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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Jun 23. 2021

내가 과부상이란다

과부상 명희손(명예훼손) 사건

친정엄마가  낮부터 여러 차례 전화를 하여 "너 혼자만 있을 때 통화 좀 하자"고 했다. 김서방도 없고 옆에 직원이나 손님도 없고  꼭 꼭 혼자만 있을 때 통화 좀 하자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거지?



몸이 안 좋으신가 아님 올케랑 무슨 일이 있었나..



드디어 저녁 때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전화를 했더니 엄마가 던진 첫마디가


내가 과부상이란다!



"나주댁이 오늘 점심때 와서는 저 길 건너 점쟁이가 나더러 과부상이라고 했다드라"



나주댁은 나도 안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랑 형님 동생 하던 꽤 가까운 인척이다.  내 어린 기억에는 별로 달가운 분은 아니었다. 뭐랄까.. 같은 이야기라도 한 번도 좋게, 긍정적으로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모르겠지만 특히나 엄마와의 관계에서는 그랬다.


엄마는 젊어서는 늘씬하고 옷태가 고운 분이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이쁘다 곱다 라고 하면  나주댁 아줌마가 어디선가 튀어나와  꼭 한마디씩을 했다.  "여자는 아담해야 이뻐.  형님은 키가 커서 글렀어."... 라거나  "이목구비가 커서 나중에 팍 나이 들어 보일겨" 라거나.. 한마디로  '다 된 밥에 초치기' 당번이었다.



우리들이 시집 장가 간 뒤에도  늘 부정적인 이야기를 해댔다. 엄마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항상 기가 죽었다.


오빠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동차 부품업을 시작하자  "형님은 아들 농사는 잘못 지었어. 사업하는 자식 있으면 평생 고생이여" 했다가 오빠 특유의 성실함과 영업력으로  튼튼히 기반을 잡고 건물을 새로 올리게 되자  "아이고 대출까지 끼고 건물을 지어서 뭐해. 은행 좋은 일만 시키지. 거기 위치도 안 좋아" 등등. 한번도 좋은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성인이 돼가면서 나주댁이 별로 안 좋았다. 부정적인 사람이 옆에 있으면 함께 부정적이 돼가기 마련이니까.



불과 며칠 전에는  또 나를 속상하게 했다.


"셋째 딸은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잘하더니  왜 고작 부동산을 하고 있어. 여자들은 부동산 해도 돈 못 벌어. 형님이 잘못 키웠어. 공무원 시험을 보게 했어야지."


라고 했단다. 그 밤에 엄마는 전화를 해서 한숨을 푹푹 쉬며 부동산이 그렇게 힘드냐? 며 한 걱정을 하셨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이고 나주댁 아줌마는  연세 드셔도 여전하시네' 했는데 , 이젠 엄마한테 과부상이라는 말까지 하다니



"속상해 죽겠다. 왜 점쟁이랑 남의 이야기를 해서 과부상이니 뭐니 그런다냐. 내가 그놈의 점쟁이 가만 안 둔다고 난리쳤더니  없는 말 한 것도 아닌데 뭘 그러냐고 외려 큰소리다."



난데없이 남의 집에 불을 지르고 연이어 부채질까지 해대는 형색이다. 엄마는 화나서 '그놈의 점쟁이'한테 전화로 따졌다. 언제 봤다고 과부상이니 뭐니 하냐고 사기로 고소하겠다고 난리를 쳤더니,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발뺌을 하더란다.



과부상이라... 결혼해서 남자를 비명에 보내는 팔자 센 관상을 일컫는다. 유명 관상학자들은  영국 다이애나비와 미국 영부인 힐러리를 대표적인 과부상 인물로 뽑기도 했다. 그런데 같은 과부상을 가졌지만 두사람의 운명은 달랐다. 다이애나비는 비명횡사했지만,  힐러리는 남편을 대통령에 당선시키고 르윈스키 사건으로부터 보호했다.  



그러니 설사 과부상 관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누군가의 인생을 예단하거나 저울질해서는 안된다.  '과부상' 이라는 것은, 집안의 길흉화복이나 남편의 생명력까지 여자의 팔자 탓으로 뒤집어씌우는 일종의  여성비하 프레임이다.  남자 잡아먹을 '과부상'이라고는 해도, 여자 잡는  '홀아비상'이라는 표현은 쉽게 쓰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관상학이 어느 정도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손 치더라도  '절대적인 과학'은 아니니,  섣불리 누구한테 대놓고 꺼낼 말은 아니다. 더구나 40대 후반에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보내고  홀로  5남매를 키워온 80대 중반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하다니...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땐 졸지에 아버지 없는 딸이 된다는 것만 너무 억울해서 엄마의 처지를 가늠하지 못했다. 사실 30여 년 전 그 시기에는 40대 후반 아줌마는 '여자'가 아니라 그냥 아줌마에 불과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가끔 내 나이의 어느 시기쯤에  그 상황을 겪었을 엄마를 생각하게 됐다.  


48세의 어느 날에는..."아 엄마가 이때 혼자가 되셨구나" 생각하니 새삼스레 가슴이 아팠다. 어렸을 땐 엄마의 아득하고 험난한 인생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는데,  내가 그 나이가 되어보니  그제야  그 나이에 남편 잃고 혼자된다면 얼마나 암담하고 불행할 것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키워주신 것에 나날이 감사하고 있었는데,  그런 우리 엄마가 80대 중반의 어느 날  얼굴이 과부상이어서 남편을 비명에 보낸 팔자 센 여자 취급을 받아야 하다니...



속상해서 밥도 안 먹고 대낮부터 자리 펴고 누운 엄마는, 차마 어디에 꺼내놓을 수도 없는 내용이라서 누구한테 말도 못 하고 만만한 막내딸과 통화할 시간만 손꼽아 기다리셨다고 한다.



