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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 기 홍 Oct 16. 2024

벅수 10화 코앞에서 웃는 자가 원수였다.


10. 코앞에서 웃는 자가 원수였다.     

   뙤약볕이 내리쬐기 전, 이른 아침의 장례식은 거대한 그늘막 아래 의자를 가득 메운 사회 각계각층의 유력인사들과 고위 공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고 있었다. 

흰 국화로 장식한 근조 화환 또한 주차장 입구까지 줄지어 빼곡한 가운데, 그것들의 맨 앞 별도의 공간에는 대통령의 이름을 단 리본이 펄럭이고 있었다.

“잠깐의 시간도 귀한 내빈들께서 일찍부터 조문해 주신 것에 유족을 대표해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고인이신 함 재익 회장은 함스 그룹 총수이자, 저, 함 사익의 유일한 형제이기도 합니다. 그룹 총수로서의 고인은 국가와 사회를 위해….”

구슬픈 진혼곡이 잔잔한 단상의 마이크 앞에서 검은 예복의 그가 비통한 표정으로 함 재익을 추모하고 있었다. 그의 추모사는 재익의 국가 경쟁력과 사회 헌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방점에 둔 삶을 조명했다. 그러나 장내의 숙연한 분위기는 함 사익의 추모사가 끝나는 20여 분간 유지되었다가, 차츰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원인은 더위였다. 추모객들의 격식을 갖춘 복장은 그늘막이 가둔 열기를 감당하기엔 한계가 따랐다. 

그들은 삼삼오오 단상에 올라 유족을 위로하고 마지막을 함 사익과 인사를 나눴다. 고인의 어린 아들과 젊은 아내를 위한 위로는 형식적이라 치부할 만큼 간단했다. 그들의 진짜 관심은 차기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함 사익을 위시로 형수와 조카. 그리고 그룹 임원들이 늘어서 추모객들과 인사를 나누는 자리엔 평창동 늙은이와 재익의 친모는 없었다. 그들은 자식을 앞세운 부모라 한탄하며 집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끝없을 것 같던 추모객들과의 인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어 갈 무렵, 청와대 손님을 배웅하려 그늘막을 벗어났던 공 만호가 잰걸음으로 함 사익 옆으로 다가섰다.

“찾았답니다.”

“뭘요?”

그는 귓가에 손을 가려 속삭이는 공 만호를 곁눈질했다.

“장인옥, 차 말입니다.”

“어려운 걸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간 찾아뵙겠습니다.”

함 사익은 손을 꼭 쥐었다 푼 초로의 중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미소 지었다.

“그럽시다, 식사 한번 하지요. 그럼!”

공 만호는 중년 남자를 금방 알아챘다. 대한민국 재계 서열 2위의 그룹 회장이었다.

“공 이사님, 저쪽으로.”

함 사익은 얼마 남지 않은 추모객을 훑어본 뒤, 영양가 있는 위인이 없다는 판단인지, 단상 한쪽으로 공 만호를 데려갔다.

“어디랍니까?”

그는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흰 장갑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물었다.

“청계천과 을지로 사이, 철공소 골목이랍니다.”

“청계천 골목? 인천이 아니고, 서울? ”

“네, 가 봐야 알겠지만, 이상합니다. 우리 사무실과 얼마 떨어지지.”

“그럼, 애초부터 나를 노리고 근처로 왔다?”

“그러지 않고서는 달리.”

“흠…. 서울부터 속초까지 따라붙은 거다? 그럼, 아귀가 맞네. 쓰읍...! 그래, 그랬어. 그때 체육관에서 죽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복수할 기회를 엿본 거고.”

그는 막 뗏장을 입힌 함 재익의 봉분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가시지 않는 의문이 뗏장 주위 뻘건 흙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름 아닌, 장인옥의 무지막지한 괴력이었다. 함 사익은 그때의 기억에 몸서리를 쳤다. 우 상길이 제때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 역시 저 옆 다른 봉분에 묘비석을 세웠을 것이다.

‘놈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으흠! 흠!”

