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내규가 주택임대차보호법의 상위법?
4년 전, 한 아파트 전세계약을 중개했다.
2년 후 임차인은 계약갱신요구권을 행사했고, 다시 2년이 흘렀다.
만기가 다가오던 3개월 전쯤, 임대인이 전화를 했다.
"만기 곧 다가오잖아요. 세입자한테 계속 살 건지 나갈 건지 미리 물어봐 주세요.
더 살겠다면 전세금은 조금 올리고 싶어요. 못 올려준다면 그냥 내보내고 팔까 해요."
나는 곧바로 임차인에게 연락했다.
임차인은 이사 계획이 없다고 했다. 계속 살고 싶다고 했다. 다만 전세금 인상은 어렵고,
가능하다면 같은 조건으로 연장하고 싶다고 했다.
이 집은 그동안 거래 이력이 여러 번 있었고, 임대인과도 신뢰가 어느 정도 쌓여 있었다.
나는 임차인을 위해 임대인을 설득했다. 결국 동일 조건으로 2년 더 연장하는 쪽으로 합의가 되었다.
그러자 임대인이 말했다.
"합의됐으면 계약서는 다시 써야 하지 않겠어요? 시간 잡아 주세요."
나는 '동일 조건 연장 계약은 계약서를 다시 쓸 필요가 없지만, 임차인에게 전달은 하겠다'라고 답한 후,
임차인에게 마지막으로 전화했다.
"집주인께서는 계약서를 새로 쓰고 싶어 하세요.
그런데 동일 조건으로 연장하는 경우에는 꼭 계약서를 다시 쓰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전세대출을 받으셨지요? 요즘은 대출 연장 때문에 재계약서를 다시 써오라는 은행도 많으니,
은행에 먼저 확인해 보시고 연락 주세요."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나는 '은행에서 재계약서가 필요 없다고 했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임대인에게도 계약서 재작성 없이 연장되는 것으로 알고 계시라고 전했다
그런데 문제는 세 달 뒤에 터졌다.
계약만기일은 2월 26일이 지난 3월 중순 어느 날 아침, 임차인에게 다급한 전화가 왔다.
"은행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재계약서를 다시 써오래요.
그런데 현재 시세가 내렸으니까 전세금을 3천만 원 낮춰서 써오라고 해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분명히 세 달 전에 확인하라고 했는데 연락 없다가 계약만기일까지 다 지나간 뒤에
감액한 재계약서를 제출하라고?
나는 임차인에게 되물었다.
"그때 은행에 확인 안 하셨어요?"
임차인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중개사님 말씀 듣고 바로 전화했어요.
그랬더니 은행에서 아직 시간 있으니 나중에 연락 주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기다렸는데 오늘 아침에 갑자기 연락 와서는, 3천만 원 내린 계약서를 다음 주까지 제출하래요.
안 그러면 전세대출금을 회수할 수도 있다고요."
기가 막혔다. 나는 즉시 임대인에게 전달했다.
예상대로 임대인은 노발대발했다.
"나는 원래 전세금 올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중개사님이 그냥 같은 조건으로 더 살게 해주자고 해서 참은 거예요.
그런데 이제 와서 오히려 3천만 원을 깎아달라고요?
그럴 거면 미리 말했어야지요. 당장 나가라고 하세요!"
한번 분쟁이 시작되면 그날 하루는 그냥 끝난다.
전화가 하루 종일 울린다.
아무리 설명해도 같은 말이 반복되고, 아무리 중간에서 조율해도 감정은 쌓인다.
밥 먹을 시간도 놓친 채 전화기만 붙들게 된다.
그런데 이번 일은 오히려 내가 더 기가 막혔다.
임대인 입장도 당연히 이해되었고, 임차인 사정은 딱했다.
가장 이해가 안 되는 쪽은 은행 측이었다.
임차인이 중간에서 너무 난처해하길래, 나는 차라리 내 번호를 주고 은행 담당자와 직접 통화하게 하라고 했다.
잠시 후 은행 차장에게 전화가 왔다.
"뭐가 문제죠? 왜 전화하라고 하셨어요?"
나는 바로 물었다.
"전세 만기일이 지난 후에야 보증금을 감액한 재계약서를 써오라고 하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러자 은행 측은 뜻밖의 말을 했다.
