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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 기 홍 Oct 16. 2024

벅수 13화 그의 재생은 미끼였다.

13. 그의 재생은 미끼였다.     

   승합차를 포함한 다섯 대의 차량이 달팽이 곡선 진입로를 내려와 지하 4층을 기점으로 갈라졌다. 홀로 다음 층 곡선에 진입한 승합차는 이전 두 개 층 깊이의 긴 나선을 더 내려온 뒤, 활주로와 같은 자동 센서 등의 안내에 따라 구석진 엘리베이터 부스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려 어둡고 텅 빈 주차장 전체를 둘러본 차 민주가 차 문을 두드렸다.

“드르륵!”

팀원 두 명에게 끌려 나온 이는 광장시장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남자였다. 그는 절뚝이는 걸음으로 그들이 이끈 벽 앞에 섰다. 그곳은 비상 소화전 박스 앞이었다. 차민주는 승합차를 한 번 쳐다보곤 박스를 열어 귀퉁이 삐죽한 손잡이를 힘 있게 당겼다. 그러자 막혔던 블록 벽이 얌전한 기계음을 내며 한쪽으로 밀려갔다.

“기이잉!”

유난히 폭이 좁은 기둥과 기둥 사이가 완전히 열리길 기다린 팀원들이 결박한 남자 끌고 안으로 들어가자, 뒤따른 차민주가 벽 안의 버튼을 눌러 모습을 감췄다. 

   “어디 봅시다! 쓰읍! 치료를 받았나 보네? 내가 결정도 안 했는데?”

속옷 한 장의 남자가 의자에 묶여있는 곳은, 매끄러운 흰색 강화 플라스틱 바닥을 한 단 높인 중앙과 사방이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커다란 밀실이었다. 얼핏, 한 줌의 먼지도 허락지 않는 청정실 같은? 유일하게 흰색이 아닌 것은 직선과 곡선으로 공간을 구분 짓는 붉은 빛 램프 선이었다. 함 사익은 유난히 LED 핀 조명으로 밝은 그의 가슴과 허벅지에 감긴 붕대가 기가 막힌 듯 공 만호를 꼬나 봤다.

“여긴, 어찌 보면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연옥일 수 있는데, 본래의 모습으로 판결받아야지, 인정이 그렇게 많아요? 그건 사람한테나 베푸는 게 아닌가?”

끝내 탐탁지 않은 그가 준비된 의자를 지나쳐 대기하는 팀원에게 턱 끝을 치켰다.

“네?”

“주세요! 주머니에 있는 그거.”

머뭇대는 팀원이 우 상길과 공 만호를 쳐다보자, 이내 함 사익이 픽 웃었다.

“눈치가 번지수를 못 찼네? 크크”

그는 반쯤 꺼낸 칼을 낚아채 팀원 면상에 흔들어 보이고,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섰다.

“일단은 조금 아파 보자, 사는 게 원래 고통이라잖아.”

그는 싸늘한 미소를 비춘 동시에 묶인 남자의 손목을 찍었다.

“끄으윽!”

남자는 반사적으로 온몸을 비틀어 대항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단단히 결박된 매듭은 되레 손목을 파고들었다. 함 사익은 그런 표정을 즐기는 듯, 한 번 더 좌우로 비튼 칼을 빼지 않고 놔둔 채 의자에 앉았다.

“인샬라!”

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기분을 가볍게 외치고는 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 

‘반짝!’ 소매 깃에서 빛나는 커프스단추. 

“넌, 세상과 마약 중, 어느 것이 더 미친 것 같냐?”

킬킬대며 묻는 함 사익은 손목에 꽂힌 칼에 고통스러워하는 남자의 흉측한 눈을 비웃듯 쳐다봤다.

“왜? 모르겠어? 장인옥 그 양아치 새끼가 날 죽일 수 있다고 믿는 자체가 세상이 미친 거야, 뽕쟁이들은 감히 그런 생각을 못하거든?”

함 사익은 잠깐 흥분에 뒤집힌 흰자위를 번득하더니, 탁자 위 술잔을 비우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잠시를 보낸 뒤 공 만호를 찾았다.

“쟤, 말 못 해요? 아까부터 끅끅! 끅끅! 장인옥은 말했잖아?”

그리고 홱! 고개를 돌려 우 상길의 대답을 바랐다.

“듣지는 못했습니다.”

찢긴 귀를 지혈 붕대로 응급 처치한 그가 남자를 쏘아보며 짤막하게 말했다.

