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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 기 홍 Oct 16. 2024

벅수 15화 천년의 두 염원. 벅수 그리고 캐이런

15. 천년의 두 염원. 벅수 그리고 캐이런    

 

   궁극의 결계를 친 캐이런의 차원은 첫 번째 칠흑의 빙벽 공간과는 다른, 새벽녘 묵청(墨靑)의 하늘처럼 신비로웠다. 태초의 벅수로부터 전설로 전해진 제단에 선 그는, 미묘한 감정이 뒤섞인 동요를 진정하며 중심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섰다. 제물로 희생된 동물들의 사체는 밖에서 보던 것보다 더욱 참혹했다. 무참히 훼손된 육신과 장기에서 떨어지는 핏물도 보기가 역겨웠지만, 사체 곳곳을 뚫어 걸어 놓은 갈퀴 탓에 이탈한 영혼마저 고통스러워할 것만 같았다. 김준석은 절로 감기는 눈을 부릅뜨려 애썼다. 핏물이 스며들기 시작한 나룻배의 밑널 상공에 부양돼 평온하게 잠든 임신부는 분명 몇 년 전, 부암동 김밥집에서 감지했던 기운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복중의 태아가 양수를 터뜨려 탄생하는 순간이 생과 절연할 운명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그때, 작은 봉우리의 배가 태동으로 꿈틀했다. 

-절대 선- 

절망과 악에 질식한 인류의 절원이 잉태시킨 희망의 근원이자, 반드시 세상에 울음을 터뜨려야 할 성스러운 생명이 드디어 존재함을 몸짓으로 알린 순간이었다.

“아!”

벅찬 감동에 탄성이 터진 김준석은 그 즉시 임신부를 향해 양손을 들었다. 그녀와 태아를 위한 가장 경건한 행위는 절대 선에 희망의 벅수 염원을 담은 것이었다. 인간이 벅수에 기원하는 희망을 절대 선에 전하는 짧지만 엄숙한 기도였다. 김준석은 감았던 눈을 뜨고 다시 주변을 살폈다. 시선은 이내 한 곳으로 끌렸다. 사람 키만 한 청동 거울이었다. 밑부분의 세밀한 양각은 인간과 동물의 뼈를 혼합한 악마의 형상이 입을 벌렸고, 깊은 먹빛의 은은한 단면 사각 테두리엔 도드라진 해골 문양이 음각된 기이하고 소름이 끼치는 거울이었다.

“캐이런!”

김준석은 사방이 울리도록 차원의 공간 주인을 불렀다. 잠잠했다.

“캐이런!”

그는 허공에서 쉴 새 없이 핏물을 떨어뜨리는 동물 사체들 사이를 훑으면서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캐이런을 찾았다. 하지만, 캐이런은 여전히 기척도 없었다. 그러나 직감은 반사된 음성 파동으로 감지한 캐이런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었던가?”

나룻배 외판에 젖어 들던 핏물이 하부로 고이는 것에, 불현듯 특정하지 못한 우물이 교차했다. 지하의 수맥을 연결한 우물이 아닌, 초자연적인 연못. 제물의 피로써 농축된 연못에 악의 염원을 소환한다면? 그는 집착했던 현실의 우물이 허상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자기에게 남은 시간을 숨죽여 확인했다. -39- 이대로라면 캐이런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응축된 악의 염원이 피의 저주까지 흡수한다면 한층 더 강력해지는 건 자명한 일, -절대 선-이 자궁 밖에서 첫 들숨을 할 때, 배가되어 주입될 사악한 기운을 차단하기엔 남은 시간의 힘으로는 절대 역부족이었다. 최소한의 방어에 필요한 시간은 1분 50초였다. 그마저도 김준석의 소멸을 담보하는 극단의 전제였다.     

   “벅수 한(hann)! 선과 희망의 염원. 어째서 여기까지 찾아왔는가?”

