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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 기 홍 Oct 16. 2024

벅수 14화 은인이 운명으로.

14. 은인이 운명으로.     

   간간이 어둠을 부유한 불티도, 위태롭게 이어진 가는 숨소리마저 꺼 진지 한참이 된. 정적 이외엔 존재치 않는 부동의 공간에 축축한 핏물이 풍기는 비릿한 냄새. 

우 상길이 글록 19를 들고 멍하니 있는 사이, 허공에 떠 있던 함 사익이 박살 난 창문 밖으로 빨리듯 사라졌다. 설명하지도, 되지도 않는 무력감은 아버지의 사고 이후 괴롭혔던 자책감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그때, 계단을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창문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그들의 뒤로 날아들었다.

“쿵!”

일 순, 반사적으로 지점을 찾은 플래시들이 일제히 입구를 비추고, 상길은 민첩하게 창문으로 뛰어든 형체와 대치했다.

“시간 없으니 간단히 묻겠다.”

감정이 배제된 건조한 음성은 형체가 아닌, 뒤에서 들려왔다. 어느새 입구를 막아선 다수의 인물은 김준석을 비롯한 도 민수와 오주희였다. 그들은 누구도 플래시를 들고 있지 않았다. 도 민수는 플래시들을 뚫고 뚜벅뚜벅 걸어왔다. 간신히 가라앉은 먼지가 들떠 별빛처럼 반짝였다.

“너희가 저들을 죽인 건가?”

“당신들은 누구야?”

“잠깐만!”

날카롭게 탕 내부를 살피던 김준석이 꿈틀한 눈썹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너였구나?”

또다시 플래시들이 방향을 틀어 김준석을 비췄다. 적의가 없는 담담한 표정. 우 상길은 불현듯 그날의 갯바위가 떠올랐다. 뇌리에 각인된 신비한 인물, 생명의 은인.

“그, 그날….”

“기억하는구나? 다시 만날 것 같았지만, 의외로 이곳에서 만나다니.”

“...”

지옥의 야차도 외면할 참혹한 현장에는 어울리지 않은 다정한 눈길이었다.

“더 단단해졌는데, 정작 너는 모르는 것 같구나.”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너의 기운, 네 운명!”

김준석은 잠시 우 상길을 바라보더니, 양해를 구하는 표정으로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순간, 훅! 하고 밀려온 뜨거운 기운에 우 상길의 뇌리에서 셀 수 없는 잔상이 초고속으로 스쳐 갔다. 그것들은 대부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고, 끝날 무렵에 스친 장면들은 아버지의 사고 이후 겪었던 일이었다.

“흐흡!”

“그것이 너의 실체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우선 여기 상황을 설명해 줘야겠다.”

급격히 상기된 우 상길의 의문을 뒤로 돌린 김준석이 마른 장작처럼 변해버린 장인옥의 시신을 유심히 살폈다.

“그, 그는 인천의 조폭 두목이었던 자로써 이미 한 번 죽었던 잡니다.”

우 상길에 요약된 그간의 일들이 탕 안을 나직이 쟁쟁거렸다. 부활한 그가 초인적이었다는 것과 속초 별장에서 죽음 직전을 경험했던 일, 추적하는 중 광장시장에서의 혈투. 그리고 이 장소에서 있은 참혹한 살인 끝에 함 사익에 발생한 기이한 현상. 우 상길은 장인옥을 마주쳤을 때, 전에 없던 심리적 변화를 말미에 토로하고 끝맺었다.

“캐이런의 새로운 영자(靈者)일까요?” 

“그의 기운이 사라졌어요!”

도 민수와 오주희의 연속된 의문에도 김준석은 말이 없었다. 그는 오주희에게 감지된 기운과 드므의 감응으로, 이곳이 캐이런의 공간일 거라 확신하고 달려왔었다. 하지만 건물이 가까워질수록 격하게 반응했던 드므의 진동도 한순간에 잠잠해진 지 오래다. 무엇보다 벽과 천장, 허공 어디에서도 캐이런의 차원 밖 공간을 느낄 수 없었다.

‘속았어! 내가 헛짚었다.’

낙심한 김준석이 요동쳤던 드므와 캐이런의 기운이 강했던 원인을 곰곰이 짚었다.

