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고(古)지도, 한성 삼지구정(漢城 三池九井)
미시령 굽이굽이 고개.
빗길 속 자동차 전조등은 차량 통행이 거의 끊긴 도로의 반사된 불빛보다 칙칙해 애처로웠고, 유령처럼 스치는 나무들은 때때로 거센 바람에 가지를 틀어, 차 유리창에 사정없는 물볼기를 후려쳤다.
“형님. 속초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퍼붓는 빗줄기를 힘겹게 걷어 내는 와이퍼의 강약을 조절한 장춘호가 에어컨 스위치를 누르며 물었다.
“일단 도착하면 선생님께서 연락을 주실 거야.”
살짝 RPM을 올린 에어컨이 순식간에 앞 유리의 습기를 반원으로 제거해 나갔다.
“그럼, 주희 씨는 아직 정확하게 모르는 건가?”
“차츰 강해진다더라. 처음과 다음, 그리고 그다음. 놈들의 기운을 접하는 횟수에 따라 공유할 이미지가 선명해진다고 하셨어.”
“그 드므라는 것에 보인단 말이죠?”
길었던 내리막 굽은 길을 막 벗어난 장춘호가 느슨했던 가속 페달에 힘주었다.
“그래, 일종의 텔레파시인가 봐. 드므의 이미지가 즉시 가디언을 통해 선생님께 보이는 거지. 시간이 지날수록 감지반경도 넓어지고.”
“기왕이면 초정밀 GPS나 내비게이션처럼 좌표가 딱 떨어지면 좋겠는데.”
“띠링! 띠링!”
그때였다. 도 민수의 안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린 것이.
“거의 속초에 다 와 갑니다. 네? 그럼, 국도? 네, 네, 바로 돌리겠습니다. 네.”
도 민수는 곧바로 장춘호에게 차를 돌리란 손짓을 했다.
“놈들이 국도를 타고 인제를 지나고 있단다.”
“국도로 인제요?”
장춘호는 즉시 중앙선을 넘어 차 머리를 돌린 후, 액셀을 깊숙이 밟았다.
“그래! 인제에서 어디로 갈진 모르지만, 거리나 시간상으로 보아 어쩌면 우리와 미시령 초입에서 마주쳤을 수도 있었겠어.”
“가능하죠. 국도면 외길인데. 근데, 그 정도도 주희 씨가 볼 수 없는 겁니까?”
“주변을 볼 수 없었대, 어둡고 비도 많이 오고. 근데 자꾸 비아냥으로 들린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일말의 미심쩍은 인상을 얼버무린 장춘호가 화제를 바꾸었다.
“어디로 가는 걸 까요? 분명 절대 선을 납치한 곳일 텐데. 참! 아까 놈들이라고 했잖아요? 몇 명이래요?”
“두 놈, 아우라가 다른 놈들이다.”
“띠링! 띠리링!”
불과 이십 분 차이를 두고 반대편 고갯길을 오르는 중에 도 민수의 휴대폰이 또 한 차례 울려댔다.
‘부.. 동길?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빗물을 가르는 타이어 마찰음에 간간이 새 나오는 부동길의 흥분한 목소리가 장춘호의 귀를 쫑긋 세워 놓고, 도 민수의 표정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래. 어. 어. 어디? 진짜? 동길아! 우리도 지금 인제에서 두 놈을 쫓는 중이야. 그러면 서울이란 얘긴데…. 알았다. 너도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고.”
“형님. 뭐예요? 동길이가 뭘 좀 알아냈데요?”
그 사이 내리막 중턱, 인제를 알리는 표지판을 지난 차의 엔진이 윙윙대는 조바심으로 속도를 끌어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춘호야. 고속도로로 나가자. 여기가….”
그는 내비게이션을 조작해 동대문을 찍고 난 후, 안내 시작 버튼을 눌렀다.
“동대문?”
“그래. 우린 그 옆의 창신동으로 간다.”
“창신동요? 동길이가 찾긴 찾았나 보네?”
“좀 있다! 일단 선생님께 전화가 먼저니까. 내비게이션이 동 홍천으로 안내할 거야. 길이 나쁘지 않으니까 최대한 서둘러.”
그는 어두운 빗길 속, 국도 운전 주의를 당부하곤 단축 버튼을 눌렀다.