장인옥에 골똘하던 그를 헛기침으로 깨운 건 공 만호였다. 그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 형수와 조카가 온 것을 알린 것이다. 함 사익은 재빨리 표정을 바꾸고 그들을 배웅했다. 가족이란 울타리 속 타인인 그들의 어색함은 집안 내의 편견이 쌓은 무의식 속 앙금이었다.

“공 이사님! 샤워 좀 하게 근처 호텔 잡아주시고, 경호팀 전원을 그곳에 집결시키세요. 끝장을 봐야겠습니다.”

그 순간 함 사익의 눈빛은 살기로 번뜩였다. 제아무리 괴물이 되었다고 한들, 자기를 건드린 이상 또 한 번의 죽음을 완전하게 당해야 한다는 광기였다.

“갑시다!”     

   경기도 광주의 선산을 떠난 함 사익은 판교 부근의 4성급 호텔에서 짧은 휴식을 가진 후, 상복을 벗어버렸다. 그는 방을 나서기 전, 전신거울 속 자기 모습에 입꼬리를 올렸다. 손에든 글록 19 콤팩트 권총이 주는 안정감이었다. 함 사익은 권총을 겨눈 거울을 한참을 주시한 뒤, 안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도 두 번째는 이쯤의 예의는 갖춰야겠지. 후후!’

감청색 양복 상의를 빳빳하게 당겨 주름을 편 그가 경쾌하게 호텔 방문을 나서자, 복도 끝 의자에 앉은 공 만호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우 상길이 그 옆에 섰다.

“경호팀은?”

“좀 전에 도착해서 주변을 수색 중입니다.”

호텔 현관에 대기했던 차민주가 건넨 냉커피가 공 만호에서 함 사익에 전달되고, 잠시 걸음을 멈춘 그가 한 모금을 넘기며 주위를 둘러봤다. 습기라곤 없는 건조한 공기가 뜨거운 햇살에 달궈져 아지랑이 열기로 아른거렸다.

“크! 미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날씨야. 크크.”

그때, 공 만호에게 받은 선글라스를 걸치는 그의 팔목에서 커프스가 반짝였다. 

“쿠 궁!”

소매 끝 그것이 눈에 띈 순간, 심장이 멎는 충격으로 휘청거린 상길은 반사적으로 목걸이의 펜던트를 만졌다. 아버지를 죽인 자가 남긴 유일한 단서였다. 일시에 멈춰버린 세상은 정지 버튼이 눌린 아득함으로 온몸의 땀구멍마다 얼음 가시가 돋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뜻 모를 미소의 함 사익과 그에 동조하는 공 만호. 당황한 표정의 차민주. 눈알이 터질 것 같은 분노로 진탕한 맥박은 상의 속 칼자루를 쥐려는 그의 손을 심하게 떨게 했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야! 아버지의 원수잖아. 상길아! 상길아!’

올무에 걸린 짐승처럼 심장의 외침이 처절하게 메아리쳤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의 손은 상의 안주머니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우 부장! 뭐해? 안가?”

의아한 표정의 공 만호가 눈앞으로 손을 흔들 때는 함 사익의 다리가 마이바흐 뒷문에 딸려 들어갈 때였다.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운전석 뒷문으로 돌아가는 공 만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정지됐던 현실이 움직임이자, 울렁증은 구토를 일으켰고, 진정되지 않는 울분은 고스란히 그의 낯빛에 뻘건 화상이 되어 자국을 남겼다.

“우 부장님, 어디 아파요?”

천연덕스럽게 염려를 보인 사익이 공 만호가 준 휴대폰으로 이내 눈길을 돌렸다. 

화면엔 추적한 차가 주차된 골목길 영상과 경호팀이 보낸 단문이 나열돼 있었다.

“더윌 먹었나? 어째 대답이 없어?”

질문에 묵묵부답인 우 상길의 뒤통수를 쏘아보는 함 사익의 미간이 가늘게 좁혀졌다.

“우 부장! 실장님이 묻잖아!”

분당 수서간 도로를 주행 중인 마이바흐 안에서 때아닌 냉각기류가 흐르자, 우 상길의 급변한 표정이 마음에 걸린 차민주는 호텔을 출발하기 직전부터 운전하는 내내 수시로 힐끗거리며 막연한 불안을 어쩌지 못하는 중이었다.

“후!”