“가디언에 혼선을 줘 내 시간을 줄이고, 자신은 벌려는 의도였어.”

그가 허공에 선을 그었다. 숫자는 짙은 붉은색의 –47- 소멸을 경고했다.

‘47초’ 차원 밖 당신목의 공간에서 나온 짧은 그사이에, 무려 20초가 줄어있었다.

“그리고 이젠 혼란을 조장하기보단, 마지막 의식을 지켜줄 심성이 더욱 극악한 영자(靈者)를 선택한 거야. 악의 기운은 말 그대로 악할수록 강해지니까.” 

“벅수! 나타났어요. 여기서 얼마 멀지 않아요.”

내내 눈을 감고 양손의 엄지 검지로 드므를 감싸고 있던 오주희가 소리치자, 형체가 그녀 앞으로 뛰어왔다. 장춘호였다. 그는 47초가 남은 김준석의 시간을 본 뒤론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 순간에도 사라지고 꺾이는 세상의 선과 희망들, 당장이라도 소멸이 목전에서 벌어질 수 있단 두려움과 초조함으로 휩싸여 있었다.

“어디예요?”

“청계천이 보이고..다리, 다리. 이름이...삼. 삼일교! 그 근방의 유리 건물. 거기예요. 거기 있어요.”

“유리 건물이라면...? 함 실장의 회사 건물입니다.”

“함 실장?”

오주희가 본 이미지를 곧바로 우 상길이 특정하자 김준석이 되물었다.

“좀 전에 영자(靈者)라고 했던 그자의 건물입니다. 함스 그룹 본사요.”

“선생님! 제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제지할 겨를도 없이 창밖으로 장춘호가 몸을 날렸다.

“춘호야, 안돼!”

도 민수의 다급한 외침에 돌아온 건, 그가 차고 오른 창틀과 폐가 지붕의 기왓장이 덜그럭 깨지는 소리였다.

“가자!”

김준석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 상길이 달려 나갔다. 계단을 박차고 담을 뛰어넘고, 지붕 위를 달려 어두운 골목길을 내달리는 그들은, 고양이보다 날렵하고 사뿐하게 오주희가 본 유리 건물, 함스 그룹 본사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어두운 도심의 건물은, 마치 검은 우주 공간처럼 속살 곳곳의 층에 별빛 실내등으로 유리알 몸체를 발광하고 있었다. 김준석은 달려오는 내내 장춘호를 불렀다, 하지만, 그의 뇌파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건너편 인도에 멈춰서 영문자 H를 형상화한 건물을 주시하던 오주희가 우려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춘호 씨가 바보 같은 짓을 하진 않겠죠?”

그녀는 세찬 요동을 유지하는 드므에 손을 떼지 못했다.

“선생님! 제가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무실 위치를 알고 있으니,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

김준석은 오주희의 손에서 진동하는 드므와 건물을 번갈아 보며 굳은 표정이었다. 

“선생님?”

드므의 떨림대로, 유리 건물에 드리운 검은 기운은 무섭게 강렬했다. 이제 더는 은신이 필요 없을 캐이런이었다. 하지만 왠지 개운치 않은 침묵은 원인을 찾지 못했다.

“선생님! 춘호가?”

“가라! 나도 곧 따르마.”

비장한 김준석의 허락이 나지막이 떨어지자, 거침없이 좁은 도로를 가로지른 두 사람이 건물 내부로 흡수됐다. 그러나 급히 제지당한 오주희는 따가운 눈길이었다.

“가디언은 지금 상황에 현혹되지 말고, 냉정을 유지하시오. 분명친 않지만, 저곳은 무언가 결핍된 것 같소.”

“벅수께선 뭐가 걸리는 거죠? 저 더러운 기운과 드므는 캐이런을 말하는데?”

“맞소! 그렇기는 하지만 아니기도 하오. 내 예감은 저곳을 부정하고 있소. 문제는 몇 시간 남지 않은 지금의 오판은 치명적이라는 것이오. 가디언이 악의 이중성을 파악하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하오. 만약, 새로운 영자(靈者)의 기운이라면?”

“한낱 영자(靈者)에게서 저토록 강력한? 그게 가능해요?”