“그러면 확인해 봐야겠네? 어떻게? 팔다리를 잘라? 아니면 이걸로?”

그는 안 주머니에서 작은 알루미늄 케이스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인샬라였다.

“잘 들어! 대답하면 천국, 계속 끅끅대기만 하면 바로 지옥이다? 나라면 절대 안 그래. 왜냐면 여긴, 천국으로 가는 계단 앞이거든?”

그는 두 손가락으로 알약을 집어 남자의 눈앞에서 돌렸다. 그랬다. 지하 4층부터 유난히 길었던 진입로는, 외부와 차단된 3개 층의 비밀 공간으로 그가 심혈을 기울이는 신종 마약, -인샬라- 생산 시설이 있는 곳이었다.

“장인옥! ... 어딨어?” 

인샬라를 거둔 함 사익은 손도끼를 든 다른 팀원을 남자 앞에 세웠다.

“한 번만 더 묻겠다, 어차피 장인옥은 걸리게 돼 있어. 단지, 하루라도 더 빨리 찢어 죽이고 싶어서 그래. 그 하루 덕에 기회를 잡은 넌 운이 좋은 거고, 어딨어? 장인옥!”

장인옥을 묻는 말끝은, 메말라 서걱거려 건조했다. 통한 것일까? 피에 젖은 남자의 세로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동시에 함 사익의 눈초리는 그의 조리개 망막을 당장이라도 뜯어낼 것처럼 사납게 살기를 세웠다.     

   백사실 계곡. 

짙다 못해 문드러진 막바지 여름 더위가 계곡에, 숲속에 더께로 눌어붙은 오후. 

도 민수는 꺾인 엑스자 가는 다리를 벌린 수면의 소금쟁이가, 제 밑을 유영하는 개구리의 물그림자에도 미동 없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찰나의 생과 사가 교차하는 순간이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형님! 괜찮겠죠?”

화강석 계단을 서성이던 장춘호가 내내 침울한 그에게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우리가 어찌 알겠냐, 괜찮다고 믿는 수밖에.”

“아니, 그게. 형님도 그렇잖아요? 꺼림칙하니까. 아녜요?”

“...”

포로록! 새들이 날아 지나친, 잎사귀가 물 그늘에 투영된 연못의 허공 어딘가에 당신목과 가디언. 그리고 김준석이 있는 다른 차원의 공간이 있었다. 

그곳은 소멸까지 남은 1분 15초를 지키려는 절박함에 인간의 감정과 단절한 김준석의 은신처이면서, 희망과 절망, 선도 악도 닿지 않는 벅수의 시간이 정지한 곳이었다. 장춘호는 부동길과 그들을 추적한 결과를 도 민수에게 알린 시기와 겹친 김준석의 부름에 부암동 계곡으로 오게 된 것이다.

“하루면 충분하니까, 우선 우리가 확인하고 그다음에 나오셔도 되잖아요? 이번은 너무 불안하거든.”

“하루….”

도 민수는 바람결에 수면을 뱅뱅 도는 낡은 잎새에 멀거니 초점을 두었다. 9월5일 목요일, 진짜 마지막까지 왔다. 어쩌면 캐이런은 의식을 이미 시작했을지 모른다. 

그나마 가디언의 감응력이 장인옥이 아닌, 캐이런의 기운을 반경 100m로 좁혔다는 것이 위로였지만, 반면 현장을 찾더라도 캐이런의 차원 공간을 정확히 감지할 수 있는 이는 김준석이 유일했기에, 소멸을 각오한 그가 나서게 된 것이었다,      

   “형님! 저기?”

그때였다. 잔잔한 수면 위로 감도는 때아닌 안개에 눈이 휘둥그레진 장춘호가 한 발짝 다가섰다. 연못은 곧바로 타원형의 광채에 휩싸여 갈라진 허공의 틈에서 뻗친 긴 가지들이 길섶까지 닿았다. 이어 푸른 잎사귀가 살랑거리는 터널이 생겨 강한 백색 빛을 등진 형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해가 진 직후, 석양의 노을빛이 아직 산등성이를 물들인 늦은 오후의 광경은 형언을 금한 환상의 극치였다. 장춘호는 넋이 나갔다. 당신목의 신비로운 공간을 직접 볼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었기에 더욱 그랬다.

“선생님!”

“잠깐! 기다리자.”