웅혼한 목소리가 굴곡진 차원의 벽을 쩌렁쩌렁 울리며 김준석의 가슴을 진동했다. 순간, 음성의 근원을 파악하지 못했던 그는 서기 어린 청동 거울을 직시했다. 그때, 동경 중심을 감돌던 묵청색 운기가 파동으로 일면서 김준석의 귓전을 때렸다.

“태초 이래 그 어떤 벅수도 염원의 묵계 안에서 존재했는데, 벅수 한(hann) 너는, 염원을 이루고 소멸한 전대 벅수들의 희생을 한순간 불꽃으로 만들 셈이더냐?”

음산하지도, 역겹지도 않은 목소리의 검은 기운이 서서히 운집해 갈무리하자, 상상했던 모습과 판이한 형상이 묵청 배광을 그림자로 섬찟한 안광만 번뜩였다.

“어떤가? 내 모습이.”

드디어 실체를 드러낸 캐이런의 짤막한 물음이었다.

“음…. 다르오,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다? 그럼, 온갖 끔찍한 것들을 혼합한 괴물이었겠군. 분노와 저주, 절망과 악으로 발현된 염원의 결정체니까. 하지만 그따위 것을 묻는 게 아니야!”

“알고 있소!”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벅수의 묵계가 아니더냐? 태초 첫 인간의 염원이 희망이었기에 너희는 그들의 모습으로, 난 몸체가 없는 운명이 되었다. 그러나 저주와 악의 염원이 아무리 강해도 절대 너희 벅수의 인간 모습을 넘보지 않는다는 것, 이렇듯 나를 향한 염원이 비할 바 없음에도 묵계를 지켜왔는데, 오히려 갈수록 나약해지는 네가 깨려 하느냐?”

“그렇지 않소! 당신은 염원의 변질을 조장했소. 수만 년에 걸쳐 인간들의 사소한 다툼을 전쟁으로 부추겨 증오와 저주의 근원을 만들었잖소? 강해졌다고 했소? 아니! 조작된 염원이오. 벅수는 인간의 감정과 선, 악의 기준에 결코 관여해선 안 된다! 잊었소? 다툼은 감정을 변질시켜, 선과 악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오. 새끼를 위해 사냥한 늑대와 먹이가 된 어미 사슴, 무엇이 선이고 악이오? 자연의 순리 아니겠소? 벅수는 인간들의 순리 안에 있어야 함에도 개입해 방향을 틀었소. 또 하나! 당신은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단 것이오!”

“뭐라? 해서는 안 될 짓?”

“현재 모든 인간을 위협하는 K- 바이러스요! 오래전 이집트와 중세 유럽, 중국에 이르기까지 세 차례에 걸쳐 당신이 관여한 검은 질병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생명을 갉아먹는 병보다 왜곡된 저주와 증오가 서로를 할퀴던 암울한 시대. 그때가 당신의 조작된 염원이 무한정 축적된 시대였소, 그것도 모자라 지금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똑같은 짓을 벌이고 있잖소? 가장 조밀한 가족 관계마저 균열시키는 극히 비인간적인 세상. 부인해 보시오, 묵계를 지켰다고 자신해 보란 말이오! 어떤 개입 없이 순수한 인간의 감정이 동기된 염원의 진정한 벅수라고 말해 보란 말이오!”

벅수의 정체성을 상기하는 중에도 김준석의 소멸은 초침과 분침에 밀렸다, 오기를 아슬아슬하게 반복하고 있었다. -째깍, 째깍- -틱톡, 틱톡- 

“따라서 강한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일 뿐, 당신의 염원은 대부분이 거짓이오. 나는 기꺼이 묵계를 깰 것이오. 오랜 시대를 거쳐 농락당한 인간의 선과 희망을 위해 결단코 그렇게 할 것이오.”

확고한 결의를 단언한 그 순간, 김준석은 캐이런의 핏빛 안광 속 죽음의 그림자가 몸집을 키우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고작 한 인간 때문에 벅수가 소멸을 자처한다는 것이냐?” 