안전띠도 착용하지 않은 그의 가슴이 와이셔츠를 팽팽하게 당겨 가늘게 자른 숨을 내쉬며 불안정했다.

“뭐지? 샤워하고, 옷도 갈아입었는데. 왜? 상쾌하지 못한 거야?”

급기야 공 만호의 무릎에 휴대폰을 던진 그가 해드레스트를 잡고 우 상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우. 상. 길 부장님.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알잖아요? 내가 사실상 그룹 총수가 된 날이라고, 총수, 그룹 총수! 더구나 지금 장인옥, 그 괴물 새끼도 완전히 보내려고 가는데, 그럼 축복받은 날이잖아? 그런데 뭐 하자는 거죠?”

나름 최대한의 괘씸한 감정을 억누른 듯했지만, 상길의 귓등에 닿는 불규칙한 입김은 그의 심리 상태를 그대로 전달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숨이 가쁘고 현기증이 나서 그만.”

뒤돌아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상길의 이마엔 땀이 흐르고 있었다. 확실히 어딘가 편치 않아 보였다. 

“그랬던 거야? 많이 안 좋은가?”

일순 팽팽했던 분위기에 긴장했던 공 만호가 그제야 시트에 등을 붙이는 함 사익을 어색하게 거들었다.

“지금 병원은 좀 그렇고…”

재차 함 사익을 힐끗거린 공 만호가 뒷좌석 냉장고의 생수를 꺼내 앞자리로 건넸다.

“자, 여기. 우선 이것 좀 마시라고.”

의미 모를 실웃음만 짓는 함 사익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두고 아무말이 없었다. 

공 만호는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면서 잠시 전, 우 상길의 뒤통수에 보였던 함 사익의 표정을 떠올렸다. 광대뼈의 얇은 살이 입꼬리에 말리고 미간 주름을 따라 눈자위가 가늘게 떨리는 모습은 그가 극심한 심경 변화가 일 때 나타나는 전조였다. 지금까지 그 조짐이 있고 난 뒤에는 어김없이 예측 불허의 행동이 잔혹했었다. 특히 성인이 된 후부턴 거의 예외가 없었다. 그런 불길한 징조가 뜻하지 않게 우 상길을 향하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두 차례나 목숨을 구해줬기에, 누구보다 신뢰해야 할 그인데. 도무지 가늠되지 않는 불안한 기분은 그의 손바닥에서 끈적한 땀으로 분비돼 수건에 스며들고 있었다.     

   남산 2호 터널을 빠져나온 마이바흐는 차량 흐름대로 동국대학교 가파른 고개를 올라 충무로역으로 바퀴를 틀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대화가 끊긴 그들 사이엔 묘한 기류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간 수시로 울리던 공 만호의 휴대폰 진동은 그의 지시로 조용해졌고, 마이바흐는 예정된 장소를 향해 가고 있었다. 

“차 팀장! 저기, 저 사람 아냐?”

“맞습니다.”

멀리 골목길 입구에서 손을 흔드는 경호 팀원을 발견한 차민주가 서서히 차를 진입시켰다. 시동이 꺼지기 전, 함 사익과 우 상길이 동시에 연 앞 뒷문으로 훅하고 뜨거운 열기가 차 안에 들이닥쳤다. 그들이 내린 곳은 세운 상가를 끼고 들어온 을지로와 청계천 사이, 어느 지점이었다. 빈틈없이 다닥다닥 붙은 협소한 업장이 대부분인 이곳은 일명, 철 가공 골목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증명이라도 하듯, 주변 여기저기에는 가공 처리 전의 철재가 낡은 포장을 뒤집어쓰거나, 녹이 슨 파이프를 기대고 쌓여 있었다.

“어딥니까?”

한여름 된더위에 긴 팔 와이셔츠를 갖춰 입은 함 사익이 선글라스를 콧등으로 밀어 올릴 때, 명품 마크가 햇살에 반짝이며 영롱한 무지개를 뿌렸다. 그러자 우 상길은 도드라진 커프스로 또 한 번 동공이 흔들렸다. 그 찰나는 내내 신경을 곤두세웠던 차민주에게 결국 포착되었다. 그는 상길의 옆으로 다가섰다.