“가능하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충분하오. 나와 캐이런의 본질은 다르오, 절망의 염원인 캐이런은 저주와 원망. 복수를 각 염원의 본질대로 분리할 수 있다는 거요. 지금 저 기운은 저주와 복수 말곤 명확지 않소. 다만, 이것이 소실된 시간의 탓인지, 정말 그런 건지는 확신이 없소.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저곳을 확인해야만 하오, 가디언에 달렸소. 저것이 진정 캐이런인지, 아니면…. 캐이런의 결계를 찾아 주시오.”

김준석은 잠시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허공에 손을 그었다. -49- 흰색의 숫자. 2초가 늘어나 있었다.

“당신이 확신이 섰을 때 알려 주시오. 그땐 건물을 붕괴시켜서라도 캐이런의 결계를 찾아낼 것이오.”

그리고 바람처럼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오주희는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만약 그의 의심이 사실이라면 오판의 재앙을 돌이킬 시간이 없었다. 드므가 깨질 듯 강력한 저 기운이 캐이런이 진짜 아니라면? 오주희의 전신 세포가 들끓어 올랐다. 

그녀는 놓치고 있는 무언가를 찾는 최후의 방편을 고민한 끝에 블라우스를 벗어 던지고 청계천에 뛰어들어 가부좌를 틀었다. 탐스러운 가슴 아래 잔잔한 물결이 찰랑찰랑 흘렀다. 떠돌던 한기로 입김을 낸 그녀의 봉긋한 유두 사이에 손가락이 삼각형으로 얹혔다. 그곳엔 동전 크기의 특이한 자국이 있었다. 도드라져 선명한 초승달 모양의 흉터, 김준석은 스티그마타라고 말해줬다. 특히 초승달 문양의 성흔은 보름달로 차는 희망의 상징이라며 자세히 설명해 줬었다. 어릴 적부터 감추던 징그러운 흉터. 지금 그녀는 처음으로 그것을 의지해 어느 때보다 절박하게 감각을 응집하고 있었다. 


   장춘호의 뇌파가 반응한 것은 김준석이 건물로 진입하고 10분쯤 지난 후였다.

그는 7층을 수색 중인 것을 알렸다. 그 이미지는 함 사익의 사무실인 15층을 막 수색하고 나온 우 상길에게도 전달됐기에, 놀란 그를 흠칫하게 했다. 곁에 있던 도 민수는 그의 반응에 미소로 알려줬다.

“선생님께서 그러셨잖아, 단단해졌다고. 같은 편이란 말이지. 후후!”

“너의 뇌파는 나와 가디언은 물론, 민수, 춘호와도 감응하게 된 거다. 누구든 생각하면 보이는 거지.”

창밖의 연결 통로를 살피던 김준석이 짧게 말하곤, 우 상길에 물었다.

“저건 뭐지?”

“옆 건물과 연결된 통롭니다, 그룹 회장실이 있고.”

무심코 답변하던 그의 눈동자가 갑자기 반짝거렸다.

“아! 저 건물 지하 4, 5층에 마약 생산 시설이 있습니다. 어쩌면 거기에 있을 수도.”

“마약?”

“신종 마약 –인샬라-를 생산하는 곳이오.”

전혀 뜻밖이라는 도 민수가 미간을 찡그렸다.

“서울 한복판에서 마약을 만든다고?”

그사이 김준석은 오주희와의 감응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거세게 소용돌이치는 흰 기운만 반응한 것으로 보아 그녀가 극도의 몰입상태에 들었음을 알았다. 김준석은 건물 전체에 감도는 기운을 다시 살폈다. 역시 개운치 않았다.

“상길은 나와 함께 마약 공장으로, 민수는 나머지 장소를 계속 찾아보고. 서두르자!”

그들은 둘로 갈라져 복도를 뛰어갔다. 김준석은 빠르게 앞서가는 우 상길의 뒤를 따르면서도 의문에 자유롭질 못했다. 그와 캐이런은 서로에게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존재였다. 그런데도 왠지 혼탁했다. 또 함정인 걸까? 결국, 직감 부정은 장춘호의 죽음이 제물로 돌아왔다. 그와 합류를 시도한 도 민수가 발견한 장춘호는 가슴부위가 터지고, 시커멓게 타 푸석해진 안면과 뒤틀린 다리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추...추. 춘. 호야!”