“위선 떨지 마시오! 저 아이는 지금껏 없었던 신성한 존재임을 알고 있잖소? 그게 당신이 지하의 염원들까지 소환하는 이유가 아니오? 그깟 한 아이를 위해? 아이의 탄생은 더는 희망과 선의 벅수가 필요 없는 세상을 의미하오. 차후의 염원들은 모두 저 아이로 귀결될 것이니, 소멸이 아니라 영원의 시작이오.”

“흐-으-으-으-으.”

그때, 동경 테두리 해골들의 귀곡성이 공간을 진동하는 동시에 캐이런의 검은 그림자가 나룻배 돛대 끝, 진홍색 핏물에 닿았던 부위부터 검붉은 채색으로 변화를 보였다. 때가 됐음이었을까? 밑널 공중에 정지한 그녀의 하복부에서 맑은 이슬이 떨어졌다.

“크크크! 어린 벅수 놈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어디 해 보거라! 그 시간으론 어림없음을 알고 있을 터, 자진한 벅수의 소멸은 후대 벅수의 맥을 끊는 것이니, 오히려 잘됐구나. 오늘로써 인간들에겐 저주와 절망, 악의 기운만 남게 되리라. 카-카-카!”

운무의 반쯤 검붉어진 캐이런의 목소리가 갑자기 괴기스럽게 바뀌었다. 그의 날숨 한줄기와 돌바닥을 쇠붙이로 긁는 금속성의 음성은 심장을 얼릴만한 지독한 한기였다. 김준석은 즉시 염원의 한 줌까지 연결한 전신 세포를 다졌다. 갈무리는 단 한 번의 기회로 소진될 것이다. 비록 시간은 비웃음처럼 가능성을 외면했으나, 캐이런이 간과한 점은 본질이었다. ‘희망’ 벅수의 시간은 본질인 희망을 절대 놓지 않는다는 것.

“우-우-웅!”

차갑고 흉악한 기류가 차원의 묵청 빙벽에 빠른 회전을 발생했다. 공기의 흐름은 원자핵을 축으로 한 전자처럼 일정한 궤도를 유지해, 점차 진공의 공간을 조성했다. 아기의 첫 숨인 울음이 터지는 순간, 검은 기운을 주입해 영혼을 파괴하려는 의도였다.      

   “끄-그-그-긍”

어둠보다 짙고, 용암보다 붉은 캐이런의 운무가 조금씩 제단을 넘어 퍼져갔다. 그의 그림자가 스친 백골은 달궈진 철판의 조개처럼 들썩거리다 떠 오르고, 공중의 동물 사체들은 조각조각 찢어져 타버린 볏짚처럼 밑널의 임신부에 쌓였다. 김준석은 지켜만 보고 있었다. 흡사 지옥 재현을 방불케 하는 장면은 자궁에서 탈출한 아기의 찰나를 잡기 위한 최종 단계였다. 캐이런의 기습은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벅수와 벅수는 상호 직접적인 해를 가할 수 없기에, 캐이런 역시 운집한 모든 기운을 출생 순간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만 년의 염원들이여! 깨어나 염원을 성취하라!”

캐이런의 우레와 같은 외침이 묵청의 빙벽을 뒤흔들자, 때마침 눈을 뜬 산모의 비명이 차원의 공간에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으-으-음-아-악!”

일순간 빙벽 안의 모든 것이 정지했다. 그리고 잠시 후, 미세한 균열 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툭! 툭! 툭! 빙벽 곳곳에 박혔던 푸른 얼음꽃이 은밀하게 터지고, 탯줄이 달린 빛나는 성체가 그녀의 눈물 젖은 동공에 담길 때, 기다렸다는 듯, 똬리처럼 응축했던 검붉은 기운이 용오름으로 크게 공간을 선회한 뒤, 캐이런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우-우-우-웅!”

“이로써 영원한 절망의 시대가 도래하였도다! 카!-카!-카!-카!”

