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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성필 Oct 31. 2018

야구선수할래? 공부할래?

아이들과 나누고픈 내 부모님과의 추억 - Episode 11

평소 TV 야구 중계를 많이 보시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야구를 좋아했다. 보는 것도 좋아했고, 직접 하는 것은 더 좋아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턴가 동네 형들을 따라다니면서 거의 매일같이 야구를 했다. 수비든 타격이든 제대로 배워서 한 게 아니었지만 그 당시에도 체격이 큰 편이었고 자꾸 하다 보니 실력이 조금씩 늘었다. 지금은 대형 주차장으로 탈바꿈했지만 집 바로 앞에 운동장만 한 큰 공터가 있어서 야구를 하기에는 정말 완벽한 조건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즈음에 내가 살던 주택가 뒤쪽으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그래서 아파트에 살던 엇비슷한 나이의 또래들과 아파트 팀과 아파트 아닌 팀으로 나눠서 자주 야구시합을 했다. 아버지께서는 일찍 퇴근하시는 주말에는 집 앞 공터에서 벌어지는 야구시합을 가끔씩 말없이 지켜보셨다.


야구에 관한 욕심이 엄청났던 나는 시합이 없는 날에도 혼자서 공터의 벽에다 네모난 스트라이크 박스를 그려놓고 그 안에 던지는 연습을 했고, 튀어나오는 볼의 바운드를 맞춰 잡으려는 수비 연습도 병행해서 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야구를 할 수 있는 계절에는 해가 진 후에야 집에 들어오기 일쑤였다. 그때는 프로야구가 생기기도 전이었는데 나중에 뭐가 되려고 그렇게 야구에 빠져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혼자서 연습하는 걸 우연히 보시게 된 아버지께서 내게 공을 한 번 던져보라고 하시면서 포수처럼 앉아서 내가 던지는 볼을 받아 주셨다. 비록 초등학생이 던지는 공이었지만 포수 미트가 아닌 야수 글러브로 공을 받으시다 보니 손바닥이 벌겋게 되셨는데도 불구하고 실력이 많이 늘었다며 칭찬도 해주셨다. 


프로야구가 생기기 전에는 실업야구 보다 고교야구가 정말 인기가 높았다. TV에서 중계도 많이 해줘서 아버지랑 야구 중계를 보는 것 자체가 큰 즐거움이었고, 행여나 아버지께서 퇴근하고 오시느라 앞선 이닝을 못 보셨으면 나는 득점과 실점 상황을 아버지께 브리핑하듯이 쫘악 설명해 드리기도 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1981년에는 대구 경북고교가 서울 선린상고를 결승전에서 모두 이기는 등 전국대회 4관왕을 기록했다. 그때 우승의 주역 중 한 사람이 전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이었던 류중일이고, 스포츠 사상 최초로 오빠 부대의 돌풍을 일으킨 선린상고의 두 선수는 김건우와 박노준이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해에 우리나라에도 프로야구가 생겼다. 각 구단마다 특색 있는 컬러의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너무 멋있어 보였고, 이제 야구만 잘해도 먹고살 수 있는 직업으로서의 야구선수가 생긴 것이다. 지난 수년간 집 앞 공터에서 야구시합을 하던 나를 지켜보시던 아버지께서 내가 6학년이던 어느 날 약간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 물으셨다. "네 야구선수할래? 공부할래?"


갑작스러운 질문이기도 했지만 정말 야구를 좋아했던 나는 순간적으로 고민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가 야구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으면 정말로 야구를 시키실 것 같은 표정이셨다. 그러나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니 오래갈 수가 없었다. 나의 의사가 아닌 어머니의 한 마디로 상황이 순식간에 정리됐다. 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들으신 어머니께서 저녁 밥상을 차리시다 말고 일갈하셨다. "여보,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하나뿐인 아들을 열심히 공부시킬 생각을 해야지. 무슨 야구를 시킨다고 하시는 거예요?"


프로야구에 대해 전혀 아시지 못하는 어머니로서는 당연한 조치라고 여기실 만도 한데, 의외인 것은 아버지의 반격이 전혀 없었고 그것으로 상황이 바로 종료됐다는 것이다. 사실 나도 취미로 하는 야구가 아니라 선수로 뛰는 야구에 대해서는 겁이 나기도 했었기에 그냥 묵묵히 저녁밥만 먹었다.    





보통 군대에서는 족구나 축구를 많이들 하는데 야구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 탓인지 나는 군대에서도 주말마다 후반기 교육을 받는 수송교육대 훈련병들과 팀을 짜서 야구를 했다. 그리고 직장에 입사한 후에도 사내 야구 동호회를 만들고 사회인 야구 리그에 참여해서 매달 2번 정도는 주말에 야구를 했다. 그리고 광고인 야구대회 리그를 만들어서 시합을 하기도 했다. 


둘째 지훈이가 초등학교 시절에 취미활동으로 야구 서클에 가입했다. 내심 소질이 보이면 야구선수로 키워볼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여유가 있는 주말에는 공원에 나가 배팅 볼도 던져주고, 캐치볼도 하고 연습을 좀 시켜봤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질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지훈이는 야구 대신 레고에 빠져 들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프로야구 중계를 빠트리지 않고 보시고, 여전히 고향 팀인 삼성 라이온즈를 열렬히 응원하신다. 아쉬운 장면이나 멋진 플레이가 나올 때는 잊지 않고 적절한 타이밍에 추임새도 넣으신다. 내가 아버지를 닮은 부분들이 여럿 있는데 적어도 '야구 사랑'을 빼놓고 얘기할 순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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