경악에 뒤늦게 폭발한 그가 무릎을 꿇고 가슴을 때릴 때, 섬뜩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복도 저 끝에서 지켜보는 평범한 괴물. 함 사익이었다.

“킥, 킥, 킥! 완전 불나방이 따로 없어. 등불인지, 불덩인지도 모르니 별수가 있나? 능력도 없이 눈깔에 힘만 들어가면 다 되는 줄 알아. 크크.”

그는 천천히 도 민수를 향해 걸어왔다, 그러면서 건물 밖을 보면 안쓰러워했다.

“하여튼, 여러 가지로 멍청한 놈들이야. 거기 있는 줄 아는가 보지?”

끓는 분노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도 민수와 대비되는 평온하리만치 차분한 함 사익이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 턱을 추켜세웠다.

“어째, 하나 같이 순진해 빠져서 바보 같아. 속아서 좋긴 한데, 영 재미가 없어.”

그때, 실컷 가지고 논 장난감에 싫증을 느낀 아이의 표정이 된 그의 입매가 굳어지면서 반월을 그린 손이 허공을 갈랐다. 

“쉬익! 쉭!”

“헉!”

피할 겨를 없이 번쩍하는 환영을 본 그는 말로만 듣던 캐이런을 떠올렸다. 그인가?

“끄응!”

뜨거운 열기가 때린 어깨에서 찐득한 액체의 온도감이 겨드랑이로 퍼졌다.

“내가 좀 바빠서. 급히 갈 곳이 있거든?”

금세 장난기를 접은 함 사익의 입술이 달싹인 뒤, 화염에 싸인 쇠꼬챙이가 그의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쉬익!”

아찔한 순간이었다. 붉은 불덩이가 동공에 가득할 찰나, 용케 몸을 비튼 그가 한 호흡의 틈을 두지 않고 곧바로 반격을 가했다.

“우. 웅!-파-바-바-박!”

양손을 모아 창문을 훑는 동작에 폭죽처럼 터진 유리 파편이 날카롭게 함 사익을 덮쳤다.

“끄극!”

상대를 얕잡아 방심한 탓이었을까? 황급히 물러선 그의 얼굴엔 아이 손바닥만 한 유리 조각이, 파편이 스친 이마에선 가는 핏물 선이 난 줄기로 뻗쳤다.

“으. 으. 으. 으.”

유리 조각이 깊이 박힌 볼을 더듬는 사익이 치민 분노로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카 악!”

동시에 그를 향해 뛰어오른 도 민수. 그들의 싸움터가 된 7층은 뒤흔드는 천둥소리와 불꽃 화염을 일으키는 번갯불에 초토화가 시작됐다. 단단한 벽을 깨고, 창문이란 창문은 파편으로 흉기가 되어 빗발쳤다. 지금껏 없었던 어마어마한 힘과 에너지의 충돌은 무차별적인 파괴를 보여줬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 순간의 모든 것에 둔감하고, 느릿한 시간 안에 존재했다.

“킥, 킥! 인정해야겠구나. 그놈이 그놈이 아니란 걸.”

핏빛 눈동자의 함 사익이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중얼거릴 때, 매서운 빌딩풍이 괴이한 울음으로 건물을 휘감고 울렸다. 파르르 떨리는 옷자락, 만신창이가 된 그들은 잠시의 숨에 정적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정적의 끝은 누군가의 죽음이란 걸 알고 있었다. 먼저 변화를 보인 건 함 사익이었다. 얼굴에 박힌 유리 조각을 꿈틀댄 그는, 마치 커다란 공을 끌어 안 듯 검은 기운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바닥에 일렁이는 기운부터, 건물 상공을 맴돌며 달빛마저 차단했던 기운까지 서서히 그를 중심으로 응집했다. 반면, 그에 대응하는 도 민수의 특이한 자세는 한 손은 하늘로, 다른 손은 가슴에 얹고 소리 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늘을 가리킨 그의 손끝에서 일어난 백색 광채가 점차 전신을 감싸면서 인간 발광체로 변해갔다. 대치한 흑과 백. 원초적인 빛과 상반된 기운은 마치 둘 중 하나의 죽음을 미리 애도하는 듯 장엄한 레퀴엠으로 웅웅거렸다. 그들의 사활을 건 정중동(靜中動) 싸움이 시작됐다. 결집한 기운은 무형의 칼과 창이 되어 상대를 가차 없이 베고, 찔렀다. 베인 곳은 검은 줄기가, 찔린 곳엔 백색 빛이 터졌다. 다섯 발걸음 거리였다. 순간순간 눈썹이 꿈틀거리고, 미간을 찡그리는 것 외엔 어떤 움직임이 없는 고요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들 주변은 찢긴 공기로 울부짖는 괴성의 소용돌이에 모든 것이 풍비박산이 났다.

