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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갱도요새 Jan 25. 2023

다시 만날 제주

아무것도, 제주 - 제주여행 4일 차


혼자서 올레길을 한참 걸었다. 생각보다 많이 걷진 못해서 2만보를 조금 넘게 걸었다. 시간이 더 많았다면 좋았을 텐데 좀 아쉬웠다. 카카오맵을 보지 않고 걸으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기어코 엉뚱한 길로 걸어가고야 마는 재주가 있었다. 결국 길이 조금이라도 넓어진다 싶으면 바로 카카오맵을 봤다. 지도반 제주반 바라보며 걷다 보니 제주도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월요일이라 다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엄청 좁은 골목길에서 길바닥 공사를 하는 아저씨도 만났는데 돌아가야 되나 고민하던 찰나에 아저씨가 나를 알아채고 얼른 지나가라고 했다.



제주도에는 이상할 정도로 고양이가 많았다. 날씨가 따뜻해서 고양이들 살기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바닷가 시커먼 돌덩어리 위에서 늘어지게 쉬고 있는 고양이들의 모습은 아주 이색적이었다. 바닷가에 산다 뿐이지 식빵을 굽거나 벌러덩 늘어져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그냥 고양이어서 좀 웃겼다. 작은 고양이들은 낚시꾼들 근처에 얼쩡대다가 생선을 얻어먹기도 했다. 내가 제주도에 사는 고양이라면 활어회를 잔뜩 얻어먹을 수 있을 텐데 좀 아쉽다.


올레길을 따라 숙소 근처까지 걸어왔는데 더 걷기에는 시간이 애매해서 핸드폰 충전도 할 겸 근처 카페에 들렀다. 무인카페가 있다고 해서 시간 나면 가봐야지 싶어 지도에 저장해 두었던 곳이다. 입구에는 '무인카페 산책'이라고 작게 쓰여있었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카페는 텅텅 비어 있었다. 갑자기 부자가 되어서 혼자 큰 카페를 빌린 기분이었다. 무인카페라 일하는 사람조차 없어서 더 그랬다. 커피는 3,000원이었고 카카오페이 결제나 계좌이체를 하면 되는 방식이었다. 계좌이체를 하고 컵을 꺼내왔다. 이미 밀크티 한 잔, 커피 한 잔을 마신 뒤라서 카페인이 없는 걸 먹을까 고민했지만 결국 또 커피를 마셨다. 카페인을 줄일 생각을 잠깐 함으로써 비로소 기어코 카페인을 먹을 의지를 얻는 것이다.


벽에는 빼곡하게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카페에 들렀던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적어 붙여놓은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행복한 마음으로, 어떤 사람은 절박한 마음으로, 어떤 사람은 무너져 내렸다가도 위로를 받은 마음으로 글을 적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 한 구석을 남기고 가고 싶을 정도로 따뜻하고 보드라운 공간을 만들다니. 사장님이 조금 부러웠다.


가게 안에 색연필이 좀 있었다. 여행 중에 바다를 많이 그렸는데 바다 색을 칠하지 못해서 너무 아쉬웠던 터라 후다닥 바다를 색칠했다. 파란색 색연필이 하나밖에 없어서 좀 슬펐는데 다행히도 슬슬 노을이 지던 터라 바다가 보랏빛이었다. 보라색 색연필로 얼른 바다를 덧칠했다.



짐을 챙겨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트렁크에 짐을 실으려고 했는데 기사님이 그냥 뒷좌석에 넣으래서 약간 허둥댔다. 공항에 가는 동안 캐리어가 옆자리에 같이 앉아 들썩거렸다. 월요일 저녁 6시는 제주도도 차가 막혔다. 다음에 오면 비행기 시간을 퇴근시간 근처로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공항에 와서 짐을 부쳤더니 내일 출근할 생각에 갑자기 고통이 몰려왔다.