“선생님, 접니다. 방금 부 동길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놈들의 차고지를 알아냈다고 합니다….”
눈을 부릅뜨고 빗길 속 국도를 달리는 장춘호가 들은 통화 내용을 이랬다. 화면이 깨진 부암동 사건 근처 CCTV에서 단서를 찾지 못한 부동길이, 납치 당일 김밥집을 중심으로 진입 도로 인근 CCTV를 확장해 추적한 것이다. 세검정 방향과 북악산 길, 청와대 방향에서 진입해 김밥집 삼거리를 지날만한 차량을 모조리 찾아 분석하던 중, 특이한 현상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의문의 검은색 밴 승합차가 진입한 뒤, 청와대 초입부터 CCTV 화면이 순차적으로 깨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차를 두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자,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고 했다. 한 마디로 승합차는 일정 시간 동안 어딘가 멈췄다 움직였단 추정이었고, 그곳이 김밥집 주변이라 확신한 부동길은 동선 추적 결과 검은색 밴의 최종경로가 창신동이었다고 했다. 1980년대 봉제 공장이 짧았던 영화를 누리기 전엔 절벽 마을이라고 불리던 지역. 6.25 전쟁 이후 엉성하게 난립한 판자촌 뒤로 수십 미터 거대한 화강암 돌산의 수직 절벽을 두고 피란민이 붙인 명칭이었다. 거슬러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의 인창방과 숭신방에서 유래된 정식 동명이 있다. 하지만, 세인들이 돌산으로 즐겨 부른 까닭은 일본 강점기 이 지역 채석장에서 생산된 질 좋은 화강암이 현재의 한국은행과 서울역, 옛 서울시청. 그리고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 등에 사용된 근대 역사의 강한 이미지 탓이었다.
여명이 트기 전, 뿌연 안개가 똬리 튼 골목길에 전조등이 젖은 비루한 차가 멈췄다. 그리고 내린 두 사람. 그들 위로 얼기설기 전깃줄이 늘어진 시멘트 기둥엔, 안개에 갇힌 힘 잃은 등이 파리한 빛으로 겨우 살아 있었다.
“이건 뭐, 완전 달동네가 따로 없네? 서울 중심이 맞나?”
사방을 훑은 장춘호가 뜻밖의 생경한 골목 풍경에 빗물 먹은 벽을 더듬기까지 했다. 손끝에 묻은 찐득한 이물감은 벽돌 틈에 낀 건조했던 이끼였다.
“선배!”
마치 벽에서 일어난 듯 착시로 나타난 이는 부동길이었다. 그는 좁은 골목을 얼마나 헤집고 다녔는지, 옷의 앞뒤에 굴뚝의 검댕 같은 이물질이 잔뜩 묻어있었다.
“찾았어요, 가시죠.”
동길은 장춘호와 가벼운 눈인사를 하곤, 곧장 모습을 감췄다. 얼핏 한 집인 줄 알았던 벽 사이 두 사람이 겨우 교행이 가능한, 길이라고 하기엔 어색한 틈이었다.
“한때 봉제 공장이었던 건물인데, 흔적만 있고 비었어.”
틈새 길을 앞서가는 부동길이 뒤따르는 도 민수에게 현장의 상황을 말하며 돌아봤다.
“가 보면 알겠지만, 그 흔적이란 게 봉제완 전혀 연결이 안 되기에 하는 말이거든?”
“우리가 인제에서 쫓던 자들이 어쩌면 여기로 오는 중일지도 모르지. 어떤 이유에선지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탔으니까 한 시간 이상은 차이 날 거야. 그 안에 절대 선을 찾고, 없다면 기다려봐야겠다.”
도 민수는 부동길의 등짝을 재촉했다. 어느덧 제법 식별이 용이한 새벽이 움트고 있었다. 도 민수와 장춘호를 안내하는 부동길은 그 후로 몇 개의 오르막 골목을 지나, 낙산 성벽 아래 가파르게 선 2층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허름했다. 입구에 붙은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도시재생사업으로 새롭게 태어난 봉제 문학관-
주위의 작은 집들은 아직 온전히 새벽 숙면 중이었지만, 접착력이 무뎌진 테이프는 잔잔한 바람에도 잔망스레 포스터를 팔랑거리고 있었다.