김준석은 그를 맞는 도 민수를 제지하고 당신목을 돌아봤다. 아직 닫히지 않은 공간, 영문을 알지 못한 민수와 춘호는 또 하나의 희미한 형체가 세상과 공간의 경계에 설 때, 짧은 숨을 몰아쉬었다. 가디언인 오주희였다. 심플한 레이스의 흰 블라우스와 인디고 청바지, 도 민수가 –드므-로 안내할 때의 복장 그대로인 그녀는 걸어 나온 김준석과 달리, 빛의 입자에 실려 당신목 터널을 부양해 왔다. 서서히 내리는 눈꽃처럼 영영 –드므-를 벗어 나지 못할 운명인 줄만 알았던 그녀의 출현은 벅찬 감동이었다. 그 순간, 도 민수는 지난 어느 지난날이 떠 올랐다. 한 뼘의 갈색 종이에 썼던 짧은 단어. 무디게 서걱이는 연필심이 한 문장을 맺지 못하고 남긴 여백이 은은한 쓰라림이 되었던 그 밤을. 

“가자!”

앞서 나선 김준석의 곁으로 장춘호가 따르면서 자연스레 가디언과 함께 걷는 도 민수의 눈길은 그녀 목에서 흔들리는 –드므-에 두게 되었다. 드므가 작은 펜던트로 축소돼 있다니 어찌 된 것일까? 거대했던 드므가 그녀의 목에 걸린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보이고 걸음을 재촉하는 오주희의 등에는 어느덧 삭아 녹은 석양 대신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황폐한 청계천 뒷골목의 공가는 비좁은 길을 따라 벌집처럼 꼬여있었다. 왠지 쓸쓸함이 있는 간판과 찌그러진 셔터들. 인적이 완전히 끊긴 스산함이라기보다는, 입에 문 얼음이 뿜는 서늘함이랄까? 함 사익은 팔을 벌리면 닿을 좁은 골목에서 전방의 폐건물을 쏘아보고 있었다. 

“고맙게도 잘 골랐네, 분리배출이 필요 없겠어? 흐흐.”

글록 19의 노리쇠를 당긴 그가, 묵직한 느낌이 흡족했는지 웃음을 머금고 공 만호를 찾았다.

“연길 거지들은?”

“다섯 명은 건물 뒤, 나머진 여기 있습니다.”

“먹였죠?”

“네, 10분 전에.”

“오케이! 그럼, 시작하죠, 인-샬-라!”

함 사익이 플래시를 까딱이고 물러서자, 공 만호의 고갯짓을 신호로 팀원들의 짙은 그림자가 벽에 붙어 유령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지러운 플래시들의 목표는 벽과 지붕을 핥고 지나는 끝에 있었다. 드문드문 인색한 가로등이 겨우 버티는 골목에서 집결한 플래시 불빛들이 꺼지고 얼핏 수십 명의 거뭇거뭇한 실루엣들이 깨진 유리가 덜렁거리는 입구를 향해 포진했다.

“쓰읍! 2층이라고?”

함 사익이 중얼거렸다. 그의 뒤엔 우 상길과 팀원들이, 한쪽엔 새로 합류한 연길 거지 조직원 열 명 가까이 뭉쳐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초점이 엉켜 섬뜩한 정글도로 무장하고 있었다. 함 사익은 플래시를 비춰 약기운이 제대로 퍼졌다고 판단 되자, 두목 격인 남자의 목덜미를 당겨 조용히 속삭였다.

“잘합시다. 다음 계약과 보너스도 걸려있으니까. 크. 크.”

그는 잔뜩 웅크렸던 어깨를 힘주어 펴면서, 관자놀이에 핏줄이 설 만큼 입을 크게 벌렸다가 이빨을 딱딱거렸다. 

“우 부장과 연길 선수들은 장인옥을, 나머지는 퇴로를 차단하는 겁니다. 나한테 장인옥을 주세요, 그럼, 각자가 그놈 머리통 무게만큼 보너스를 챙길 수 있습니다.”

어느새 팀원들에게 알약을 나눠준 공 만호가 우려스럽게 그들을 보고 있었다. 

-인샬라- 명분은 장인옥과 맞설 때 공포를 극복하라는 의도라 했지만, 공 만호는 장인옥을 제거한 후를 겨냥한 목적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팀원들은 복용을 주저했다.

그러나 압박하는 이는 함 사익이었다.

“절대 망설이지 마라. 그자는 사람이 아닌 괴..물.”