예전 의뢰인 분 중에 제주공항에서 일하시는 분이 있었는데 제주공항은 체크인해서 들어가면 먹을 게 별로 없으니 체크인하기 전에 4층에서 꼭 식사를 먼저 하고 들어가라고 했었다. 체크인해서 카페 오가다를 마주칠 때의 당혹감을 너무 잘 알기에 얼른 체크인 전에 4층으로 올라가서 식당을 찾았다. 3박 4일 내내 회를 너무 많이 먹었던 터라 고기국수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국수류가 모두 품절이었다. 결국 또 한치물회를 골랐다. 제주도 생선이란 생선은 다 먹은 것 같다. 물회가 나의 선호 음식 탑 10 정도에 드는 음식이라면 한치는 내 불호 식재료 탑 10에 들어간다. 결국 나에게 한치물회라는 것은 시리얼을 물에 말아먹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기묘한 음식이다. 그래도 공항 내 푸드코트 치고는 먹을만했다.


공항 푸드코트 치고는 괜찮았던 한치물회. 집중해서 먹느라 옷에 양념이 다 튀었다.


체크인하는데 주민등록증 사진이랑 지금이랑 생긴 게 너무 달라서(?) 다른 신분증 없냐고 빠꾸를 먹었다. 보통은 수상쩍다는 눈초리로 내 얼굴과 민증을 번갈아보면서 집주소를 물어보는데, 매번 집주소 답하는 게 너무 귀찮아서 바이오 생체정보등록을 하고 앞으로는 신분증 없이 국내선을 타려고 했다. 근데 안타깝게도 생체정보 최초 등록 시에는 직원이 한 번 얼굴을 직접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또 빠꾸를 먹고야 말았다.


전 세계의 고도근시 인구들이 다 그렇듯 나는 안경을 쓰면 눈이 엄청 작아진다. 그래서 안경 끼면 민증 사진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렌즈를 끼면 민증사진이랑은 좀 다르게 생겼다. 운전면허가 없어서 운전면허증도 없고, 여권도 집에 있고, 안경도 캐리어에 이미 보낸 뒤라 내가 나라는 걸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당황하다가 변호사신분증이 떠올랐다. 얼른 꺼내서 이거라도 괜찮냐고 물어봤다. 변호사신분증엔 주민등록번호가 없어서 좀 애매하긴 했는데 다행히 내가 나라는 걸 입증할 정도는 되어서 직원분이 통과시켜 주었다.


민증 사진은 1단계, 안경 끼면 2단계, 렌즈 끼면 3단계 같은 느낌이다.


좀 민망했던 체크인을 마치고 진짜로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집에 돌아가면 또 출근을 해야 하는 내일이 오는 것이다. 출근 생각을 얼른 잊어버리게 후딱 면세점에 들렀다. 글렌모렌지 시그넷은 집에 한 병 있어서 글렌드로낙과 히비키 하모니, 달모어 시가몰트를 찾았는데 다 품절이었다. 월요일 저녁에 가서 저걸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슬펐다. 결국 아벨라워 아부나흐를 한 병 샀다. 위스키 한 병 품에 안고 있으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비행기 창가 쪽 좌석을 예매했는데 우리 엄마보다 조금 나이 많아 보이는 분들이 우르르 앉아서 내 자리까지 앉아있었다. 친구들끼리 같이 놀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인 듯했다. 스튜어디스분이 안내해 주며 내 자리에 앉아있는 분에게 자리를 착각하신 것 같다고 얘기했는데, 갑자기 그분이 그냥 자리 좀 바꿔주면 안 되냐고 억지를 부렸다. 바꿔달라고 하는 자리는 가운데 통로 쪽 자리였다. 그분의 친구들도 가세해서 나한테 그냥 자리 좀 바꿔주면 안 되냐고 했다. 친구들이랑 다 같이 왔는데 혼자 덩그러니 떨어져 앉으면 좀 속상할 것 같아서 그냥 자리를 양보해 드렸다.


제주도 여행은 밤에 창밖으로 보이는 오징어잡이배 불빛 보면서 떠나야 진정한 완성인데!  통로 쪽이라 창 밖을 전혀 볼 수가 없어서 좀 아쉬웠다. 그래도 친구들이랑 같이 앉아 간 그분은 행복한 우정을 나눴을 것이다. 오징어잡이배는 언제든 볼 수 있지만 친구들이랑 비행기 타고 돌아가는 길은 언제 또 돌아올지 모르는 것이니까 자리를 양보해서 다행이다.




2월에 제주도에 또 가게 되었다. J변호사님이 해변횟집의 고등어회 맛을 잊을 수 없다며 다시 가자고 했고, 그 말에 홀랑 넘어간 나는 결국 고등어회를 먹으러 또 가기로 했다. 다시 만날 제주라니 좀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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