“선배, 여기 2층. 그리고 저기. 저기에서 3일 동안 주차돼 있었고.”
그는 워낙 협소해 차 한 대 간신한 주차장과 맞은편 CCTV를 가리켰다.
“삐꺽!”
부동길은 눈썹을 한번 밀어 올리곤 거침없이 계단을 올랐다. 뒤따라 오르는 도 민수는 입구가 강제로 열린 흔적에 동길을 보고 픽 웃었다.
“넌 밖에서 만일을 대비해야지.”
그의 의중을 알아차린 장춘호가 다시 나가는 사이, 계단 끝에 오른 도 민수는 부동길이 휴대폰으로 비추는 탁자 앞으로 다가섰다.
“이거야! 내가 말한 흔적이.”
그는 10평 남짓한 벽면을 재빨리 훑고, 다시 탁자 위로 불빛을 고정했다.
“봉제 공장 사무실이었던 것 같은데, 이게 영 맞질 않아? 의류나 제품 패턴이 아니라 고(古)지도야. 이것들은 100년 전, 30년 전. 20년 된 지적도와 현재의 지적도고.”
그는 투명 비닐 커버 속 종이들을 번갈아 비추며 알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한성 삼지구정(漢城 三池九井)- 도 민수는 그 중, 고(古)지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CCTV를 처음 분석한 세운상가 사무실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오랫동안 종묘를 바라보고 서 있던 김준석이 한참의 침묵을 깨고 ‘드므’를 준비하라기 직전까지 수없이 반복했던 단어가 우물이었다.
“동길아! 선생님께 보여야겠다.”
“그렇지? 선배가 봐도 이상하지?”
“아직 모르겠지만, 중요한 단서일 수 있겠어. 넌, 춘호하고 남아서 좀 더 지켜봐. 섣불리 행동하지 말고. 알았지?”
부리나케 문서들을 챙긴 도 민수가 부동길의 어깨를 잡고 미끄러지듯 계단을 내려와 장춘호를 찾았다.
“춘호야! 동길이한테 듣고, 내 말 대로 해라. 둘 다 휴대폰 진동으로 바꿔. 행여 벨소리로 곤란하지 않게.”
그는 말꼬리를 남기고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부동길은 다시 한번 그 모습에 놀라 엉겁결에 중얼거렸다.
“허! 미치겠네.”
“왜? 놀랐어?”
“그니까? 저건 귀신이야. 누가 사람이라고 하겠어?”
그의 터무니없단 표정에 재미를 느낀 장춘호가 대비되는 미소로 한마디 덧붙였다.
“선생님이 그러시더라, 누구나 남이 놀랄 만한 것을 하나씩은 있다고. 생각해 보니까 진짜 있더라고.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것도 그중 하나고.”
춘호는 동길의 어깨를 건드리며 눈짓했다. 동길의 차로 가자는 것이었다.
“허! 그러냐? 그러니까 내가 지금 널 보고 놀라야 하는 거지? 지랄!”
“하하하! 그렇지! 뭘 알겠냐만.”
“허! 허허!...허허허!”
부암동 김준석의 집.
천장에 걸린 삿갓 등 빛이 노랗게 뭉그러진 탁자 귀퉁이.
김준석은 도 민수가 펼친 지도를 뚫어지게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외부의 소음과 완전히 차단된 방은, 아파트 참새들의 이른 아침 지저귐도, 아직 열기를 뿜지 않는 여름날 뽀얀 햇살도 바깥세상에 가둬놓았다.
‘틱, 톡. 틱, 톡.’
“흠!”
김준석의 침묵이 길어지는 사이, 벽에 비친 숫자가 깜빡이다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에도 민수가 긴장했다. -2.17- 희망의 소멸 위험이 턱밑까지 가까워졌다. 벅수의 시간 감소는 얼마 전의 의식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아울러 끊이지 않는 각종 패악스러운 사건 또한 시간 회복을 방해하는 크나큰 요인이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
여전히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는 김준석의 입술은 여전히 다물어 떨어지질 않았다.
“그자들이 화천에서 멈췄다고 하셨는데?”
“민수야! 분명 그곳에서 기운이 감지됐다고 했지?”
“네, 엷은 에너지 파장이 남아있었습니다.”