한순간 백색이 화해지다가도, 일순 흑이 되감아 돌고, 서로 밀고 밀리는 기운의 다툼은 찰나가 억겁일 만큼 시공간을 역순 하며 공세가 전개됐다. 그러나 일순, 막상막하의 대치를 깨는 균열이 일었으니, 혼신을 쏟아붓던 도 민수에게 돌발적인 강력한 뇌파가 파고든 것이었다. 오주희, 그녀가 보낸 이미지가 화근의 틈이 된 것이다.

“쿨럭!”

한 움큼의 선지가 터지며 중심을 잃은 그를 삽시간에 검은 기운이 옥죄어 돌았다.

“끄응.”

목젖의 둔탁한 신음과 함께 가슴을 쥐어뜯는 그에게 지독한 냉기가 몰리면서 신체 감각에 이상을 일으켰다. 아득했다, 함 사익에 초점을 맞출 수 없을 정도였다.

“으. 으. 으.”

“고통스러운가? 아직 살아있단 증거로 다행은 아니고? 원통하고, 분하고. 저주스럽지? 크크! 그래서 우리가 강한 거야. 우리가 마지막, 바로 그것이거든.”

그는 처참한 몰골의 자신보다 죽음을 목전에 둔 도 민수에게 희열을 느꼈는지, 손으로 뭉그러뜨려 닦은 얼굴의 피를 핥으며 사악하게 웃었다.

“그만 뒈지자! 시간이 너무 지체됐어.”

함 사익은 바닥에 나뒹굴던 검은 쇠꼬챙이를 집어 도 민수의 심장을 겨눴다.

“이게 심장에 박히면 너도 저 꼴이 되는거야. 일명 캐이런의 검이라고 하지. 희망과 선을 수호하는 영혼을 파괴해 영원히 환생을 막는다나?”

그는 가슴이 녹아 사지가 뒤틀려있는 장춘호를 조롱하며 키득거렸다. 그때였다. 함 사익은 갑자기 옆구리의 뜨거워짐에 놀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찢겨진 옷자락 사이에 박힌 도 민수의 주먹에서 무언가 반짝거렸다.

“끄응! 그..깟 유.리 조각으로 나를?”

“죽기로 작..정하면 얘.기가 달라지지.”

도 민수는 무릎으로 배를 누른 함 사익에게 씁쓸한 미소를 짓곤 주먹에 힘을 주었다. 

“으. 으악!- 으아악!”

견딜 수 없이 밀려드는 뜨거운 기운에 자지러진 함 사익이 볶은 콩 튀듯 나가떨어져 온몸을 뒤틀며 발광했다.

“아 악!- 악!”

내장이 녹고, 살갗이 타는 극심한 고통에 함 사익이 늘어졌다. 민수는 비록 김준석과 끝까지 함께하진 못했지만, 캐이런의 수족을 잘라 냈음이 위안이었다. 가슴에 박힌 쇠꼬챙이에 마지막 숨이 새어 나오고, 목젖까지 찬 핏물의 가랑거림이 꿈결처럼 들리자, 뜯겨 흉물스러운 천장에 정겨운 얼굴들이 웃고 있었다. 김준석도 오주희도, 그 외 사람들도. 그는 점점 아득해지는 천장 불빛의 번짐을 따라 흐릿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함 사익의 저주처럼 영원한 암흑 세상일지 모를 죽음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한편, 오주희의 이미지를 따라 건물을 빠져나온 김준석과 우 상길은 청계천 좁은 도로를 정신없이 내 달리고 있었다. 김준석은 마약 생산 공장을 파괴하는 중에 전달받은 이미지에 조급해 있었다. 운명의 두 시간. 캐이런의 의식은 마지막 정점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그는 따르는 우 상길과 오주희를 느끼며 괴로워했다.