"너는 똑똑해서 법을  잘 알 거 아니냐. 그러니까 내가 그 점쟁이랑 나주댁을 사기로 고발하겠다는 것이 맞는 소리냐?"



"아니야 엄마.  사기는 그 사람들이 엄마를 속였을 때, 속여서 이득을 얻었을 때 해당되는 거야. 이럴 때는 "명예훼손죄로 고발한다"라고 해야 해. 왜 정말 고소하시게?"



"아니. 남사시럽게 어떻게 고발한다니. 두 번 다시 그런 소리 못 떠들게 단단히  겁을 주려고 그러지. 그러니깐 명희손으로 고소한다! 고 하면 되네?"


아니 명 예 훼 손!


아~ 명희손!


내가 아무리 딸이라도, 졸지로 남편을 먼저 보낸 팔자 센 여자로 둔갑시킨  "과부상" 사건에 처한 엄마의 심정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지난 시절 크고 작은 전쟁과 경제적 빈곤으로 남편이나 자식을 비명에 보낸 여인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함께 따라 죽고 싶어도 어린 자식들을 건사해야 한다는 숙명적인 책임감으로 굳세게 살아왔던  그녀들의 인생을 그저 "이 모든 것이 너의 관상 탓, 거센 팔자 탓"으로 돌리는 행태가 아직까지도 존재하다니...잔인한 문화일수록 수명도 길다.



"속상해하지 말고 식사하세요. 그리고 또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셔"



엄마는 아마 한없이 씩씩대고  수십 번씩 곱씹으며 그 밤을 하얗게 지새웠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뜬 내 머릿속에서도 '과부상'이라는 단어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었으니까. 나주댁이 미웠다. 엄마는 아마 돌아가실 때까지 과부상이라는 단어를 잊지 못하시겠지 휴



그러나 며칠 동안 엄마는 잠잠했다. 괜찮아지신 건지 아님 속병이 나신 건지 싶어 전화를 했더니 아무 일 없는 듯 경쾌했다.



"기분 괜찮아 보이시네? 나주댁 아줌마랑 안 싸우셨어?  명예훼손 이야기했어?"



"아 명희손. 이제 다 끝났어. 끝났어."



모든 일은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고 사소한 일에서 끝을 본다. 과부상이라는 소리를 들은 엄마가 밥도 못 먹고 끙끙대고 누워있으니, 인기척이 없는 엄마가 궁금해진  동네 할머니들이 하나둘 모였다.


 뭐 하는디 조용해.


누워있던 엄마가 집요한 질문에도 입을 꾹 다물고 버티다가 못내 자초지종을 털어놓으며 삐질삐질 눈물바람을 하자 할머니들이 난리가 났다.



30~40년 전만 해도 60 넘으면 환갑잔치를 성대하게 열어 장수를 기원할 정도로 평균 수명이 낮았다. 병원 출입이 잦지 않던 시대다 보니  주변에 70을  못 넘기고 가신 할아버지들도 제법 있었다.  할머니들은 '그럼 요새는 90세까지도 살고  벽에다 똥칠하면서 100살까지도 산다는데, 우리 영감은 80도 못 살고 갔으니 나도 과부상이냐?  당신도 과부상이네  원 별소리를 다 듣네'  하면서 한바탕 난리를  치다가 나주댁까지 불러서 혼쭐을 냈다는.  



그렇게  소란스러울 때에 택배가 도착했다고 한다. 마침 남편이 대놓고 먹는 홍삼 집에 주문하러 갔다가 즉흥적으로 시어머니께 두 박스, 친정엄마에게 두 박스를 택배로 부쳤는데,  하필 그때 도착했다고 한다. 나도 후에야 들었다.



엄마는 예기치 않은 홍삼 택배에



"오매 우리 셋째 사위가 또 보냈네. 작년에도 두 박스나 보내서 이제 보내지 말라고 했는데... 요번 어버이날에도 우리 사위가 50만원이나 보냈더라니까"


사위 자랑을 시작하자 없던 기운도 폴폴 살아났다. 그러자 과부상 사건으로 기죽어가고 있던 나주댁 아줌마가 특유의 성격대로 "오매. 요새 홍삼 싸요~그리고 물 탄 것도 많대. 이런 건 여자가 잘 알아보고 사야 하는데 사위가 뭘 알겠어. 속아서 샀을 수도  있어., 차라리 돈으로 보내지 뭔 홍삼을 보냈대"  라며 찬물을 휙 뿌렸다.



그 난 척하는 말발에 엄마가  또다시 기가 죽을 무렵 동네 할머니 하나가



"오매 부러우면 그냥 부럽다고 해. 나주댁은 이런 거 보내주는 사위 있어? 있으면 가져와봐. 여기 형님은  영감님이 빨리 가셔서 고생하셨을지 몰라도 자식복 사위복은 우리 중에서 최고여.  늙으면 자식복 많은 게 최곤거여."



"맞아. 우리 중에서 사위한테  수시로 홍삼 얻어먹는 건 이집밖에 없어. 남편이 좀 빨리 가면 어때. 망할 영감이 오래 살아서 늙을 때까지 수발드는 것도 고생이여.  우리 뒷집 정순이네 봐봐 . 골골한 영감탱이 수발하느라고 동네 마실 한 번을 못 나와.  수발 들다가  팍 늙었어.  그러니 여기 형님 팔자가 최고여!"



과부상이 자식복 사위복에 참패당했다.    

아들만 둘을 가졌는데 딱히 자식 자랑할 게 없었던 나주댁은 기가 죽었다.


'과부상 명희손(명예훼손) 사건'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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