마지막으로 건물 진입 전, 팀원들에 주의를 주던 우 상길이 갑자기 빨라진 심장 박동에 주변을 살폈다. 순간, 극도로 날이 선 세포의 촉수가 시선을 위로 끌어올렸다. 마주친 괴기한 안광은 건물 옥상에서 내려보고 있는 장인옥이었다. 우 상길은 찰나의 섬뜩한 눈에서 의아함을 느꼈다. 피할 기색 없이 오히려 그들을 기다린다는 야릇한 기분이었다.

“후다다닥!”

한껏 올린 기세로 정글도를 휘두르며 연길 거지들이 뛰어 들어간 것은 그때였다. 

그에 맞춰 뒤따르는 팀원들 역시, 저마다 회칼로 중무장한 것은 평소와 딴판이었다. 반면 겁먹은 표정으로 뒷걸음치는 공 만호에 킬킬거린 함 사익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우 상길의 등짝을 때렸다.

“뭐해?”

건물 입구에선 수십명의 구둣발 소리가 요란하게 계단을 타고 울리고 있었다.

“안 가요? 내 걱정은 말고. 이게 있잖아!”

그는 아서 왕의 엑스칼리버쯤으로 여기는 믿음의 글록 19를 치켜들고 씩 웃었다.

“연길 거지들? 어림없어요. 걔들은 그냥 오프닝이고, 파이널은 따로 있지? 이번만큼은 명령이 아닙니다. 내 앞에 장인옥을 꿇려 주세요.”     

   어두운 건물 안을 혼란스럽게 들쑤셨던 수십 개의 플래시 불빛이 일시에 한 방향을 겨냥해 멈췄다. 연길 거지들. 그들의 기세가 경계한 곳은 불투명 유리에 –남탕-이라고 쓴 문 앞이었다. 투영된 유리창에 춤추듯 펄럭이는 붉은빛이 뱀 혓바닥의 두려움이었고, -어서 오세요-란 평범한 인사말도 절묘하게 조합됐다.

“툭! 투둑! 탁! 탁!”

선명하지 못한 유리 너머의 상상을 자극하는 소리. 연길 거지들을 밀치고 다가선 우 상길은 직감적으로 나뭇결이 터지는 것임을 알았다. 그는 플래시로 짙어진 그들의 얼굴을 쓸어본 뒤, 그대로 문을 박찼다.

“쾅!-와장창!”

박살 난 유리 파편이 우 상길의 구둣발에 찌걱거리는 동시에, 정글도를 치켜든 연길 거지들이 밀어닥쳤다.

“죽여! 죽이라!”

“쉬익!”

“컥!”

순간, 앞다투어 들어간 탈의실에서 무언가 날라와 선두의 연길 거지를 고꾸라뜨리자, 급히 멈춘 이들의 플래시가 일시에 쓰러진 동료를 덮었다. 밝게 퍼진 불빛에 드러난 동료의 모습은, 부릅뜬 동공과 쩍 벌어진 입. 그리고 감싼 목에서 삐져나 온 쇠꼬챙이를 잡고 숨을 헐떡였다.

“이, 이. 이...”

창졸간의 기습에 혼비백산한 그들의 말문이 막힌 순간, 괴성으로 플래시 불빛을 가른 남자가 그들을 향해 덮쳐왔다.

“캬악!”

“퍽!-퍼벅!”

상대가 경악한 틈을 노린 남자의 돌진은 순식간에 두 명의 연길 거지를 내다 꽂았다. 그리고 자세를 바꾼 남자의 역습 아닌 역습은 플래시 빛 그늘에서 주시하던 우 상길을 목표로 설정했다.

“휘익!”

어느 틈에 죽은 자의 목에서 뽑은 쇠꼬챙이가 우 상길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갔다.

“스윽!”

“땡그랑!”

간발의 차이로 비껴간 쇠꼬챙이가 벽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지는 찰나, 연이어 날아든 남자의 주먹이 머리를 내리쳐오자, 팔을 낚아챈 우 상길이 탄력을 이용해 그대로 던져 버렸다.

“우지끈!-와장창!”

날아간 남자가 부순 것은 탈의실과 남탕을 분리한 허접한 또 하나의 문이었다.

“끄악!”

안면에 유리 조각이 박힌 남자가 비틀비틀 좌우로 휘청였다. 그러자 이때다 싶은 연길 거지들의 정글도가 득달같이 그의 가슴과 머리 위로 사정없이 떨어졌다.

“끅!-컥!-윽!”

