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이 넘어 보이는 장신의 체구에 안 맞게 쑥스러운 표정의 앳된 학생은 연신 몸을 굽신거리며 말했다.
"중개사님!
2년 후에 우리 윗집 501호 재계약 안 하게 좀 막아주세요.
제가 부탁드리고 학원 가려고 문 여시길 기다렸어요."
이 학생은 2달 전에도 찾아왔었다.
당시 퇴근 무렵에 창밖을 서성이던 학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문을 열고 들어왔다. 흔히 하는 말로 덩치만 어른이지 말투나 표정이나 태도는 순박한 학생 모습 그대로였다.
7살 때 엄마 손을 잡고 이 아파트로 이사 왔다. 그리고 13년을 넘게 살고 있는데 타 지역으로 전근을 가서 주말에만 귀가하시는 부친 때문에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2년 전 윗집에 새로 세입자가 바뀌면서 층간소음으로 인한 분쟁이 시작되었다. 재수생이라 밤늦게까지 공부하던 학생은 윗집의 소음을 견디다 못해 어느 밤 홀로 윗집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자 '너무 시끄럽다' '공부를 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고, 윗집 사람들은 '어린 녀석이 밤늦게 남의 집을 두드려서 무슨 소리를 하냐'고 화를 냈다. 현장에 있지 않아 모르겠지만 아마도 상대가 앳된 학생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챘을 테니 윗집에서 약간 겁을 주었던 모양이다. 혼내고 멱살도 잡히고 밤중에 주거침입으로 경찰에 고소하겠다고 으름장도 놓았던 듯하다.
집으로 돌아와 겁에 잔뜩 질려 밤을 새운 학생은 궁리 끝에 중개사무소로 찾아온 것이었다.
"한밤중에 문 두드렸다고 저를 경찰에 고소한대요. 혹시 오늘 경찰에서 연락 온 거 없나요?
부모님이 아시면 안 되는대요. 스트레스 받으시는대요"
학생은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안쓰러웠다.
윗집에서 혹시 아랫집 학생을 고소한다 해도 경찰이 부동산에 연락할 일은 없지만 혹시나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속을 태우며 궁여지책으로 찾아온 것이 중개사무소인 것 같았다.
"아빠는 주말에만 오시고요 엄마는 밤늦게 퇴근하면 피곤하신데 이런 이야기 우리 부모님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어휴... 학생은 겁에 질려 있었다.
수년 전 이맘때쯤 인근 아파트에서 층간소음 문제로 다툼이 있던 중에, 어느 날 조상묘에 벌초하고 돌아온 아랫층 남자가 낫을 들고 윗층으로 올라가 휘두른 사건이 있었다. TV 메인뉴스로도 방영될만한 쇼킹한 사건이었다. 공동주택은 어쩔 수 없이 층간소음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나, 각 세대별 반응 정도가 차이 나고 잦은 소음으로 분쟁이 생기다 보면 어느 순간 돌발사고로 이어질 수가 있어서 걱정이었다.
아랫층과 윗층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어느 정도의 소음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혈기왕성한 20살 학생의 안위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되도록 독서실이나 고시원에서 공부를 하고 윗집에는 혼자 올라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그러고 나서 2개월 후 학생이 다시 방문한 것이다.
"우리 윗집요 2년 되면 또 재계약을 한다면서요. 그때 재계약 안 하게 좀 해주세요. 그거 부탁드리려 왔어요. 재계약 안 하게 좀 해주세요"
윗집 재계약에 관한 걸 어찌 알았냐 했더니, 지난번에 올라가 말다툼을 할 때 윗집 사람이 은연중에 "아유 괜히 재계약했어. 그냥 다른 데로 이사 가버릴 걸."라고 투덜대는 소리를 놓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윗집은 그 사건 2개월쯤 전에 재계약을 한 상태였다.
그러나 과연 어린 학생답다. 재계약은 임대인과 임차인 쌍방이 합의해서 정할 일이지 중개사가 어떻게 계약을 못하게 할 수 있을까.
"제가요 이 사람들이 이사 오기 전에는 안 그랬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사 온 후로는 공부를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요. 제발 2년 후에 재계약 안 하게 해 주세요."
중개사가 답할 일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공인중개사법이 어쩌고 하며 사실대로 설명할 순 없었다.
"알았어요. 재계약 안 하게 해 볼게 그러니까 아무리 윗층이 거슬려도 밤중에 올라가지 마. 혹시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도 그냥 인사만 하고 시끄럽다든지 그런 말도 하지 마. 그런 건 어른들이 알아서 할 거야. 그리고 2년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지금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올해 수능 잘 봐서 기숙사 같은데 들어가면 되잖아. 시끄럽게 해도 네가 안 올라가면 윗집도 점점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소음을 줄이려고 노력할 거야. 알았지?"
학생은 머리를 긁적이며 알았다고 말했다. 창밖에서 또래 남학생이 빠끔히 내다보고 있어서 누구냐고 물었더니
"학원 친구예요. 학원 가는 길에 아줌마한테 꼭 부탁하고 가려고 같이 기다렸어요"
음료수 두병을 내주었더니 고맙다고 거듭 인사하며 나갔다. 문밖에서 친구한테 뭐라고 이야기하자 친구가 웃으며 어깨를 툭 쳐주었다. 아마도 부동산 아줌마가 윗집 재계약 안 하게 해 준다고 전한 듯했다.
다시 명랑한 표정으로 사라지는 두 남학생을 보며 마음이 찌끈해왔다.
층간소음에 대해서는 제삼자가 뭐라고 평가할 수가 없다. 윗집이 거슬릴 정도로 쿵쾅거리는 경우도 있고, 또 가끔은 윗집의 문제가 아닌 그 옆집이나 아랫집 등의 문제를 윗집의 소음으로 오인하는 경우도 있다. 또 간혹은 윗집은 정작 가벼운 생활소음 정도인데도 아랫집 당사자가 많이 예민한 데서 문제가 비롯되기도 한다.
소음문제로 중개사가 누군가의 재계약을 방해하고 막을 권리는 1도 없고 절대 그래서도 안되는데, 나는 거짓말을 했다. 흔히 말하는 질풍노도의 시기에다 재수로 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스무살의 마음을 다독여서 안심시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학생이 2년이 되기 전에 올해 꼭 수능을 잘 치러서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여 층간소음 문제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신나게 젊음을 즐길 수 있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