“부장님. 괜찮습니까?”

안 주머니에서 꺼낸 선글라스를 든 우 상길이 고개를 끄덕이자, 차민주가 굳은 표정으로 한 발짝 비켜섰다. 

“몇 명이죠?”

“새로 합류한 경호팀 전원이니까, 우 부장까지 스물한 명입니다.”

“그 차가 확실해요?”

“네, 정확하다는 보고입니다. 건물 옥상에서 차를 감시하는 두 명과, 골목 입구에 나머지를 분산 배치했습니다. 복장은 평범하게, 아무래도 정복은 눈에 띄기 쉬워서.”

공 만호는 유독 규율과 격식에 강박증이 있는 그에게 팀원들의 복장을 에두른 뒤, 앞선 팀원이 가리킨 계단으로 올라갔다. 라면과 제육볶음이란 삐뚠 글씨로 쓴 종이가 붙은 허름한 가게가 1층이었다. 문가 옆으로 음료 공급사의 수직형 냉장고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있었다. 함 사익은 계단을 오르기 전, 슬쩍 내부를 들여다봤다. 비둘기색 작업복 차림의 젊은 남자와 러닝셔츠의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 남자가 라면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흰 러닝셔츠의 꾀죄죄한 기름때는 검은 선글라스 안에서도 더럽고 지저분했다.

‘쯧! 쯧! 싸구려 인생들. 그 꼴에 라면이 참 즐겁기도 하겠다.’     

   “저 찹니다.”

불그스름한 녹슨 철근 뼈대가 드러난 무릎 높이의 시멘트 난간은 군데군데 이미 본연의 기능을 다해 부식돼 있었다. 잠시 숨을 몰아쉰 공 만호가 한 발짝 옥상 끄트머리로 가더니 낡은 슬레이트 지붕 너머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검은색 밴 승합차였다.

“공장들이 워낙 오밀조밀해 미로 같은 지역이라 나타나기 전까진….”

“딱 봐도 그렇긴 합니다. 이 건물은 확인했겠죠? 등잔 밑이 어둡다고.” 

“2층 3층은 비었습니다. 1층 가게는 건물주니까 의심할 필욘 없고, 돈을 좀 쥐여주고 드나드는데 문제없게 조처했습니다.”

“저기가 큰길인가요?”

“청계천입니다. 3가와 4가 중간 정도? 더 올라가면 배오개다리니까. 우리 건물과 가깝습니다.”

“우 부장님 생각은 어때요? 장인옥이 언제쯤 나타날 것 같아요?”

선글라스를 벗고 그늘로 한 걸음 물러선 함 사익이 같은 방향을 주시한 우 상길의 생각을 물었다. 순간, 공 만호의 조바심이 도졌다. 질문을 무시한 차 안의 상황이 재현되지 않길 바라는 표정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아닌 이상, 낮보다는 밤이 유력할 것 같습니다. 어느 때든 흉측한 얼굴이나 눈동자가 이목을 끌 테니, 선글라스는 필수적일 겁니다. 또 하나는 장인옥이 아닌 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속초에서 그가 타고 채 문이 닫히기도 전에 차가 출발했습니다. 시동을 건 상태에서 기다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별장 인근의 CCTV에 촬영된 영상을 공 만호가 누군가에 넘기기 전에 봤던 것을 기억했다.

“흠. 누가 또 있다는 거지? 하긴.”

“우 부장 말이 합리적이긴 합니다. 만약 우 부장 말대로 밤에도 선글라스를 낀다면, 의외로 수월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저 많은 인간을 어떻게 다. 그게 확률이 높겠어. 그래. 도마뱀 눈깔로 활보할 순 없겠지. 누가 봐도 기절초풍할 테니까.”

흡족했는지, 우 상길에 눈을 찡긋한 그가 금이 간 계단 턱을 구두 뒤꿈치로 으깨며 중얼거렸다.

“썩은 몸뚱이 냄새 잘 감춰라. 딱, 그만큼만 더 사는 거니까.”

앙다문 턱관절이 긴장됐던 함 사익은, 기어코 한쪽 계단을 부수어 놓았다.

