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혼은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100세 시대에 조금 더 빨리 도달한 것으로 보이는 일본인들이 먼저 만들어낸 개념이다. 2004년에 일본 작가가 처음으로 사용한 단어라고 하는데, 국내에선 2016년경 소개되어 2017년 가장 많이 검색된 신조어 1위를 당당하게 차지할 정도로 폭발적인 관심을 끌고 그 이후 다시 시들해진 단어다(SBS 뉴스, [오!클릭] 올해 가장 많이 검색된 신조어 1위는? '졸혼',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551680). 놀랍게도 코로나로 집에 틀어박혀 배우자 얼굴이 지긋지긋해진 요즘, 노사연과 이무송이 방송에서 졸혼 체험을 한 이후 다시 졸혼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구글트렌드로 보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졸혼'에 대한 관심도 변화. 졸혼이 처음 소개된 2016.~2017. 경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가 최근 다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졸혼은 '결혼에서 졸업한다'라는 뜻으로 쉽게 말하면 법률상의 혼인관계는 유지한 상태에서 부부가 남으로 살기로 하는 것이다. 법률상의 혼인관계가 유지된다는 것에 많이들 매력을 느끼는지 황혼이혼 상담을 하러 온 의뢰인들 중 이혼에는 아주 부정적이지만 졸혼에는 놀라울 정도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많다. 오랜 기간 함께 해온 세월을 어떤 형태로든 혼인관계증명서라는 공문서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 큰 것 같다. 특히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한 분들에게 큰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졸혼이라는 개념을 선호하는 또 다른 부류는 이혼을 하기 싫어하는 유책배우자들이다. 자기가 다 잘못했고, 원하는 대로 다 해줄 테니 이혼만은 하지 말아 달라는 취지로 먼저 졸혼을 제안한다. 무엇이든 함부로 단정 지어서는 안 되지만 졸혼을 제안하며 하는 유책배우자들의 말은 높은 확률로 뻥이다. 반성도 안 하고, 원하는 대로 다 안 해준다. 유책 배우자면서도 이혼은 하지 말아 달라는 사람들은 대개 주변의 시선이나 재산분할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 때문에 이혼을 미루자는 것인데, 그 문제가 해결되면 뻔뻔스럽게도 먼저 이혼청구를 해온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졸혼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아직 졸혼이란 개념은 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은 아니라 법적으로 '졸혼'이라는 관계를 인정받을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졸혼을 한 채로 별거하며 살다가 한 명이 사망을 한다면 둘이 졸혼을 합의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배우자에게 당연히 상속권이 인정되는 것이다. 부양의무도 마찬가지이다. 졸혼을 해서 남처럼 살아도 한쪽에서 생활비를 청구한다면 법적으로 이를 지급해야 할 의무가 있다.
또 졸혼을 하고 서로 누굴 만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취지의 합의를 하고 제삼자를 만나 행복하게 연애를 한다고 해도, 어느 날 갑자기 수틀린 배우자가 위자료를 청구한다면 법적으론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 물론 이런저런 경위가 참작이 되어(물론 참작이 되려면 쌍방 간에 졸혼에 대한 합의가 있었고 혼인관계의 실질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객관적인 증거자료가 있어야 할 것이다.) 비교적 소액의 위자료가 인정되겠지만, 아무튼 법적인 책임만 보면 그렇다. 졸혼을 하면 쿨하게 살 것 같지만, 그래도 막상 배우자가 다른 사람 만나는 것에 완전히 쿨하기는 쉽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졸혼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공권력은 남의 가정사에는 최대한 개입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즉, 졸혼한 배우자가 갑자기 부부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려고 들지 않는다면 법원에서 갑자기 들이닥쳐 위자료를 지급하라거나 재산분할금을 지급하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서로 부부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겠다는 확신만 있다면 그냥 졸혼을 해서 행복하게 살면 된다.
서로 권리를 행사하지 않겠다는 확신을 가지려면 그래도 객관적인 증거나 공신력 있는(?) 제삼자로부터 확인을 받는 것이 좋다. 흔히 공증을 생각하는데, 공증은 문서 자체를 당사자들 사이에 작성하는 것이라 의미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고 집행력이 없어 큰 의미도 없다. 그래서 최근에 법원에서는 이혼 소송 중에 조정에 회부하여 아예 조정조서에 졸혼을 하기로 합의했다는 점을 기재하기도 한다. 물론 이게 정말 졸혼의 법적인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고 단순히 당사자 간에 그렇게 합의했다는 취지인데(법조인들 사이에선 '선언적 의미를 갖는다'라고 하면 대충 알아듣는다.) 추후 분쟁이 생겼을 때 꽤 중요한 증거자료가 될 수 있다.
법원에서 조정조서에 졸혼의 내용을 기재하면서 재산분할도 미리 합의해둘 수 있다. 추후 만약 이혼을 하게 되거나 재산분할을 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졸혼을 하기로 한 날짜를 기준으로 하여 재산분할시점을 정한다든지, 이런저런 내용을 기재할 수 있다. 물론 재산분할의 내용은 졸혼을 하려는 당사자들의 재산 상황에 맞게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작성하면 된다.
졸혼의 취지가 담긴 조정조서의 일부. 3항부터 재산분할, 면접교섭 등에 대한 내용도 기재되어 있으나 개인정보가 포함되어 있어 생략.
하지만 실제로 졸혼이 이루어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에는 졸혼 이야기를 하던 당사자들이 서로를 헐뜯는 서면을 받아보다가 결국 이혼을 결심하는 경우가 많다. 막상 졸혼을 하려고 보니 뻔뻔하게 상간남이나 상간녀를 대놓고 만나는 배우자에게 화가 나서 이혼을 하기도 한다. 자녀들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도 많고, 상속이 임박한 시점에서의 졸혼은 결국 상속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실제로 '졸혼' 개념을 법원에서 겪어보는 것이 변호사들에게도 흔한 일은 아니다. 각 법원과 재판부의 성향도 다 달라서 이러한 개념의 조정이나 화해권고를 허락해주는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민법에 위배될 여지도 있는지라 재판부가 완강하게 거절하는 경우도 많다.
아직은 자리 잡히지 않은 개념이라 앞으로 졸혼을 둘러싼 법적인 분쟁도 더 다양해질 것이다. 사실 현시점에서는 '그래도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혼인관계로 남고 싶다', '이혼 가정이 되기 싫다' 등의 감정적인 부분을 제외한다면 졸혼에는 별 이득이 없다. 법적으로 이혼이 아니기 때문에 재산분할을 할 때 세금 문제도 생긴다. 어차피 나중에 법적인 분쟁이 생길 가능성이 높은데 굳이 왜 이혼을 하지 않고 졸혼을 고집해야 하는 것인지 다소 의문이다. 하지만 변호사는 대리인일 뿐, 의뢰인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도와드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