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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May 23. 2021

그녀는 요구르트 배달과 계단청소가 너무 좋다고 했다


다소곳이 문을 열고 들어온  여성이  있었다.
나를 보는 눈빛이 왠지 다감하길래,  한 번 다녀갔던 사람이구나 싶은데 딱히 기억이 안 났다.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어두웠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저기... 상가주택 말고 다른 데 나온 건 없나요? "


그제야 알았다.
아... 지난주 목요일 저녁에 남편이랑 어린아이들 셋이 우르르 와서 상가주택 월세 본 사람이구나...






사무실 맞은편 상가주택 2층 쓰리룸이 월세로 접수됐다.  신축한 지 오래되지 않아 깨끗하고 넓어서 금방 계약되지 싶었다.

마침 오후 3시경에 월세 매물을 찾는 여성의 전화가 걸려와 브리핑했더니 남편이 퇴근하면 함께 방문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계약건으로 좀 분주했던 어스름한 시각에  왁자지껄 소리가 나더니,  30대 후반쯤 돼 보이는 여성이 "낮에 전화했었는데요 월세.." 라며 들어왔다.

뒤이어 강호동 닮은 큰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그리고 유치원생 아들, 또 다섯 살짜리 어린 딸이  우르르 따라 들어왔다.

"아이구~ 다 들어오셨나요? 끝이 없네요? "

나는 갑자기 즐거워져서 농담까지 했다.
모두 함께 왁자하게 웃으니, 어둠에 묻혀 다소 가라앉던 저녁이 유쾌해졌다. 키가 훌쩍 크고 어깨가 넓었던 아빠와 여리지만 밝은 표정의 예쁜 엄마, 그리고 개구진 세 아이들은 마냥 행복해 보였다.

현재는 빌라 3층에 살고 있는데 한창 뛰는 아이들 때문에  층간소음 걱정 없는 1층을 찾고 있다고 했다. 상가주택은 아래층이 식당이라 층간소음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아이들은 부러 더 쿵쿵거리며  뛰어다니다 까르르 웃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부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저절로 묻어나는 행복을 감추지 못했다. 집을 둘러보고 내려오다  다섯 살짜리 막내딸이 너무 가냘파서 한번 안아주었던 기억이 난다.

주택에서 내려와 주변까지 둘러본 남편이 맘에 든다고 계약하고 가자는 걸, 여성이 심야전기인 게 좀 걸린다며 하룻밤만 더 생각해보자 했다. '하룻밤만 더 생각해보고 연락드리겠다,  늦게까지 좋은 집 보여줘서 고맙다'고 두세 번이나 인사를 하고 가던 젊은 엄마는 보기 드물게 싹싹하고 예의 발랐다.

다음 날, 상가주택 임대인이 도시가스를  연결해줄 계획이 있다고 하자  그걸 전해주려고 전화했더니 여성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음에 전화드리겠다'며  끊었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나 방문한 것인데... 그렇게 인상 깊었던 가족을 단지 며칠 지났을 뿐인데도 못 알아본 건.. 아마도 묘하게 달라진 분위기 때문인 듯했다.

"다른 주택은 조건에 맞는 게 없어요. 남편분도 상가주택을 마음에 들어했고 도시가스 설치해준다 하니  월세를 좀 깎아볼까요?"  


라고 물었더니 여자가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자꾸 좀 더 작은 평수가 없느냐고  묻길래,  애가 셋인데 너무 좁으면 안 되지 않느냐 방이 3개는 돼야 하지 않느냐 했더니...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안 했다.

이상하다.  왜 그날이랑 다르지?

"그런데 왜 이렇게 가라앉았어요?
지난번 왔을 때랑 분위기가 다르네?"


라고 물었더니 왈칵 눈물을 쏟았다.

집 보고 간 다음날 남편이 출근길에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단다.  쉴새없이 까르르 웃어대는 어린 아이들 셋을 두고...