‘삼지구정(三池九井) 우물이 아닌 연못. 바보처럼 연이어 두 번의 실수라니,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저들의 죽음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을.’ 

뇌파로 위급함을 알렸던 그들을 긴박한 시간에 쫓겨 외면한 자책이었다.

‘미안하다, 곧 친구로 다시 만나자.’

그는 곁에 붙은 우 상길의 뇌파가 쉼 없이 그들을 찾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하위 능력자인 그는 자신과 오주희만 생사의 뇌파를 감지할 수 있음을 모르고 있었다.     

   칠흑의 기운이 장악한 낮은 건물 상공엔, 금세라도 모든 걸 빨아들일 것 같은 음산한 어둠이 둥근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우 상길은 문득 그 현상이 도심의 불빛이란 불빛을 모조리 삼키려는 거대한 블랙홀의 아가리로 보였다.

“벅수!”

잔뜩 긴장한 오주희가 가리킨 곳은 누릿한 타일 외관인 광장시장 중앙통로였다.

하루 수만 명을 빨아들였다 내뱉은 길은 아직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건물 뼈대의 누런 이빨 타일 벽 사이로 검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것 같았다.

“흠.”

그 사이에도 상공의 검은 기운은 점차 넓고 짙은 잿빛 띠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이제부턴 절대 긴장을 늦춰선 안 되오! 캐이런은 태초부터 단 한 번도 소멸한 적 없다고 말했듯이, 우리는 그를 소멸시킬 수 없소. 오직, 절대 선의 영혼을 지키려는 것이오. 그리고 상길,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저 안에 들어서는 순간, 빠져나올 수도, 목숨을 장담할 수도 없다. 나와 가디언관 다르니 비겁자가 되는 게 아니야.”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다. 삶은 무엇보다 소중하니 더 살란 말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직면한 자, 하지만 그는 거창한 명분과 책임에 눌려 투신할 의무가 없는 이였다. 중앙통의 오로라와 같은 기운은 캐이런의 뚜렷한 배광임을 확신한 그로서는 상길이 휩싸이게 될 경우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상길의 죽음이던지, 캐이런이 현재의 차원 밖으로 사라지던지 둘 중 하나임을.

“민수 씨와 춘호 씨는 잘못됐군요?”

“...”

“안타깝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오주희의 옅은 울먹임에 잠긴 목소리였다.

“...후회로 사느니, 끝장을 봐야겠습니다! 어차피 덤이었으니까. 가시죠!”

아무런 감정이 없는, 그래서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는 우 상길이었다.

“갑시다!”

김준석은 내심 예상됐던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중앙통로를 걸어 들어갔다.

분리된 공기층은 폐부를 굳게 하는 냉기로 비강을 자극했다. 싸늘했다. 통로 안팎의 기온 차는 점포들의 비닐 막을 부채꼴 주상절리로 얼리면서, 암흑의 중심이 된 광장시장을 어둠의 빙벽으로 차단하는 중이었다.

“저 방향이에요.”

반 발짝 앞선 오주희가 잿빛 기운이 웅크린 길목을 가리키며 멈췄다. 목에 걸린 드므 역시, 다가갈수록 진동이 더욱 요란했다.

“선생님!”

그녀가 가리킨 방향의 무언가에 놀란 우 상길이 굳은 얼굴로 김준석을 찾았다.

푸른 빛이 감도는 검은 빙벽이 어느덧 시장 전체를 감싸고, 사방에서 좁혀오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저건 캐이런이 인간의 세계와 단절시킨 차원의 시작점이다. 이전까진 인간의 인지나 저항이 허용된 공간이었다면, 지금부턴 핵폭탄이 터져도 모를 공간이 된 거야.”

김준석은 바닥과 벽, 천장에 야금야금 스며 터지는 얼음꽃에 긴장된 얼굴로 손을 저었다. -47- 도저히 회복을 기대할 수 없는 잔여 시간이 빨갛게 깜빡였다. 그는 차라리 시시포스이길 바랐다. 무한 반복의 지루함과 끝나지 않을 고통일지언정, 시간의 끝이 없음이 절실했기에. 김준석은 지독한 외로움에 울컥했다.

