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이지! 성스러운 빛이 된 그녀.
노을이 너그러운 청사포 등대 아래로 잔잔한 물결이 온순하게 밀려왔다.
빨간 등대의 예쁜 문 앞에서 폴짝폴짝 신난 갈색 푸들과 제 손의 과자를 갈매기가 낚아챌 때마다, 까르르 움츠렸다 뛰는 아이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에는 천사가 있었다.
“이지야! 넘어질라, 쫑이 발도 조심하고!”
자기를 부른 줄 알고 다가온 푸들이 긴 혀를 내밀고 꼬리를 살랑였다. 그녀는 그런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웃어주고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재밌어? 갈매기 안 무서워?”
“응! 쫑이가 있잖아.”
“그래? 갈매기가 훨씬 큰데?”
“히히! 그래도 쫑이가 있으면 괜찮아.”
아이는 남은 과자를 머리 위로 던졌다. 그러자 때마침 낮게 비행하던 갈매기가 멋지게 물고 날아올랐다.
“까르르!”
“와! 우리, 이지 잘 던지네?”
고작 제 앞으로 몇 발 짝이었지만, 앙증맞은 손이 활짝 펴진 것이 너무 귀여웠다.
“다 먹었다, 히히.”
“손에 남았는데? 그건 안 주고?”
“쫑이 거야.”
아이는 다른 손에 든 과자를 쪼그려 앉아 강아지에게 내밀었다.
“아이 예뻐, 쫑이 예뻐. 히히히.”
아이는 날름 과자를 삼킨 강아지의 얼굴을 당겨 뽀뽀하고는 안아 들었다.
“이모, 이제 삼촌 가자,”
“그래? 그럴까? 그럼, 우리 다 같이 삼촌한테 갈까?”
“응!”
그녀의 미소에 기분이 좋아진 아이는 뒤뚱뒤뚱 버거워 보였지만, 끝끝내 품에서 꼬리치는 쫑이를 안고 걸었다.
“삼촌 가자, 쫑이야. 히히.”
뒷좌석 안전 의자에서 연신 재잘거리는 아이와 이야기하며 달리던 차가 벚꽃 나무가 즐비한 달맞이 해안도로의 주택 정문으로 진입했다. 차 안을 확인한 경비원이 활짝 웃어 인사하고 냉큼 차단기를 올려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고맙습니다.”
어스름 와우산 자락의 고급 주택은 해운대 바다와 광안대교, 스카이라인의 축인 센텀시티 일품 경관을 조망하는 최적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와! 삼촌 회사다.”
의자를 들썩이는 엉덩이를 주체 못 한 아이가 벨트를 당기며 재촉하자, 열린 차 문으로 한 남자가 얼굴을 불쑥 디밀었다.
“이지. 반가워요!”
남자는 능숙하게 벨트 고리를 풀고 아이를 번쩍 안았다.
“멍! 멍!”
“그래, 그래. 쫑이야, 너도 반갑다. 하하!”
“차 팀장님,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이를 안고 주택의 자동문 앞에서 강아지와 함께 오는 그녀를 기다려주었다.
“차민주 팀장님 결혼식이 다 다음 주죠?”
“네, 대표님 기다리다가는 평생 혼자 살 것 같아서. 하하!”
그는 집 안에 내려준 이지가 강아지와 함께 뛰어가는 걸 보며 겸연쩍게 웃었다.
“그럼요, 있을 때 꼭 붙잡으셔야지, 너무 아름다운 분이잖아요. 외모도 뛰어나지만, 우선은, 무슨 말인지 아시죠? 호호!”
그들이 대화를 나누며 걷는 거실은 라운지에 가까웠다. 2, 3층의 복층은 각종 장비와 컴퓨터가 설치된 사무 공간이었고,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로 연결된 4층엔 대표실과 회의실이 있는 겉보기엔 주택이었지만, 상주 인원만 30명이 넘는 경호 전문 회사였다. 직원들이 익히 아는 이지와 쫑에겐 어느 곳도 제약 없는 공간이기도 했고, 특히, 이지를 대하는 그들의 마음가짐은 친절함을 넘은 경외심이었다.
“화상 미팅은 거의 끝났을 겁니다. 올라가시죠?”
차민주는 오주희를 안내하며 이지를 다정하게 불렀다.
“이지! 올라갈까요?”
“쫑! 가자, 가자.”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을 쪼르르 달려오는 아이와 강아지, 그 모습을 사랑스럽게 기다린 오주희가 아이를 안아 들자, 강아지가 그들 옆에 앉은 것을 확인한 차민주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른 뒤 손을 흔들었다.
“이따가 뵙겠습니다, 이지도 좀 이따 봐요!”
“주희 씨? 보름 정도 휴가 겸해서 이지와 같이 두바이 여행 어때요?”
“두바이요?”
“네, 잠시 전, 중동의 거점 본부를 그곳으로 확정했습니다. 한 3일 정도? 나머진 함께 보낼 수 있는데.”
“오..! 상길 씨 갈수록 대단해지네요? 이젠 중동까지 확장하고.”
“대단하긴요? 벅수께서 미리 안배해 놓으신 길을 따라갈 뿐인데. 다행히 나와 같은 사람을 그쪽에도 준비해 놓으신 덕분이죠. 이번 결정으로 전 세계 상시 분쟁지역에 우리 요원들을 배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멘,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또 어디였죠? 여하튼 대단하다는 말 밖에….”
“준비해야죠. 절대 선인 이지가 뜻을 펼칠 10살이 될 때까지 최대한 힘이 닿는 데로.”
루프톱 정원을 거니는 그들에게 푸른 바다의 삽상한 가을바람이 머리칼을 흩뜨렸다.
“믿고 있어요. 저 아이로 인해 아름다워질 세상도. 선생님의 말씀대로 더는 인류에게 벅수가 필요 없다는 것도요.”
그녀는 옥상 난간의 투명 강화유리를 짚고 해운대야경을 향한 이지의 뒷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곁엔 얌전히 엎드려 꼬리가 편안한 단짝이 있었다.
“ 오늘은 왠지 야경이 가슴을 시리게 하네요.”
팔짱을 낀 채 드므와 도드라진 성흔을 더듬는 그녀가 가벼운 숨을 뱉었다.
“이때쯤이었죠? 벌써 5년이 지났네요. 벅수께서 당신목의 일부로 돌아간 때가.”
“요즘 들어 그날을 자주 생각합니다. 9월9일, 광장시장에서 있었던.”
“캐이런이 또 나타날까요?”
그녀는 이지의 등 뒤 의자에 앉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글쎄요. 인간은 선과 악이 양립하는 존재하기에….”
“가끔, 아주 가끔만 돌아보면 되는데. 나의 행복이 다른 이의 고통으로 얻은 게 아닌지, 큰 희생이 아닌, 작은 보살핌으로, 그래서 조금씩 줄이고, 나눌 수 있다면.”
그녀의 낮은 읊조림이 쓸쓸하게 바람에 흩어질 순간, 갑자기 쫑을 안고 돌아선 이지가 한 손을 하늘로 향해 빛이 되었다.
“인간과 모든 생명의 선함을 일깨우려 내가 온 것이기에 반드시 그리될 것이다!”
다섯 살 여아의 웅장한 일갈은 천지 사방을 울리는 천둥으로, 광채의 찬란함은 도시의 야경을 한 점 별빛으로 전락시킨 성스러운 신광이었고, 비단 인간뿐이 아닌, 생명의 모든 종(種)을 아우른 거룩한 성녀였다. 그녀가 웃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