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100세 인생 시대, 50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_ E.20

by 양성필

1. 내 인생에 쨍하고 해 뜰 날은 언제쯤 오는 걸까? 이번 생에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 100세 인생 시대인데 인생 후반전에도 아무런 반전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앞만 보고 냅다 달렸던 40대까지는 별로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 오십이 지나고부터는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과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한편으로는 답답함을, 다른 한편으론 불안감을 느끼는 빈도가 늘고 강도도 점점 세지고 있다.


무언가 총체적으로 꽉 막힌 듯한 느낌인데 뾰족한 탈출구가 보이지 않아 암울하다. 정해진 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디엔가 정답이 있는 것처럼 찾아 헤매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끊어내기 힘들다. 비슷한 고민을 털어놓는 또래 친구와 같이 그 정답을 찾아보기도 한다. 내 체중의 1000배쯤으로 느껴지는 삶의 무게를 견뎌내자니 웃는 날보다는 찌푸린 날이 많을 수밖에 없다.


2. 평소 점(占)이나 사주풀이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다. 내 운명은 나 스스로 개척해 나간다는 나름의 소신과 배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점이나 한번 봐볼까 하는 생각이 자주 꿈틀거린다. 내 삶의 탈출구는 어디에 있는지, 해방의 날은 언제쯤 오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조급증에서다.


'점신(占神)'이라는 사주풀이 앱이 있다. 꽤 정확하다는 입소문을 듣고 앱을 깔았다. 내 운세를 능력, 재물, 애정, 건강 등 네 가지로 부분으로 나누어 상세히 설명해 준다. 50년 넘게 살아온 삶에 비추어보니 제법 그럴싸하다. 내 인생의 전성기는 50대이며, 가장 큰 직분과 명예를 얻게 되고, 사회적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폭과 분야도 늘어나고, 재물에 있어서도 가장 큰 성공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솔직히 하나마나한 당연한 얘기 아닌가? 아주 특별한 몇몇 경우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다 50대에 이르러 직분과 재물에 있어서 전성기를 맞이하는 거 아닌가? 애당초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기에 실망도 없었다. 오히려 결국 나의 미래는 내가 꿈꾸고 노력해서 만들어가기 나름이라는 원래의 신념만 더 굳건해졌다.


3. 에이징 커브(Aging Curve)라는 말이 있다. 메이저리그 야구에서 처음 나온 개념인데 나이에 따른 운동선수의 능력치를 나타낸 그래프다. 개인별 차이는 있지만 모든 운동선수는 일정 나이가 되면 운동 능력이 저하되며 이는 기량의 하락으로 이어진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일반적으로 축구는 26세를 최전성기로 보며, 25~30세까지는 비슷한 능력치를 보여준다고 한다. 실제로 EPL(영국 프리미어 축구 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포지션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 26~28세에 기량이 절정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야구도 27~28세를 최전성기로 보며 운동능력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바둑도 20대 초중반이 전성기라고 한다. 운동 능력뿐만 아니라 두뇌 능력도 20대 초중반이 가장 능력치가 좋다는 말이다. 2022년 현재 바둑 세계랭킹 1위인 신진서 9단은 우리 나이로 23세다.


4. 그렇다면 운동선수가 아닌 사람의 경우에는 언제를 전성기로 봐야 할까? 우선, 직업에 따라 다 다를 것이다. 그런데 평균 기대수명의 증가라는 변수가 추가됐다. 인생을 1막으로만 꾸려도 충분했던 시대에서는 내 직업의 전성기와 내 삶의 전성기 사이의 상관 계수가 높았다. 하지만, 인생 2막, 3막을 사는 시대에서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인생의 제2전성기, 제3전성기가 올 수도 있고, 에이징 커브 역시 내가 인생 후반전에서 선택할 일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포물선을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인생 2막의 초점을 봉사활동에 맞춘다고 하면 아예 에이징 커브가 적용되지 않는 삶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100세 인생 시대에서는 인생의 전성기가 재해석, 재정의 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지금 내가 부캐 활동으로 하고 있는 '그림 그리기'의 전성기는 언제쯤 일지,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지 당장에는 알 수가 없다. 그림을 그릴수록 처음 시작한 때보다 꾸준히 실력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는 유화로 초상화를 그리고 있지만, 100개의 초상화 선물하기 프로젝트 달성 이후엔 풍경 스케치를 배울 계획이다. 붓을 들 힘만 있다면 다양한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을 것이고, 실력도 계속 늘 것이다.


나의 또 다른 부캐 활동인 한국어 교원 활동도 두 시간 정도 강의할 체력만 있으면 나이에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가르치는 경험이 쌓일수록 내 교수(敎授) 역량이 배가될 것이 틀림없다. 실제로 내가 일요일마다 찾는 <의정부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에는 연령이 나보다 훨씬 높으신 한국어 교원 분들이 많으시다.