“우 부장님! 우린 먼저 사무실로 갈 테니 작전 한 번 짜 봐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쳐들어갈지, 끌어낼지. 전문가의 실전이니만큼 기대해 보겠습니다? 하하!”

그는 내려가다 말고 계단참에서 멈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차 팀장도 남아서 우 부장을 돕는 게 좋겠어. 공 이사님. 키 받아 오세요.”

그는 환한 미소를 보이곤, 남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딛는 구둣발 소리가 경쾌한 층간에 경쾌한 휘파람이 더해졌다. 무엇일까? 그의 기분이 좋아진 이유가.

애매한 느낌은 그를 따르는 공 만호뿐만 아니었다. 옥상 입구에서 여운을 듣는 차민주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

“팀장님. 왜, 갑자기 실장이 업 된 거죠? 딱히 바뀐 게 없는데?”

“...”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까 호텔에서부터. 내가 잘 못 봤다고는 하지 마시고.”

“...민주야. 찾은 것 같다.”

“...?”

“전에 그랬지? 왜 저런 사람을 경호하느냐고. 내가 이유가 있으니, 묻지 말아 달라고 했었고. 오늘 확인했다, 분명하게.”

그의 눈동자는 함 사익이 내려간 계단에 고정돼 이글거렸다. 당장이라도 쫓아가 그를 요절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는 자신에 자괴감을 겪고 있었다. 호텔에서 그랬어야 했다. 울분이 목까지 차올라 앞뒤 가릴 것 없는 그때 칼을 꽂아야 했었다. 그게 아니라면 여기여야 했는데, 이번에도 그러질 못했다. 사실 그는 낯선 감정 변화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구분할 수 없지만, 확실히 함 사익을 향한 일방적인 분노의 감정과는 결이 달랐다. 뭐랄까? 낙수 위치를 종잡을 수 없는 동굴처럼 분명치 않은 감정이 심장의 박동수를 늦춰 복수를 거부하는 미묘한 기분이었다.

‘별장에서 장인옥에게 죽을뻔했을 때. 온몸에서 이상한 기운이 그 사람을 생각게 하고 갑자기 괴력이 생겼었어.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지금, 이 낯선 느낌까지.’

상길은 함 사익의 차가 주차된 골목길을 내려봤다. 좁은 골목길과 보자기 조각보 지붕들 탓인지 그와 공 만호의 모습까진 보이지 않았다.

“민주야, 함 사익 실장이다. 아버지를 죽인 자가.”

“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함 실장이 아버지를? 저, 정말입니까? 확실합니까?”

크게 당황해 혀가 엉킨 차민주가 햇살에 번질대는 턱을 디밀자, 우 상길은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어 목걸이를 꺼냈다.

“사고 당시 아버지를 죽인 자의 커프스단추다. 지금껏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증거물.”

목걸이 펜던트인 단추는 금 재질의 미려한 곡선으로 영문 이니셜 H가 새겨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보여주며 범인을 찾았다니? 차민주는 순간, 함 사익의 소맷부리를 기억했지만 볼 수 없었다. 하지만 H는?

“민주야! 지금 쫓고 있는 장인옥. 그때 함 실장이 술병을 처박아 질식시킨 거 기억하지? 아버지를 죽인 수법과 똑같았다. 이게 그자가 현장에 떨어뜨린 거고.” 

“그걸 아까 호텔에서 본 거군요?”

“이제부턴 너와 팀원들은 빠져라. 이제부턴 경호가 아니다.”

“팀장님! 상대는 구멍가게 사장이 아니라, 곧 그룹 총수가 될 잡니다. 감당되겠습니까? 만일 실패라도 하는 날엔….”

불과 몇 개월이었지만, 차민주는 함 사익의 잔혹성을 차고 넘치게 봐 왔다. 

그동안 우 상길의 팀원들은 편의점의 대마와 마약 판매 이익 분배를 놓고 잡음을 낸 지방의 군소 조직 세 곳을 붕괴시켰다. 부산과 목포, 그리고 세종시. 그때마다 함 사익은 조직의 우두머리 신체 부위 중 한두 곳을 끊거나 뭉개버려, 불구로 만드는 중에도 천진한 웃음을 빠뜨리지 않았었다. 또한 지금의 경호팀 대부분은 그때 밀어버린 조직원을 엄선해 포섭한 자들이었다. 포섭은 곧 돈이었다. 그야말로 돈이 목줄이 된 맹목적인 충견들이었다.