“아! 벅...수”

그때, 짧은 탄식으로 휘청인 오주희가 다리를 버티며 불렀다. 그녀의 경악은 캐이런의 의식이 준비된 제단의 흉측한 광경이었다. 인간의 백골로 쌓은 제단에 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만삭의 임신부. 그 위, 허공에 걸린 동물들의 사체에서 떨어지는 핏물을 고스란히 흡수하는 돛대 꺾인 배는 충격적이었다. 그 배는 얼마 전 인천의 어느 아트센터에서 전시하던 중,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고대의 유물이었다. 

“저!”

말라비틀어졌던 선미가 검붉게 피를 흡수하고, 군데군데 파손된 외판이 피에 젖기까진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의외로 담담해진 김준석관 달리, 치가 떨린 우 상길이 자제력을 잃고 뛰어들려는 찰나.

“멈춰! 객기 부리지 마라! 상대는 캐이런이다. 저긴 벅수의 차원이야, 넌 저길 들어서기도 전에 죽어! 거긴 가디언까지다.”

급히 상길을 제지한 그의 안광이 바뀔 때였다. 한기의 어둠 속에서 양귀비 꽃잎처럼 툭 떨어진 조롱이 들린 것이다.

“아주 바짝 독이 올랐구나. 크크. 하긴, 눈 돌아갈 만하네? 씨팔! 아무리 그래도 저건 지랄이다. 임신부잖아?”

제단 위 참혹한 광경에 눈살을 찌푸린 그가 우 상길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놀랍게도 함 사익이었다.

“하지만 어쩌겠어? 숙명이 지랄이고 운명이 뭣 같은 걸 탓해야지.”

제단을 등진 그의 차가운 조소가 우 상길과 두 사람의 면면에 닿고 사그라들 때쯤, 허옇게 괴사 된 그의 옆구리에 선지가 덕지덕지 붙어있음이 보였다.

“너로구나? 캐이런의 새로운 영자(靈者)가.”

“크크. 영자? 갖다 붙이긴. 동업자란 단어 몰라? 살 만큼 살았으면 그쯤은 알아야지. 너무 처먹어 죽을 때가 돼서 그런가, 감이 없네? 카카카!”

익히 김준석과 소멸 시한을 알고 있다는 듯, 함 사익의 비아냥은 거침없었다.

“함 사익!”

“오! 그래, 우 부장.”

그는 제 이름을 외치는 우 상길에게 양어깨를 으쓱하고 대꾸했다.

“그러지 않아도 얼마 전에 재밌는 게 기억났거든? 갯바위, 네 놈 애비. 크크크. 재밌어. 언제부턴가 등골이 쎄 한 게, 왜 그러나 싶었거든? 멍청한 새끼. 기회가 널렸을 때 한 번은 잡았어야지. 이젠 목숨 부지하기도 어려운데 어쩌나? 큭!”

“그래.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하려고? 복수 좋지. 근데, 가능하겠어? 해 봐, 그럼!”

함 사익의 비웃음은 우 상길에서 김준석으로 도발했다.

“그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조금 있으면 신호등 꺼져. 이리저리 간 볼 시간이 어딨어? 직진해야지!”

비웃음이 신호탄이었다. 어느새 빼든 쇠꼬챙이를 우 상길에 날린 함 사익이 동시에 허공으로 솟구쳤다.

“쉬익!”

하지만 몸을 틀어 흘린 우 상길의 반격도 즉시였다.

“타앗!”

공간을 찢고 차올리는 그의 발길질은 수직으로 꽂히는 함 사익을 타격하는 동시에 기를 모은 주먹이 정통으로 그의 안면을 강타했다.

“컥!”

충격에 비틀비틀 중심을 잃은 함 사익이 터진 입술의 피를 닦으며 소리쳤다.

“아, 아-악! 사익이 씨발아! 저 새끼 싸움 잘하잖아? 왜 싸우려고 지랄이야!” 

