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성필 Nov 04. 2018

다섯 살 꼬마의 외갓집 더부살이

아이들과 나누고픈 내 부모님과의 추억 - Episode 12

"외할머니, 엄마 왜 울어요?" 기차 창 너머로 보이는 플랫폼에 서서 연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손을 흔드시는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옆 좌석의 외할머니께 드린 질문이다. 다섯 살 때의 일이다. 어머니께서 무슨 일로 인해 그렇게 눈물을 흘리시는지에 대한 앞 뒤 상황은 전혀 기억에 없지만, 딱 그 장면만 마치 무엇인가를 남길 목적으로 찍은 증명사진처럼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세월이 흘러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문득 그 기억이 떠올라 외할머니께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내 기억이 맞다고 하시면서 그때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당시 아버지께서 경북 영주로 전근 발령이 났는데, 내가 다섯 살이었고 여동생 둘이 각 세 살과 두 살이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서 혼자 힘으로 도저히 세 명의 어린 아이들을 감당할 수 없었던 어머니께서는 아직 엄마 품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어린 여동생 둘만을 데려가고 나는 외가에 일 년 여 기간 동안 맡기기로 하신 것이다. 고육지책이었다. 


당시 다섯 살이었던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그 장면은 외할머니와 내가 영주에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가 대구행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장면이었다.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왜 어머니께서 그토록 슬프게 눈물을 흘리셨는지 이해가 되었다. 만약 내가 그때의 어머니 상황이 되어서 어린 아이들 중 한 명을 외가에 맡기고 타지로 떠나야 한다면 그 심정이 어떨지... 상상이 안 된다.    




나는 외가에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일 년 좀 넘게 같이 살았다. 또 하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애당초 내가 영주에 따라가겠다고 하거나 부모님이 이사를 가신 뒤에라도 나도 영주로 가겠다고 고집을 피울까 봐 외할머니께서 마치 최면을 걸듯이 늘 내게 하셨던 말씀이다. "영주 가면 촌놈 된다. 대구에 남아 있어야 촌놈 소리 안 듣는다". 실제와는 거리가 먼 얘기지만 다섯 살이이었던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고, 외가가 있던 동네의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영주 가면 촌놈 되기 때문에 나는 부모님과 떨어져 대구에 남았다고 오히려 이렇게 된 것이 나의 선택인 양 우기기까지 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서는 나를 정말 이뻐해 주셨고, 혹시라도 어린 내가 상처 받지 않도록 잘 돌봐주셨다. 어린 마음에 나온 말이었지만 내가 나중에 커서 돈 벌면 외할아버지께 꼭 손목시계를 사 드리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스무 살 되던 해 겨울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그 약속을 지켰다. 


당시 외할아버지는 살림집과 연결된 잡화점 가게를 운영하셨는데 식음료는 물론 막걸리도 파셨고 연탄 배달도 하셨다. 외할아버지가 동네에 연탄 배달을 가실 때면 다섯 살 꼬마가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만 그래도 따라가서 나름 도와 드리곤 했다. 


잡화점에서 팔 물건들을 사러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자전거를 타고 대구 칠성시장에 나가셨는데 나는 자전거 뒤에 커다란 상자처럼 생긴 대나무로 엮은 사각형 소쿠리에 앉아서 외할아버지를 따라다녔다. 시장 상인들이 소쿠리에 들어앉아 있는 나를 보고서는 애 팔러 나오셨냐며 외할아버지께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한 번은 회사에서 연말 사회봉사 활동의 일환으로 고아원과 양로원에 '사랑의 연탄 나르기' 행사를 했는데 거기에 동참해서 연탄을 나르다가 갑자기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생각에 남몰래 눈물을 쏟았던 일도 있었다.     


내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부모님이 대구로 돌아오셔서 우리 가족은 다시 모여 살게 되었고 일곱 살이 된 해 봄에 원래 살았던 동네를 떠나 새 집으로 이사를 했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생이별을 경험했던 부모님께서는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할 것이라는 굳은 다짐이라도 하시는 것처럼 나와 여동생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서 집을 떠나기 직전까지 엄청난 뒷바라지를 해 주셨다.   

    

둘째 지훈이가 중학생이었던 몇 해 전에 이런 말을 했다. 대구에 내려가서 할아버지 댁에서 살면서 고등학교 다니면 어떨까라고. 할아버지, 할머니만 계셔서 적적 하실 텐데 자기가 가면 좀 나을 것 같고, 할머니가 자기가 좋아하는 고기를 자주 구워주실 것 같고, 가끔씩 외가에도 가서 그 앞에 있는 자기 취향의 문구점에도 들릴 수 있어서 좋을 것 같다고. 초등학생도 아닌 중학생 수준의 사고로는 좀 유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순수한 마음이 기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아빠가 졸업한 고등학교에 아빠 후배로 입학하면 뭔가 의미 있을 것 같다는 말에서는 살짝 감동을 느끼기도 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얘들이 자기가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끔 돕는 든든한 후원가가 될 수 있도록, 부모님이 내  뒷바라지에 쏟으신 정성과 희생의 반만이라도 따라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몇 해 전에 술자리에서 외가 더부살이에 대한 추억을 말했더니 서울 토박이인 후배 왈, "선배님, 촌놈 되기 싫어 영주에 안 따라가셨다고 했는데, 그런데 대구도 시골 아닌가요?" 이런... 서울 빼고는 다 시골이냐?




매거진의 이전글 야구선수할래? 공부할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