 마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토록 아름다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