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없어요!
아파트를 사서 입주한 손님이, 좋은 집을 사줘서 고맙다며 단감 한 박스를 놓고 갔다.
내가 좋아하는 단감, 가족들과 함께 먹어야지 하고 박스를 챙겨 들고 막 퇴근하려던 찰나,
젊은 여성이 빼꼼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아주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내가 아파트 뒤쪽 빌라에 월세 계약을 해줘서 4년째 살고 있다고 했다.
언제부터인가 계약서를 들춰보지 않으면 그 사람이 그 사람 같고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테이블에 앉은 그녀는 월세 부담이 너무 커서 집을 옮기고 싶다며,
전세대출은 어떻게 받는지, 얼마만큼 가능한지를 물었다.
나는, 신용도와 소득에 따라 대출 한도가 달라지는데 최대 80%선까지 가능하다는 것.
특히 주택도시기금을 통해 청년들의 주거 안정을 돕고자 청년 버팀목전세자금대출을 운영하고 있는데,
높은 이자 부담이 없어서 좋다는 것. 만 19세 이상부터 만 34세 이하의 무주택 세대주가 3억 원 이하의 주택 전세를 계약할 시에 최대 2억 원까지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런데 설명이 구체화될수록 그녀의 표정이 침울해지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이를 어이할꼬....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길래 이 밤에 찾아와서 울기까지 하는 걸까.
월세 부담 때문에 전세를 생각했는데, 혹시 전세대출 조건에 해당이 안 되어서 비관적인 마음이 든 것일까?
중개업을 하며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다 보면 소설 같은 일들도 발생하고
세상에는 우리 생각대로, 상식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들도 많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휴지로 눈물 콧물을 찍어내던 그녀가, 다소 멘붕이 되어 입을 다문 내게 말했다..
"제가… 너무 모르는 게 많아서요…"
내가 너무 자세히 설명했나? 그래서 전세대출이 복잡하게 느껴져서 답답한가?
하지만 전세대출 모른다고 울 필요까지 있었을까..
온갖 생각이 들썩이는 중에도, 별일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싶어 다독이듯 말했다.
"남편 분하고 잘 상의해서 결정하세요."”
순간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녀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래서...
당황하여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 그래서 이사를 생각하는 거고, 그래서 갑자기 슬퍼진 거구나.
외모로 보아 나이가 많아 봐야 서른 초반쯤 되어 보이는데 혼자라니...
생각 없이 괜한 말을 꺼내 상처를 준 것 같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4년 전 계약할 때는 어땠지? 딱히 기억은 안 나지만 이 여성이 직접 계약했다면 대화를 이어가면서 어느 정도는 생각이 날 텐데 낯선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때는 남편 명의였던 것 같은데.. 4년을 거주하는 동안 안 좋은 일이 생겨서 혼자가 된 것일까.
나는 사무실을 방문하는 의뢰인들에게 종종 감정이입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생로병사에 관한 것, 성실히 사는 데도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못하는 상황, 난감한 가정환경 등등을 공유하게 되면 마치 인생의 상담사나 되는 듯 같이 웃고 같이 울기를 반복한다.
마찬가지로 내 머릿속에는 이미 그녀의 인생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파노라마를 그리고 있었다.
아 역시 나는 입조심해야 해.
그냥 잘 생각해 보라고 했으면 될 것을,
하필 남편 이야기를 꺼내서 이 밤에 젊은 여성이 눈물 찍게 만들었을까..
괜히 마음이 쓰였다.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다 탁자 위에 올려진 단감 박스에 멈췄다.
"힘내요. 살다 보면 힘들 때도 있어요.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오세요.
혼자 밥 먹기 그럴 땐 와요. 맛있는 거 사줄게"
그리고 낮에 선물 받은 단감박스를 낑낑대며 들어서 건네자, 그녀가 손사래를 쳤다.
"어머 늦은 시간에 상담도 해주셨는데 이런 것까지 받기 죄송해요…"
아니라고 괜찮다고 그러니 울지 말고 힘내라고,
나는 그녀의 품에 억지로 단감박스를 안겼다.
언제 울었냐 싶게 만면에 웃음을 띤 그녀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그녀의 주머니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재빨리 전화기를 받아 든 그녀의 목소리.
"자기 왔어? 나 지금 부동산이야. 금방 갈게."
그녀의 얼굴이 순간 밝아졌다.
"신랑 퇴근했나 봐요. 야근한다더니… 신랑이랑 상의해 보고 다시 올게요."
그리고는 다시 단감박스를 품에 안고 경쾌한 표정으로 문을 나섰다.
나는 그녀가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 순간부터 한동안 얼음처럼 굳어 서 있었다.
-남편이 없어요.
-신랑 퇴근했나 봐요... 야근한다더니...
음... 남편이 없긴 없었다. 야근하느라 집에는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울음 섞인 한마디를 듣고 나는 혼자 드라마를 써버린 것이다.
왜 울기까지 하는지, 전세 대출의 어떤 부분이 어렵고 힘들게 하는지,
정확하게 묻고 확인했으면 될 것을....
어쨌건 내 잘못된 판단이었지만, 먹어보지도 못한 단감이 많이 아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