“그룹 총수든, 대통령이든. 내가 경호를 맡는 이상, 함 실장은 내 손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감당? 이게 나중을 걱정할 일인가?”

“정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하지만 빠질 수 없습니다. 팀원들에겐 제가 말은 하겠습니다만, 아마 저와 같을 겁니다. 말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 전에 언질이라도 주십시오. 돈에 팔려 온 개들이 언제 팀장님을 물어뜯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차민주의 의심은 확고하게 와 닿았다. 우려되는 것이다. 눈치 백 단의 함 사익이 행여 기습적인 선수를 친다면, 우 상길 역시 그들의 손바닥 안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차민주가 말한 개들 역시 경호팀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우 상길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형제적 동질감은 더 이상 강하게 밀쳐 내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자신도 같은 입장이라면 오히려 화가 났을 테니까. 그러나 또 하나의 문제는 음울한 심장이 여전히 그 기운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체 무엇 때문인 걸까? 의식하지 못한 한숨을 옅게 내쉰 그가 옥상 끄트머리에서 문제의 차를 바라봤다. 불볕더위에 익어버린 것일까? 검은 지붕 표면이 부식된 듯, 하얀 볕으로 얼룩져 보였다. 그때였다, 차 앞 유리를 반사한 강한 빛이 그의 망막에 검은 점이 되었다 물러지며, 사람의 형체가 되었다. 이윽고 나타난 두 개의 실루엣. 기울려 쓴 모자 어깨 위 머리카락 사이로 하얗게 박힌 눈동자였다. 대담하게도 선글라스는 착용하지 않았다.     

   청계천 도로를 나와 크게 을지로 방향으로 돌아가는 마이바흐는 운전대에 순응하며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정체의 원인은 요즘 들어 부쩍 잦아진 서울광장의 시위 여파로 인한 것이었지만, 불편한 기색의 공 만호는 다른 이유였다. 그는 옥상에 우 상길과 차민주를 남기고 계단을 내려온 직후부터 바뀐, 함 사익의 경직된 표정과 언뜻언뜻 보이던 눈빛이 영 꺼림직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하! 중역실에, 차도 주고, 최고급 오피스텔도 줬는데, 건방지게 말을 씹고 고따위로 꼬나 봐?”

함 사익이 갑자기 발광한 미치광이처럼 클랙슨을 내리치고 운전대를 잡아 흔들었다. 

“씨발! 씨발! 야, 이 같잖은 새꺄! 감히, 네까짓 게 나한테 인상을 써?”

연이은 분풀이로 울린 경적이 일순, 행인들의 이목을 끌면서 몇몇 손가락질을 더한 따가운 시선으로 돌아오자, 난감해진 공 만호가 급히 말리고 들었다.

“그래도 목숨을 구했는데, 그렇게까지.”

“삼촌! 삼촌?”

당연히 바깥 사정은 안중에 없이 목이 찢어지라 고함을 친 그는 붉으락푸르락하며 공 만호의 옹호에 제동을 걸었다. 

“내가 모욕감을 느꼈다는 게 더 화가 난단 말입니다! 날 구했다고? 당연하지! 받는 돈이 얼만데? 그게 아니면 그따위 놈에게 뭘 바랄 게 있다고? 얻다 대고 눈깔을.”

“아니, 그게. 언제 그런 눈을 했다고, 난 본 적이.”

“호텔에서. 출발할 때부터 백미러로 날 죽일 듯 째려보고 있었다고! 현기증? 누굴 속이려고.”

“우 부장이 왜?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좆도! 개새끼가 언제 미칠지 어떻게 알아요? 주인을 물려고 할 때 아는 건데. 내가 물리고 나서 알 만큼 멍청합니까?”

“빵! 빠방!”