5.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전성기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함께 언급되는 부분이 슬럼프다. 슬럼프는 주변 환경 등 타의에 의해서, 의도했던 아니든 내가 저지른 실수로 인해서, 때로는 분명한 원인도 없이 불쑥 내 삶에 찾아온다. 슬럼프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으며, 예고 없이 왔다가 언젠가는 지나간다. 다만, 바로 그 '언제'를 몰라서 우리가 그토록 힘들어하는 것이다.


딱히 매뉴얼이라 부를 만큼 정형화된 것도 없고, 정형화할 수도 없지만, 찾아온 슬럼프를 내가 슬럼프라고 받아들이는 것부터가 탈출의 시작이다. 그게 되지 않으면 탈출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슬럼프 상황에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답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해봐야 잘 안 될 것이다란 생각은 절대 금물이다.


나는 쉰 살의 나이에 극심한 삶의 슬럼프를 겪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상황이 폭발하듯 갑자기 내 삶에 찾아와서는 뿌리부터 나를 흔들어댔다. 매일 밤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터널의 왼쪽으로 가야 할지 오른쪽으로 가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불면의 밤이 상당 기간 지속됐다.


수많은 방황과 자문자답(自問自答) 끝에 내가 찾은 터널 탈출의 실마리는 일단 무조건 한 방향으로만 계속해서 걸어가 보자는 단순하고 무모한 결심이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이니 일단 오른쪽으로 방향을 결정하고 계속 걸었다. 그리고 다음 날 밤에는 기억을 되살려 어제 내 걸음이 멈춘 곳부터 또다시 시작했다. 물론 실제의 걸음이 아닌 생각의 걸음이다. 신체의 걸음이 아닌 마음의 걸음이다.


어두운 마음의 터널을 빠져나오려노력에만 그치지 않았다. 몸의 단련을 위해서 매일 10킬로미터 정도를 걸었고, 정서적 안정과 마음의 단련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고 명상을 시작했다. 몇 달 동안의 진심 어린 노력 끝에 드디어 터널을 벗어날 수 있었고 내 인생의 전성기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행복한 시절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6. 흔히 인생을 계절에 비유한다. 100세 인생 시대의 봄은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처럼 학교와 막 시작한 사회생활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20대까지, 여름은 자신의 직업을 중심으로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는 30~40대, 가을은 열심히 살아온 인생에 대한 보상과 결실을 맺고 어느 정도 삶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50~70대, 내가 걸어온 인생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80대 이후는 겨울이라 할 수 있다.


사람에 따라 30~40대를 내 인생의 전성기로 여기기도 한다. 그런데 내 생각엔 어느 정도 내 삶에 대한 평가와 결실, 경제적인 여유가 영글어지는 50대부터가 전성기의 시작이 아닐까 한다. 결국 그때부터 내 건강이 유지되는 시기까지가 전성기에 해당할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아니 그 이상, 삶에 있어서 최고의 시기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바로 지금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미 지나가버렸을 수도 있고, 아직 오지 않은 전성기를 향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전성기 앞에는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했던 준비 기간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며, 전성기 또한 영원한 것은 아니다. 달이 차면 기울듯 전성기가 지나면 쇠퇴기가 수반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인생의 법칙이다.


7. 사람은 누구나 전성기를 오래 누리길 바란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고 실천하는 방법은 딱 두 가지다. 한 가지는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꿈꾸고, 노력하고, 도전하는 것. 다른 한 가지는 매일 주어지는 하루를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행복하게 보내는데 집중하는 것. 50이 된 이후부터 나는 내 삶의 마디마디를 이 두 가지로 채우고 있다.


'회사 일이 최우선'이란 신념으로 직장 생활과 나의 삶을 동일하게 여겼던 생각은 이미 구시대적 발상으로 취급받고 있다. 굳이 MZ세대의 이야기만도 아니다. 오히려 직장에서의 퇴직 이후 또는 인생 2막에서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액티브 시니어들을 보라. 한 번뿐인 내 삶을 직장 생활이라는 틀에만 맞춰 살아서는 안 된다. 지금 다니는 직장을 평생 다닐 수도 없고, 퇴직 이후 최소 30년 이상의 내 삶을 직장에서 끝까지 책임져줄 수도 없다.


열정을 잃지 말라. 내 인생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고, 제2, 제3의 전성기를 누리며 살겠다는 생각으로 100세 인생 시대를 살자. 내가 그림의 소질을 쉰 살에서야 발견한 것처럼 아직까지 내 인생에서 보여주지 못한 뜻밖의 재능을 발견하고, 인생의 후반전에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살며 인생의 정점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모든 일에는 시작보다 끝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인생의 전반전에 큰 성공을 이루고 잘 살았더라도 인생의 후반전을 망친다면 그것은 불행한 삶이다. 반대로 인생의 전반전이 별로였더라도 후반전을 잘 살면 그것은 행복한 삶이다. 사람은 마지막 경험과 기억을 더 중시한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이 괜한 것이 아니다.


뉴욕 양키즈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가 남긴 말처럼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내 인생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소중하게, 행복하게 최선을 다하자. 오늘은 내 인생에 남은 날의 첫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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