희끗희끗 플래시 사이로 튀는 핏방울은 어두운 공간의 검은 풍뎅이처럼 날아다녔다. 말 그대로 난도질이었다. 공포와 두려움에 덧쓴 인샬라의 환각에 기인한 무자비한 광기였다. 그들의 플래시가 흔들릴 때마다 피 보라가 일었고, 어두운 타일 바닥엔 온기가 가실 새 없는 핏물이 흥건히 번져갔다.

“죽였다! 죽였어! 킥!-킥!”

하지만 피 보라에 상기되어 얼굴을 문지르는 연길 거지의 안도는 거기까지였다. 

플래시가 닿지 않은 어둠에서 뻗은 손아귀가 그의 목을 틀어쥐고 타일 바닥에 내리꽂은 것이다. -쩍!- 두 개 골이 깨지는 묵직한 파열음에 쩐 짧은 비명. 장내는 또다시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다.

“개 대가리 새끼가 또 있어? 내레 얼린 거이가?”

눈깔이 뒤집힌 연길 거지 두목이 우 상길을 꼬나 보며 한 명이라던 함 사익의 말에 속았다고 고함을 쳤지만, 어둠 속의 장인옥을 경계하는 그에겐 응석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섬찟한 미소로 우 상길을 주시하는 장인옥은 흔들리는 장작불과 연길 거지들의 플래시 불빛 속에서 지옥의 괴수로 연출되고 있었다.

“함 사장! 한 놈 더 조져 주갔소! 여김에 계약 다시 한 거요!”

“좋소! 내, 걸뱅이들 뱃속을 돈으로 채워 주갔서! 배불리 챙기기요! 하하!”

어느 틈에 말투를 흉내 낸 함 사익이 남은 팀원들에 실실거리며 총구를 건들거렸다. 순식간에 모인 플래시에 장인옥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저…. 저.”

“이 새스깨들 뭐하나? 죽이라!”

난도질한 피가 마르지 않은 두목의 칼날이 장인옥을 향해 겨눠지자, 엉겁결에 따라붙은 칼 중 하나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휘리릭!”

놀랐던 것도 잠시, 허공을 가른 칼끝이 두려움을 뭉갠 약의 기운으로 날카롭게 질러가자, 망설였던 정글도들이 연이어 돌진했다. 피 튀기는 2차 혈투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선(善)과의 전쟁이 아닌, 아수라들만의 혈투는 최소한의 자비나 인정을 배척한 잔혹한 자만이 생존을 약속받은 것처럼 처절했다. 그 과정은 말라비틀어져 산화철에 부식된 냉, 온탕을 채우는 핏물로 이어졌다. 날아가 샤워 꼭지에 박힌 자가 단말마로 늘어지고, 정글도에 찍혀 물러서면서도 상대의 목줄을 뜯어내는 자. 타일 바닥을 엉금엉금 기면서도 허튼 칼을 휘두르는 자와 축 늘어진 동료 위로 피 토하며 쿨럭거리다 숨이 멎은 자의 허망한 눈빛은, 어지러운 플래시 불빛과 사방으로 흩어진 장작불을 배경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캬!-캬-카! 함 사익!”

육중한 장인옥의 체구가 비틀거리며 불과 10미터 앞의 함 사익에 다가서질 못하고 절규했다. 그러나 그 순간의 빈틈은 치명적인 찰나를 허용하고 말았다. 악귀의 얼굴로 뛰어오른 우 상길의 양손이 그의 머리통을 잡는 순간, 쩍! 하고 수박 깨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안면을 찍은 무릎이 그것이었다.

“끄응!-털썩!”

맥없이 허물어진 장인옥은 온전히 몸을 뉘지도 못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미 흉측했던 안면은 더욱 분간되지 않았다. 축 늘어진 양팔과 벌어진 무릎 사이로 궁둥이가 닿은 곳은 몇인지 모를 연변 거지들이 엉켜 헐떡이는 핏물이 흥건한 냉탕이었다. 그런데도 장인옥의 눈빛은 사그라지지 않고 함 사익을 쏘아 보고 있었다.

“차르랑! 차르랑!”

다리를 절뚝이며 정글도를 타일 바닥에 끌고 걷는 두목의 입가에서 싸늘한 웃음이 보였다. 그는 냉탕의 턱에 앉아 간신히 몸을 지탱하는 장인옥을 꼬나보고, 달뜨게 함 사익을 찾았다.

“보오! 이 모가지로 끝이오!”

정글도를 꽉 움켜쥔 두목은 안면을 간질이는 피를 훔치며 장인옥 앞에 다가섰다.

“눈 까리 깔아라, 대가리까지 말고 곱게 가자. 쳐보고 죽으면 지옥에서 또 본다 안 하니? 이번엔 내가 운이 좋았다. 잘 가자!”