저주의 일갈이었다. 검붉게 휘도는 주변 기운은 폭풍 속 바다의 소용돌이처럼 중심의 원이 형성되자, 아기의 머리를 직격 했다. 순식간에 붉어진 아기 얼굴. 그 순간, 땅속 심연에 침잠했던 저주와 절망의 염원들이 캐이런의 안광에서 들끓어 요동쳤다.

“꾸-우-웅!”

찰나를 쪼갠 찰나였다. 사악한 안광이 바위의 파열음으로 칠흑의 운무를 아기에게 몰아친 것은. 하지만 그만큼 빠르게 막아선 것은 김준석의 합장한 손등에서 쏘아진 백색 광선이었다.

“콰과광!”

캐이런의 검은빛이 아기의 코와 입에 닿기 직전에 충돌한 백과 흑의 파괴적인 광선은 강력한 회오리를 형성해 제단의 백골들을 투석기의 돌덩이로 만들었다. 사정없이 빙벽을 치고 도는 백골의 파편이 시퍼런 얼음꽃들과 반응해 차원을 급격히 냉각시킨 것도 동시였다.

“드드드! 드드!”

예사롭지 않았다. 얼음 결정이 떠다니는 차원의 허공은 그것들이 접촉하는 족족, 육각형 벌집 형태로 변환해 김준석의 한정된 에너지를 감소시키는 작용을 한 것이다. 

단 한 번의 기회마저 무산될 결정적 변수였다. 검붉은 에너지 홀 중심의 아기 얼굴에 안광이 쏘아지면 끝이었다. 우려했던 대로 급격한 기운 감소를 체감하는 그에게 설상가상, 부양을 멈춘 얼음꽃 결정들이 재결합해 푸른 빙벽을 짙게 세우며 좁혀왔다. 고갈 직전의 에너지마저 철저히 차단하겠다는 캐이런의 작정이었다. 

‘으. 으! 진정 무모했던 것이었을까?’ 

무의식 속에서 흐릿해지는 희망, 김준석이 본질을 부정하기 직전이었다.


   “누구도 천 년의 고통을 일시에 감당해 견딘 자는 없었다! 어리석지만 진심의 경의는 어쩔 수 없구나. 벅수 한(hann)! 그만, 당신목으로 돌아가거라!”

승리를 예단한 캐이런의 목소리는 자못 위로하는 듯이 부드럽게 울렸다. 그리고 이어진 째지는 기합이 응축한 먹빛 안광을 소용돌이 에너지 홀로 쾌속하게 쏘아졌다.

“쿠-구-구-구!”

“벅수의 영혼들이여!”

그때, 가슴을 뚫어 심장을 움켜쥔 김준석이 광기의 절규를 외치자, 피 분수로 손안에서 펄떡인 희망의 마지막 박동은 신비하게도 찬란한 금빛 고리 사슬이 되어 순간을 가르고 아기를 휘감아 절명의 먹빛 안광을 막아냈다.

“으-아아아!”

충돌한 캐이런의 기운을 어마어마한 충격파로 타격당한 김준석. 1분, 또 1분. 시간이 지날수록 거대한 기운의 충돌로 끊길 듯 요동치는 고리 사슬, 위태로움에 흔들리는 김준석의 불안한 눈빛. 소멸한 전대 벅수들이 당신목 줄기에 축적한 미래의 희망까지 끌어모아 다한 전력은, 갈수록 위력을 더하는 캐이런에게 역부족이란 실의가 꿈틀거렸다. 본질의 와해는 기운의 소진과 더불어 김준석의 발목부터 나무뿌리로 변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지극 간절한 희망의 결정체인 벅수의 절망은 존재의 부정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남은 것도, 남기지도 못하는구나.’

깊은 상심에 어느새 옹이처럼 굳은 무릎을 보는 그의 눈에는 안타까운 연민이 서렸다. 티끌의 희망도 남지 않을 암울한 시대에 갇힐 인간에 가진 쓸쓸한 애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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