그래서 남편하고 같이 둘러본 집들로는 이사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넓어서 사람의 빈자리가 그리워지는 그런 집 말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누군가를 찾게 되지 않을 만큼  비좁은 집을... 찾고 있었다.

아직 며칠 되지 않아 정신없을 텐데 왜 벌써 집을 구하러 다니느냐 했더니, 사는 집이 팔려서 이사를 나가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아직은 너무나 젊은 엄마가 말했다.

전날까지 산산하던 날씨가 갑자기 몸에서 땀을 뽑아내며  변덕을 부리던 날이었는데,  그녀와 마주 앉은 내 몸에선  난데없이 소름이 돋았다.






인생이라는  건 정말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미약하기 짝이 없다.

누가 행복하건 슬프건,
누가 태어났건 죽었건, 똑같은 속도로 세월은 흐른다. 우리 삶의 변화와 상관없이 섭섭할 정도로 세월은 냉정하게 흘러간다. 

이 가족은 방 두 칸짜리 좁은 집을 얻어 월세로 살다가, 1년 후  한부모 가족으로  LH 전세임대 지원(한국 토지주택공사에서 일정 조건에 해당하는 국민에게 주택 임대 지원을 해주는 복지 제도)을 받게 되었다.


가냘픈 막내딸이 마음에 걸려 조금이라도 도와주려고 이리저리 알아봐주느라 나름 애를 썼는데,  1년 만에 다시 만난 젊은 엄마는 다른 사람으로 보일만큼 생기발랄해져 있었다. 얼굴이 좋아졌다, 예뻐진 것 같다고 했더니 요구르트 배달 일을 시작하고서  살도 빠지고 건강해진 것 같다고 밝게 웃었다.

"요구르트 배달 일이 참 좋은 것 같아요~"


아이가 어리다 보니 누구한테 맡기고 직장에 매달릴 여건이 안돼 요구르트 배달일을 시작했더니 건강도 좋아졌다고 무한 긍정 의지를 드러냈다.

다시 1년 후 ATM 인출기 앞에서 우연히 만났다. 여전히 밝고 예쁜 그녀는 말했다.

"혹시 계단청소 할 사람 구하는 데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요구르트 배달일이 갈수록 줄어서 빌라 계단 청소일로 바꿨더니 참 좋아요~"

라고 했다. 아이들이 좀 더 클 때까지는 집 가까운 곳에서 타임에 구애받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데 빌라 계단 청소가 너무 좋더라 했다. 그녀에겐 모든 일이 다 좋은 것 같았다. 요구르트 배달 일이건 빌라 계단 청소건,,,아이들과 함께 먹고 살 생활비만 벌 수 있다면...


사람은 다 이렇게 살아간다.
세상이 끝나는 슬픔에 처한 듯해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잊혀진다. 잊어야만 살 수 있기도 하다. 기억력이 너무 좋아서 한번 먹었던 마음, 경황 없이 닥친 슬픔, 되새기고 싶지 않은 아픔 등등을 그대로 기억해야 한다면  그것도 참 끔찍한 일이다.

나는 나보다 한참 어리지만, 참 멋지고 훌륭한 여성을 만났다. 어린 세아이를 남겨두고 불의의 사고로 남편이 떠나가자 세상이 끝난 것 같은 표정을 짓던 그녀가,  불과 1년 후 요구르트 배달일이 너무 좋다고 밝게 웃었다.  

그러다 요구르트 배달 일이 줄어  빌라 계단 청소를 하게 된 그녀가,  빌라 계단 청소일이 너무 좋은 것 같다고 세상 밝게 웃었다.

누군가 안돼 보인다고, 불쌍하다고, 어찌 살려나~ 남 걱정할 필요 없다. 멋지고 강한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긍정적으로 잘 살아간다.

남들은 다 그렇게 잘 살고 있다
그러니 슬픈 일, 어려운 일을 당한 누군가가 어떻게 살아가려나 걱정 말고 나만 잘하면 된다. 각자  어떤 난관에 닥쳐도 밝게 웃으며 씩씩하게 잘 살아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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