"만기는 다음 주인 3월 26일이잖아요.
그때까지 3천만 원 낮춘 재계약서를 제출하셔야 합니다."
순간 더 어이가 없었다.
"계약 만기일은 2월 26일입니다. 계약서 안 보셨어요?
3월 26일이 만기라니요. 그건 무슨 기준입니까"
그러자 은행 차장이 말했다.
"우리는 채권양도 방식이라 전세 만기일로부터 1개월 후를 기준으로 봅니다."
나는 바로 말했다.
"그건 보증사고일 개념 아닙니까?
전세 계약서 상 만기일하고, 보증보험에서 말하는 보증사고일은 다르지요!"
실제로 HUG 전세보증금반환보증은 전세계약이 종료된 뒤에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면 계약 만기 1개월 후를 보증사고일로 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증이행 청구 기준이지, 전세계약서에 적힌 계약 만기일 자체를 바꾸는 규정은 아닙니다."
그런데 은행 차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은행 내규가 그렇습니다."
"은행 내규가 그렇게 되어 있다 해도, 그 내규가 전세계약서상의 만기일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임대차 종료와 갱신의 기준 시점을 정하고 있고, 임대인이나 임차인이 갱신 여부나 조건 변경을 논의해야 하는 시기도 정해져 있습니다.
보증사고일은 보험사나 보증기관이 보증이행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기준일일 뿐이지,
그 날짜에 맞춰 임대차 만기일이 자동으로 연장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걸 혼동해서, 이미 만기가 지난 뒤에 감액 계약서를 다시 쓰라고 하는 건 말이 안됩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여전히 반복적이었다.
"우리 은행은 내규가 우선입니다."
은행 내규가 언제부터 주택임대차보호법의 상위 규범이 되었나.
내규는 말 그대로 내부 기준이다.
그 기준은 은행 직원들이 업무를 처리할 때 참고하는 것이지,
이미 성립한 임대차계약의 만기일을 바꾸거나, 특별법이 정한 갱신 구조를 뒤흔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런 내규가 있더라도 계약서상의 만기 2개월 전에,
임대인과 임차인이 갱신합의를 할 수 있는 기간 내에 미리 안내했어야 맞다.
나는 마지막으로 분명히 말했다.
"은행 내규는 차장님이 지키세요.
저는 주택임대차보호법과 실제 임대차 계약에 따라 처리하겠습니다.
이 건은 만기 2개월 전 이미 동일 조건으로 연장 합의가 이루어졌고, 그 뒤 만기일까지 아무 문제 제기 없이 지나갔습니다. 이제 와서 보증사고일을 들이밀며 감액 계약서를 요구하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은행 차장은 더 이상 강하게 말하지 못했다.
통화는 우물쭈물 끝났다.
하지만 현실은 늘 법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가운데 낀 채로 전세대출 연장이 막혀서 이사 나가야 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을 임차인의 상황이 안타까워
어렵사리 임대인을 설득했다. 다행히 임대인은 어렵게 3천만 원을 마련해 임차인에게 반환했고, 감액한 계약서를 작성해 은행에 제출했다.
그렇게 시끄럽던 1주일이 지나갔다.
일은 일단락되었지만, 내 마음속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은행마다 내규가 다를 텐데,
그렇다면 임대차계약의 만기 기준도 은행마다 달라져야 하는가.
A은행 대출을 받으면 만기일이 다르고,
B은행 대출을 받으면 갱신 기준이 또 달라지고,
C은행에서는 보증사고일을 계약 만기처럼 취급해도 되는가.
전세계약의 만기일은 계약서와 법이 정하는 것이지,
은행 내규가 새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보증사고일은 보증사고일이고, 계약만기일은 계약만기일이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한 채 은행 실무 편의를 위해 계약의 구조를 비틀기 시작하면,
결국 그 피해는 임대인과 임차인, 그리고 현장에서 분쟁을 수습해야 하는 중개사에게 돌아온다.
내규는 법 위에 설 수 없다.
만약 모든 은행이 비슷한 방식으로 이 문제를 처리하고 있다면,
바뀌어야 할 것은 임대차계약서도 아니고 주택임대차보호법도 아니다.
은행 내규다.
은행 내규는, 대한민국 특별법인 주택임대차보호법에 맞춰 조정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