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명절 귀향을 하다 몇 년 전 일이 떠올랐다.
당시 명절 연휴 시작 일에, 남편이 "안 막힐 때 가자"고 새벽에 깨웠다.
눈이 많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기다리실 부모님을 생각하면 귀성 차량이 뜸한 새벽에 서두르는 게 맞는 선택 같았다.
동도 트기 전 시간이지만 눈발이 온 세상을 덮어 칠흑 같은 도로였다.
가로등도 드문 산길을 달리는데, 눈은 몇십 센티씩 쌓여 있었다.
아직 아무도 지나지 않은 소복한 눈길 위를 차는 조심스럽게 기어가듯 움직였다.
이런 풍경은 또 처음이었다.
제 아무리 순백의 하얀 눈도 빛을 만나지 못하니 그저 칠흑의 어둠에 동조하여 세상을 더 까맣게 덮을 뿐이었다. 새벽 눈발이 만든 어둠과 정적. 이러다 뉴스에 나오는 거 아닐까.
"귀성길 폭설, 차량 고립"
그 자막 아래 우리 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며 왠지 긴장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러다 피곤을 못 이겨 잠깐 눈을 붙였는데
남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어라? 고요 속에 진심. 새해가 시작되는 의미 있는 시간대에,아무리 내가 잠든 사이라도 저런 말을 던지다니....
당신만 바꾸고 싶냐고.. 나도 오래전부터 바꾸고 싶었다고...
그런데 남편은 의외로 내 말을 덤덤히 받아들였다.
헐. 웬 근거 없는 자만심.
속이 묘하게 일렁였다. 원래 그런 말은 농담처럼 툭 던져도 그 안에 조금은 진심이 섞이는 법 아닌가.
졸음이 비켜나간 눈으로 다시 바라보는 창밖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설경이었다.
그 사이에도 눈은 그칠 줄 모르고 쏟아졌다. 어둠과 눈발 속에서 나는 별별 상상을 다했다.
복수를 할까, 무시를 할까
그때 차가 모퉁이를 돌아가니 어둠 속 전방에 갑자기 나타난 승용차 한 대가 한적한 도로 위를 빙그르르 돌았다. 혹시 충돌 사고가 날까 염려된 남편이 잽싸게 운전대를 틀어 갓길에 차를 세웠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휴… 부부싸움이고 뭐고.... 일단 살아야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와중에도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따지고 있었다.
'집에 도착만 해봐라. 눈길이라 그냥 넘어가는 거다'
혼자 실룩실룩 투덜거리다 지쳐 다시 졸음이 눈꺼풀을 덮는 그 순간, 남편이 전면 유리 와이퍼를 작동시키며 말했다.
.......
순간 여태껏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모든 드라마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나는 그 짧은 순간 이미 수십 번의 인생 터널을 넘나들었는데,
그는 한결같이 정면 차창 와이퍼의 낡은 고무날만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런 나만의 이해? 오해가 다반사였을 것 같다.
우리는 상대방의 언어를 늘 우리가 받아들이는 그 순간의 기분 상태, 해석된 언어로 이해한다.
그러다 보면 유리창 위 눈발처럼, 무뎌진 와이퍼가 미처 닦아내지 못한 찌꺼기들이 남기 마련이다.
처음엔 잘 보이지 않는다.
남편의 평가도 그렇게 들렸다.
그는 평소 내 차를 이용하며 느낀 대로 판단한 것인데 나는 그것 역시 내식대로 해석하여 자만으로 번역했다.
관계는 종종 이렇게 흐트러진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어느덧 흐려진 시야를 닦아내는 성능 좋은 와이퍼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남편 차의 와이퍼 덕분에 유리창은 조금씩 맑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