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 미안했다.
밤새 잠을 설치고 출근하자마자 어느 임차인에게 전화를 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최근 여러 가지 일들이 나름 잘 풀려 흡족한 상태였다.
그러나 행복을 만끽하고 싶은 틈 사이로 마음을 쑤셔대는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사무실에 한 번씩 들러서 전도지랑 빼빼로 과자를 가져다 놓고 가는 개척교회 신도들이 있었다.
한 곳에서 20년을 영업하다 보니 길 가다가도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더 많은 일상인데,
수줍은 모습으로 빼빼로를 놓고 가는 여성분이 왠지 낯이 익고 나를 잘 아는 듯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세를 계약해 준 임차인의 배우자였다.
그러다 몇 개월 전 갑자기 찾아와서 몇 가지 상담을 하더니 집을 사고 싶다고 했고,
성격상 강권하지 않는 스타일인데도 자꾸 찾아오더니 결국 매수를 결정했다.
계약을 하겠다고 하던 날도 나는 서두르지 말라며 집주인이 만기 때 전세금을 잘 빼줄 수 있는지 미리 동의받고 계약하라고 돌려보냈다.
그 집주인은 수년 전에 친구와 함께 와서 갭투자로 집을 매수하였는데 80대 노모 명의로 등기를 했었다.
임차인은 집주인과 몇 번 통화 후 걱정 없다며 매매계약을 체결했는데,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집주인이 잔금 날 전세금을 못 빼줬고 연락도 거부했다.
잔금 하루 전날 상황이 뭔가 안 좋다 싶어 신중히 고민하라고 했더니 임차인은
'그래도 집은 매수하겠다, 대출을 풀로 받아서 일단 월세라도 놓고 있다가 살고 있는 집 전세금을 반환받게 되면 그때 입주를 고민하겠다.'라고 했다. '다만 그러려면 매매잔금 중 3000만 원이 부족한데 돈 구할 곳이 없으니 중개사님이 좀 빌려달라....'
그런 무모한 대납은 안 하는데 가끔 나를 건드는 것은 '안타까움'이다.
결국 월세를 놓아서 보증금을 회수하기로 하고 대납을 해주었다.
대납을 해주면서 집주인한테 적극적으로 대시해서 일을 잘 해결하라고 구체적인 플랜을 짜주었는데도,
알아서 하겠다고 차일피일 미루더니.... 결국 2달 후 집주인이 파산신청을 했다는 통지가 날아왔다.
젊은 아들이 노모 명의로 집을 사서 중간에 전세가가 오르니 전세금을 최대치로 받아서 썼는데
그 후 다시 매매가, 전세가가 하락하니 모르쇠 하고 있다가 노모를 개인회생 파산신청 해버린 것이다.
'나쁜 놈! 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그럴거면 세입자가 다른 집을 못 사게 하고 그 집을 인수하도록 사전 조율을 했어야지'
임차인은 한번 들러서 간단히 소식을 전해주고 간 뒤에 연락이 없었고,
그즈음이 개인적 일로 바쁜 기간이라 나는 미처 그 집 일에 신경 못 쓰고 후딱 몇 개월이 지나갔다.
그러다 가족들과 외식을 하던 어느 날, 문득 그 임차인이 생각났다.
'어떻게 되었을까... 아 이제 보니 빨리 월세도 맞춰줘야 하는데 제대로 신경을 못 썼네...
임차인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새로 산 집은 세가 안 빠져서 대출 이자랑 관리비를 내느라 힘들 테고,
살고 있는 전셋집은 나쁜 집주인이 파산신청 해버려서 이중고에 시달릴 그 사정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런데 나는 내 일이 바쁘다고 그 사실을 까맣게 있고 정신없이 보내고 있었구나.
뜬눈으로 지새운 다음날 아침 일찍 출근하자마자 임차인에게 전화를 했다.
잘 지내느냐고...
나는 정말 미안했다.
그랬더니 파산 절차가 진행되고 있고 집주인을 전세사기로 엮을 수 있는지 경찰서도 다녀왔는데 별 소득이 없다는 것과 마지막으로 중개사님께 빌린 돈을 빨리 못 돌려드려서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말했다.
'다른 사람 생각은 마라.. 내가 여러 가지 일로 바빠서 고통을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다.
집주인 놈(?)은 명의신탁에 관련한 내용으로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한번 방법을 찾아보겠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나는 어느 에세이 글귀를 풀었다.
'인생에는 사계절이 있는데 딱 지금이 1월이 되었다고 생각해라.
모든 것이 답답하고 암담해 보이지만 얼음이 녹으려고,
그래서 어디선가 꽃이 피려고 마지막 추위가 몰아치는 거다 생각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당신한테 이런 말 하는 게 좀 어불성설일 수도 있지만,
중개업을 오래 하다 보니 사람 사는 모습이랑 우연과 필연의 차이가 보이더라.
앞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릴 테니 힘내라'
하고 끊었다.
사실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다.
오늘 최고로 즐거운 일이 생겼다고 항상 그 상태가 유지되는 것은 아니고,
오늘 행복한 우리도 어제까지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개업 22년 차 어느 날,
중개를 완성하고 끝낸 계약 건에 대한 무한한 참견과 적극적 개입을 선언하는 일탈을 하였지만,
그나마 그런 일탈도 내가 중개사니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려 한다.
전화를 끊고 나니 5분쯤 후에 임차인의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나로 인해 잠시나마 그들이 편안해지길...
그리고 그들로 인해 나도 행복한 중개업을 이어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