희번덕거리든 함 사익의 눈이 싸늘하게 후사경으로 향했다. 뒤에서 울린 경적은 바뀐 신호에도 꿈적하지 않는 그에게 앞차를 따르라는 당연한 재촉이었다. 그러나 참지 못하고 뛰쳐나간 그는 벼락에 놀란 망아지처럼 뒤차의 문짝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그리고 수표를 꺼내 열린 창문으로 팽개치고 돌아와 굉음을 내며 종로 쪽으로 내달렸다. 공 만호는 그의 급작스러운 행동이 경적과 우 상길이 연계된 도전으로 인식된 것을 알았다. 

“공 이사님, 부천 패거리 좀 보자고 해요. 내일 당장!”

“부천…? 연길 거지들을 말하는 겁니까?”

“거지인지, 노숙잔진 모르겠고, 재작년에 편의점 떡고물을 서로 먹겠다고 도끼 들고 난리 죽인 놈들 있잖아요?”

기억이 또렷했다. 함 사익은 재작년이랬지만, 작년 2월경. 부천의 편의점 한 곳을 툭하면 수수료 협상을 요구하는 인천을 대신해, 경기 서북부 거점으로 고려할 때였다. 그 지역은 조선족 출신의 두 개 파가 이권 다툼으로 지저분했었다. 공 만호는 함 사익과의 만남을 주선해 구역 분리를 시도했었는데, 그들은 무리하게도 편의점 직영을 요구했다가 콧방귀를 맞자, 결판을 내겠다며 저들끼리 칼과 도끼로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었다. 지금이라면 우 상길이 있어 두고 봤을 함 사익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엔 그런 독종들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차후 재논의가 현재에 이르렀다.

“그 말은 경호팀을….”

“우 부장이 먼저인 자들을 뭘 믿고? 나머지 팀원들과 부천 애들이면 충분해. 장인옥을 치고 나면 바로 정리해야겠어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떤 정황도 아니고 느낌만으로 우 부장을 내치면 안 되지? 사익아, 잘 생각해. 그냥 경호원이 아냐. 실제로 목숨을 내놓는 부하란 말야.”

“거참! 뻑하면 목숨, 목숨. 그랬죠! 고마웠죠. 죠.죠.죠! 하지만 그 눈빛을 본 이상 과겁니다. 내친다? 천만에요. 감히 그렇게 봤으니까 이빨, 발톱. 싸그리 뽑아서 제깟 놈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알려 줘야겠단 말입니다!”

그의 격앙된 상태가 어느 정도 진정을 보인 것은 청계천 일방통행 도로를 지날 때쯤이었다. 건너편의 H를 형상화한 유리 건물 상단에 HAM’S 그룹이란 금속이 찬란한 본사는 석양의 붉은 해가 유독 15층 한쪽 그의 사무실 라인 창문에 박혀 타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번진 빛살 촉이 23층 창문 어딘가에서 번쩍이는 것에 슬며시 웃었다. 오늘 아침 성대하게 장례를 치른 함 재익의 방. 그룹 총수의 집무실이었다.

‘그래! 이런 극적인 자리바꿈은 미처 예상치 못했지만, 새로운 광합성이 시작된 거야. 그것도 뿌리째, 늙은이. 평창동에나 처박혀 있으슈. 명 재촉하지 말고. 크크.’ 

그는 감당하기 벅찬 낯선 기분에 히죽였다. 일탈과 반항으로 점철됐던 인생이 의도치 않은 재벌 총수라는 정점으로 연결된 것이었다. 거의 무한정인 재력과 지위는 시민과 한정 계약된 권력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두 개의 힘 중, 권력은 재력 앞에 한순간 뻣뻣할지라도 종국엔 지팡이를 자처하게 됨을 함 사익은 잘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밤새 안녕하십니까? 로 언제든 전락할 수 있는 어설픈 존재가 권력이었다. 그의 왜곡된 인성이 가장 만족한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그룹 운영은 어차피 시스템이었기에, 자신은 총수라는 막강한 이점을 활용해 마약과 대마초로 무채색 영혼들을 길들여 군림하고 싶은 어긋난 욕망뿐이었다. 신분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복종케 하는 절대자. 피폐한 영혼들의 굴종을 즐길 지배자가 되길 원했다.

“삼촌도 장인옥을 보내면 리테일을 맡아야지? 공 만호 사장 한번 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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