긴 생각의 터널을 빠져나온 김준석이 비교해 들었던 지적도를 놓고, 지도의 한 구역을 크게 연필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자들은 네 말대로 서울로 올 가능성이 클 것 같다. 이 지도가 뭔질 아느냐?”
“제목을 봐선?”
“그래. 과거 한양에 있는 세 개의 연못과 아홉 개의 큰 우물을 표시 놓은 지도다.
물이 귀한 과거에는 상수원으로 쓰는 큰 우물을 국가 차원으로 관리했었다. 어쩌면 캐이런이 은신할 만한 곳을 좁힐 수 있겠구나.”
김준석은 일어나 커튼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창가에 기대있던 맑은 햇살과 재잘대는 새소리가 넘어지듯 방안으로 쏟아졌다.
“각오했던 바가 아니더냐. 소멸의 시간이 앞당겨진다는 것 말이다.”
그는 태연한 웃음으로 걱정 가득한 도 민수의 어깨에 양손을 얹고 힘을 주었다. 그런 후, 탁자 중심에 놓은 지도를 짚어 본격적으로 의중을 풀어 놓았다.
“고대부터 벅수들이 인간의 염원을 갈무리한 곳은 두 곳이었다. 선과 희망의 염원은 하늘, 악과 절망은 지하. 즉, 맑고 밝음과 습한 어둠으로 나뉜 것이다. 감천 마을의 첫 의식을 일출에 맞춘 이유가 그 때문이기도 했지. 그와 반대로 악과 절망은 땅속 깊이 음습한 곳에서 농축된 염원이 우물을 통로로 분출 되어왔다. 캐이런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곳을 알 수 있겠단 말이, 바로 여기에 표시된 우물의 위치 때문이다.”
그는 휴대폰을 문진 삼아 지도 양 끝을 고정하고 연필 꼭지로 표시를 찍어갔다.
“여기 인왕산과 백악산. 또 여기가 서촌, 북촌. 그리고.”
그는 연필 꼭지를 백악산과 대각선으로 그어 한 곳에서 멈췄다.
“여기가 수표교인 거로 보아 지금의 청계천이겠지. 지적도는 지도에 나타나지 않은 지점 어딘가를 찾기 위한 것일 거고, 그 지점은 구정(九井) 중에 수로와 가까운 우물일 거야. 수로 역시 지하에서 발원해 형성된 거니까.”
“지금의 청계천이라면, 본래 이름이 따로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때, 도 민수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장춘호와 부동길이 현관 앞에 도착했다는 전화였다. 도 민수는 창신동에서 기다리는 그자들이 화천에서 서울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말을 전하는 중에, 지도에 확신한 김준석의 지시로 부암동으로 불러들였다.
그들이 자리를 잡는 때를 기다린 김준석은 한 호흡을 끊었다 다음을 이었다.
“지도를 이해할 필요성이 있기에 간단히 말하자면, 옛 이름은 청풍개천(淸風開天)이었다. 지금의 청운동 일대 북악산 기슭에서 흐르는 냇줄기가 한양 중심가를 흐르는 지점부턴 청풍을 빼고 개천(開川)으로 불렸다. 그게 일제강점기에 청계천(淸溪川)으로 엉뚱하게 바뀐 거고. 내 기억엔 당시의 청계천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심하게 오염된 개천이었다.”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도 민수완 달리, 이제 막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은 춘호와 동길이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모전교와 광통교. 그리고 수표교. 청계천과 가장 가까운 우물로 표시된 곳이 여기. 쭉 아래로 여기, 흥인지문(興仁之門). 지금은 이 사이에 다리가 많이 생겼지만, 당시엔 표시할 만한 것이 아닌, 징검다리 수준이었으니, 그렇다면 여기, 수표교에서….”
그는 지적도를 번갈아 짚으며 변화된 지역을 좁혀 나갔다. 연필의 흑심이 선과 원을 그리며 동대문 방향으로 지워나가던 도중, 갑자기 손에 쥔 연필이 부러지더니, 김준석이 스프링에 튕긴 탁구공처럼 뒤로 나자빠졌다.
“흐윽!”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이었다. 극심한 경련과 경직이 그를 애벌레 몸통으로 구겨 놓고, 손끝에서 손목까지 회색의 거친 나무 표피로 변했다 돌아오길 반복하면서, 흘린 땀은 얼굴과 닿은 바닥 지점에 거미줄 형태의 끈끈이로 흉측한 막이 되었다.