예상치 못한 측은지심을 내비쳤던 두목의 정글도가 망설이지 않고 올라가는 순간, 요란한 총성이 탕 안에 울렸다.

“탕! 탕!”

느닷없이 불꽃을 내 뿜은 총구에 가까스로 버티던 장인옥이 푹하고 쓰러지자, 함 사익은 공명의 여운을 즐기듯 입가에 미소를 띠고 주위를 천천히 돌아봤다.

“어떻게 틈만 있으면 제멋대로 바꾸려 하지? 계약을 아주 좆같이 아는 버릇들은 아무리 가르쳐도 도통 대가리에 박히질 않나 봐? 에이! 쯧쯧!”

손에 든 플래시로 바닥을 비추며 냉탕 턱에 올라선 그가, 쪼그려 앉아 글록 19를 건들거렸다. 그리고 턱 끝으로 장인옥을 가리키고 도리질 쳤다.

“누가 둘이래? 저놈은 처음부터 내 거라고 몇 번을 말해? 아무리 거지새끼라도 말귀는 들어 처먹어야지. 운이 좋다고? 잘 가라고? 늬 맘대로 보내?” 

“탕!”

“너나 잘 가오!”

어리둥절한 두목의 이마에 정통으로 총알을 박은 함 사익은 곧바로 돌아서 신음하고 있는 연길 거지 세 명에게 차례로 권총을 발사했다.

“탕!-탕!-탕!”

누구도 어찌해 볼 틈 없이 순식간의 처형에 동요한 팀원들의 플래시가 그를 향하자, 대수롭지 않단 표정에서 불거진 어색한 미소가 훤히 드러났다.

“거지새끼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어디서 기어올라? 여기 좀 비춰봐요!”

함 사익은 괘씸한 듯, 콧김을 한 번 뿜고 숨을 갸릉갸릉 하는 장인옥의 코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이 장면 임팩트 있는데? 전과 똑같잖아? 넌 또 죽어가고 난 웃고 있고. 크크! 그러게, 한 번만 죽지. 한 놈이 같은 사람한테 또 죽어 나타나니 저승사자도 헷갈리겠어? 이번엔 술이 아니라 노잣돈을 줄게, 두 번째니까 은근 정이 생겨서 말야? 크크크!”

그는 안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지폐 뭉치를 던졌다.

“다! 다 가져가요. 버스 말고, 비즈니스석으로 호강 한 번 해봐. 엉?”

그리고 함 사익은 꼬깃꼬깃 수표 한 장을 따로 총구에 껴 그의 입으로 밀어 넣었다.

“에으! 쯧쯧! 이빨도 다 나가고, 이건 입이 아니라 똥구멍이네. 치질 걸린 똥구멍.”

한껏 고개를 숙여 그의 입속으로 쑤셔 박은 수표가 반쯤 들어간 것을 확인한 그가 허리를 펴고 방아쇠를 당기려던 그때, 돌연 장인옥의 안광이 거세게 쏘아졌다.

“으으! 윽! 어-어억!”

눈에서 눈으로 파고든 강렬한 푸른 빛은 순식간에 검은 물질로 변해 그의 전신에 퍼져갔다. 눈알이 부풀어 오르고, 쉼 없이 부딪히는 이빨들 사이 점액질이 목덜미로 흐르고 뼈마디를 어긋 낸 경련이 전신을 꺾어 살과 뼈가 기이한 모양이 되어 갔다.

“크크크! 함..사..” 

핏빛 안구로 힘겹게 버티던 장인옥이 고개를 떨궜다. 그는 함 사익이 자기머리 위에서 원을 그리는 때를 기다린 것이다.     

   “끄극! 끅!”

어둠보다 짙은 칠흑이 함 사익을 잠식할수록, 지켜보는 이들은 그의 신체 곳곳에서 불꽃이 이는 착시에 빠져 아찔한 현기증과 질식감에 휘청이고 있었다. 그러나 의지완 달리 누구도 장소를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못하고 그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석상처럼 굳어있었다. 우 상길. 그만이 이를 악물고 굳은 다리를 디디기 위한 사력을 다했다. 불과 3미터 코앞에 떨어져 있는 함 사익의 글록 19 권총을 집기 위해서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팔과 다리, 깨질 듯 옥죄는 심장의 통증. 지금 우 상길은 장인옥과 함 사익이 아닌 불확실한 두려움과 공포를 감당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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