순간적으로 자신의 우월한 영적 능력에 걸맞지 않은 싸움 실력을 깨달은 것이었다. 반면, 우 상길의 오랜 수련과 실전 경험이 바탕 된 전투력은 생존 기술이었다. 제아무리 백발백중 과녁을 뚫는 사격 선수라 해도, 전쟁터에서 사람을 겨눈 것과 다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 상길은 내심 이상함을 느꼈다. 맞받아칠 때 기운의 응집력이 수상했었다. 극대치로 끌어올려 발산할 찰나에서 흐트러지는 느낌? 비록 함 사익이 중심을 잃고 비틀댔지만, 예상은 입가의 상처가 아닌, 장인옥 꼴이 났어야 했었다.

‘그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해라.’

그때, 뇌파를 울리는 김준석의 음성이 있었다. 그는 오주희와 함께 그들의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서둘러 캐이런의 마지막 결계로 한발 한발 다가서는 중이었다.

‘그자 능력의 원천은 캐이런의 복수와 절망이 본질이기에 너의 복수심이 강할수록 오히려 에너지를 빼앗기게 된다. 안타깝지만 넌 그의 상대가 못 돼, 버텨라. 평상심을 유지하고 최대한 버텨 보거라. 그자의 능력 유지는 캐이런에 달렸으니까.’

“이런, 제기랄!”

무심코 터진 어처구니없는 심정이었다. 한마디로 복수심의 불길이 되레 자신을 태워 버린다는 말이었다.

“키키킥! 네 아비의 목구멍에 술병을 처박을 때 눈빛이 그러더구나, 살려달라고.”

“이런, 쳐 죽일 개새끼야!”

아버지를 죽인 것이 영웅담이 된 그에게 우 상길은 또 한 번 뒤집혔다. 달려가는 그의 손끝에서 맹렬한 기운이 쏘아지고, 연이은 무릎의 타격은 삽시간의 협공이었다.

“꽈 광!-쩡!”

막, 한 사익의 머리채를 낚아챌 찰나였다. 푸른 빛이 언뜻 하는가 싶더니, 차가운 철벽의 단단함이 우 상길을 사정없이 튕겨 버렸다.

“크윽!”

전신의 관절이 깨진 듯한 고통에 당혹한 그는 절뚝이며 유심히 앞을 살폈다. 그와 자신 사이에 순간적으로 무형의 차단벽이 생겼음이 느껴졌다. 혼란스럽고 암담한 순간이었다. 함 사익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즉시 극한의 에너지를 휘둘렀다. 삽시간에 주위의 공기를 빨아들인 진공 상태에서 밀려드는 강력한 파동의 기운은 도 민수를 영원한 죽음의 늪 속에 가두기 전 마지막 일격이었던 바로 그것이었다. 

“후-욱!”

상길은 있는 힘을 다해 기운을 끌어모아 방어벽을 쳤다. 그러나 세포의 뿌리까지 총력으로 맞선 그의 에너지장은 의지가 무색할 정도로 허술하게 형성되고 말았다.

“으으으으.”

실로 가공스러운 위력이었다.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김준석의 경고를 비로소 실감한 순간이기도 했다. 극심한 냉기와 열기로 방어막의 균열을 파고드는 막강한 기운이, 푸르고 붉은 불꽃으로 번쩍이며 괴물처럼 으르렁거릴 때, 문득 아버지가 떠 올랐다.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저 악귀와 함께 죽지도 못한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살갗의 냉기와 열기는 틈이 벌어졌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때, 김준석의 웅장한 음성이 뇌리를 울렸다.

“복수의 감정을 지워라. 그래야만 살 수 있어! 당장!”

“스-스-스”

우 상길은 그 말끝이 여며지는 순간, 캐이런의 최종 결계로 들어서는 김준석의 모습을 보았다. 한 호흡보다 짧은 시간이었다.

“으아아-아!”

우 상길의 절망한 눈동자에 용암의 불길이 쏟아져 덮쳐왔다. 그 열기는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파고들어 옷은 물론 피부 거죽을 태우기 시작했다.

“허!-흐흡!”

또다시 극한 냉기로 급변한 기운은 귀와 코, 심지어 시뻘겋게 충혈된 눈까지, 뚫린 모든 곳에서 피를 짜냈다. 점차 무너지는 방어막에 냉각된 전신의 고통은 상길의 최후를 승인하는 각인처럼 심장의 껍질부터 누르고, 또 눌러 갔다.

“끄극.-끄.-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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