“선생님! 선생님!”
혼비백산하여 그를 급하게 안은 도 민수가 반사적으로 벽의 숫자를 확인했다.
-1.09-
모골이 송연한 찰나의 두려움에 감각을 잃은 넋이 수만 길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으-으-으-으….”
“선배!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거야?”
“선생님! 선생님!”
“끄윽! 끄극!”
몸을 뒤틀어 웅크리고 펴는 그의 낯빛은 창백함이 아닌, 나무 화석의 천년 건조함이었고, 바닥을 쥐어 파는 손톱을 세울 때마다 얼굴과 바닥 사이에 하얀 실타래가 생겨났다. 지켜보는 이들로선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저 가슴 졸이는 억겁의 찰나를 겪어 내는 것이 다였다. 도 민수의 당혹한 눈동자는 계속해서 벽의 숫자에 빨려 들어갔다. -1.20- 흰색이었다. 그는 순간순간 붉은색의 착시가 보여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소수점이 숫자가 되길 간절하게 움켜쥔 손이 핏기를 잃고 살을 뚫어 움푹 팬 줄도 모를 만큼.
“끄으…. 응.”
불안의 적막을 깬 김준석의 다행한 신음이 얼마의 시간 뒤에 들렸는지 까마득했다.
“민수야, 잘 들어라.”
의식을 찾은 그의 첫 마디는 잠긴 쇳소리로 담담했다.
“내가 세상을 되살린 순 없다. 난, 오랜 세월 축적된 염원을 제 방향으로 이끌다가 때가 되면 소멸하는 존재인 걸 알 것이다.”
그는 불편한 숨을 크게 내쉬고는 볼에 묻은 끈적한 실타래를 힘없이 훑었다.
“다행히 절대 선이 있을 만한 곳을 좁혔으니, 희망은 살아있다. 손을 펴 봐라.”
그는 내민 손바닥 위로 탁자의 커피 원두 한 알을 올려 놓았다. 그리고 가만히 그의 손을 오므려 주먹을 쥐게 했다.
“무엇이 있다는 게 느껴지지? 그런데 작아서 꽉 차진 않고.”
도 민수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서 따스함이 묻어 나왔다.
“춘호와 동길이도 민수의 느낌을 알 것이다. 그 원두가 희망이라면 손은 사랑이다.
그 사랑을 잉태한 존재가 우리가 찾는 절대 선이다. 감히 벅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결하고 거룩한 존재. 따라서 나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해 절대 선을 찾아야 한다. 거기 지도 좀.”
그는 벽에 기댄 허리를 곧추세우고 지도의 한 쪽을 가리켰다.
“여기 수표교에서 이쯤의 배오개, 그리고 아마, 여기 어디쯤. 전태일 다리까지가 우물 위치로 추정할 수 있는 곳이다. 몇 군데 큰 시장과 재개발 공사로 철거되거나 비어있는 건물들이 복잡하지만, 가디언과 너희들이면 가능해.”
힘겨운 말끝에 불거진 또 다른 현상. 그의 하관과 쇄골에 드리운 나뭇결무늬였다.
“선생님.”
“호들갑 떨지 마라. 지금부터 가디언과의 교감 외엔 모든 걸 단절할 거니까.”
그 이상의 질문도 지시도 없었다. 창가를 차지했던 아침 볕은 어느새 침대 넘어 구석까지 와 있었고, 바람 또한 머금었던 열기를 풀어 서서히 체온을 덥히고 있었다.
‘피할 순 없겠어. 이번엔 시간의 환원이 어느 시기보다 더디구나. 그래, 나쁘진 않아. 근 천년의 고통스러웠던 굴레였으니까. 절대 선의 탄생과 바꿀 수만 있다면.’
벅수로서의 최후를 다지는 그가 창밖의 백사실 계곡의 짙은 녹음과 담장 그늘 밑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는 사이, 도 민수를 비롯한 이들은 조용히 문을 닫고 있었다.
‘틱. 톡. 틱. 톡.’
24시간을 표시하는 벽시계 옆, 또다시 숫자와 색깔이 깜빡이다 바뀌었다.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