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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성필 Nov 05. 2018

꼬박 3년간 어머니께서 싸주신 두 개의 도시락

아이들과 나누고픈 내 부모님과의 추억 - Episode 13

1990년대 중반부터 초등학교의 학교급식이 시작되어 지금은 중고등학교까지 전면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나의 학창 시절엔 급식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고 각자 집에서 싸오는 도시락이 오후 수업을 위한 유일한 대비 수단이었다.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워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같은 반 친구들도 있었고, 중고등학교 시절엔 도시락 대신 학교 매점을 이용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내가 다녔던 중고등학교에도 구내매점이 있긴 했는데 가격이 비싼 편은 아니었지만 별로 먹을 만한 게 없어서 그다지 자주 이용하진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배낭 형태의 책가방을 메고 다녔고, 손에는 도시락 가방을 따로 들고 다녔다. 게다가 실내화를 넣고 다니는 주머니까지 모두 세 개나 되는 짐을 몸에 지니고 등교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오후 수업이 편성되었기 때문에 등굣길에 어머니께서 싸주신 도시락을 꼭 챙겨서 들고 다녔다. 


막내 여동생이 나랑 열 살 터울이라 어머니께서 우리 사 남매의 도시락을 싸주신 기간만 거의 이십 년 가까이 된다. 예전엔 강산이 두 번 변하는 시간이라는 그 이십 년 말이다. 특히 막내를 뺀 여동생 둘은 나랑 나이 차가 크지 않아 80년대 중반부터 한동안은 세 사람 분의 도시락을 따로따로 준비하셔야 했다. 


우리는 각자 자기 도시락만 챙겨서 나오면 그만이지만, 매일 아침마다 새벽같이 일찍 일어나셔서 아침 밥상을 차리고, 도시락에 밥을 퍼서 채우고, 그리고 반찬통을 채우는 분주함으로 어머니께서 얼마나 애쓰셨는지 짐작도 못하겠다. 아마 그 시절의 모든 어머니들이 다 비슷한 고생을 하셨을 것이다.           


그러다가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로는 1학년 때부터 야간 자율학습이 있어서 내 도시락만 두 개를 준비해야 했다. 한창 식성이 좋을 나이라 밥을 담는 도시락 크기도 컸고, 반찬통에도 김치를 포함해 이것저것 어머니의 정성이 듬뿍 담긴 반찬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체력 유지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늘 계란 프라이 하나씩을 밥 위에다 올려 주셨다. 


당시 내가 좋아해서 어머니께서 자주 싸주시는 반찬은 식용유에 볶은 김치, 대구에선 '오구락지'라고 불렀던 무말랭이, 그리고 고추장볶음이었다. 더운 여름철에도 쉬이 상하지 않았고, 국물이 샌다든가 하는 불상사(?)의 확률이 낮은 것도 장점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해주시는 반찬들이 정말 다 맛있었다.   

  

어머니께서는 겨울철에는 도시락 두 개 중 하나는 보온 도시락에다 싸서 추운 날 점심 저녁 중 한 끼라도 내가 찬밥을 먹지 않도록 하시는 배려도 아끼지 않으셨다. 보온 도시락은 제대로 씻지 않으면 냄새가 날 수도 있어서 설거지하기에도 불편하셨을 텐데 단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셨고, 무심한 나는 그저 그런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가방에 들고 다닐 책도 많아지고, 또 겨울철이면 무거운 책가방에 보온 도시락까지 들어야 하니 등하굣길이 불편하고 힘들었다. 그래서 보온 도시락을 가져오는 대신 겨울철에는 학교 매점에 가서 뜨거운 가락국수 국물만 따로 사서 밥을 말아먹었다. 나의 고등학교 3년 동안 꼬박 매일 등굣길에 도시락을 두 개 싸서 챙겨주시는 어머니의 정성과 노고가 얼마나 큰 자식 사랑이었는지 지금에 와서야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나도 학창 시절에 도시락과 관련된 다양한 직간접적인 에피소드가 있다. 너무 배가 고파서 점심시간이 시작되는 4교시 수업이 끝날 때까지 참지를 못하고 수업시간 중에 도시락을 먹다가 선생님께 걸려서 혼난 친구도 있었고, 아예 아침을 먹지 않고 등교하고선 2교시 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다 먹어치우는 친구도 있었다. 지금 시대의 브런치를 즐긴 건가?


싸가지고 온 반찬이 신통치 않았는지 한 자리에 앉아서 먹질 못하고 다른 친구들의 반찬을 기웃거리면서 도시락을 들고 교실을 빙빙 돌면서 먹는 친구도 있었고, 누가 고기반찬 같은 맛난 것을 싸오면 그 옆에 앉아서 한 젓가락이라도 얻어먹으려고 온갖 애를 쓰는 친구도 있었다. 


나의 경우에도 반찬의 질이 좋아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워낙에 좋아서 똑같은 김치볶음인데도 체감하는 맛이 훨씬 좋다 보니 나의 반찬통을 노리며(?) 같이 먹자고 친구들이 몰려와서 내가 싸가지고 온 반찬을 혼자 다 먹은 경우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친구들의 얼굴이 일일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를 띠게 만드는, 참 다양한 군상을 볼 수 있었던 학창 시절의 도시락 문화였다.     

  

아이들의 소풍, 현장학습 등 특별한 경우 몇몇을 제외하고는 집사람이 도시락을 쌀 일은 없다. 도시락을 쌀 일이 생기면 주로 김밥을 싸는데 제법 솜씨가 있다. 그래서 아이들 덕에 일 년에 몇 번은 김밥을 얻어먹는다. 마치 내가 어릴 적에 여동생이 다니는 학교가 소풍 가는 날 어머니가 싸주신 김밥을 동생 덕에 얻어먹게 되었던 것처럼. 어머니가 싸주시는 도시락을 다시 먹을 일은 없겠지만, 수십 년 전 그 맛과 도시락 안에 빽빽하게 담겨 있던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은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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