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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성필 Nov 07. 2018

온 가족을 울린 아버지의 퇴임사

아이들과 나누고픈 내 부모님과의 추억 - Episode 14

1990년대 중반 아버지께서는 다니시던 직장에서 정년보다 몇 년 앞서 명예퇴직을 하기로 결정을 하셨다. 당시 나는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수십 년 간 해오시던 일을 바탕으로 개인 사무실을 내고 프리랜서로 활동하시겠다고 선언을 하신 것이다. 


나도 지금의 직장에서 이직 없이 25년째 다니고 있지만 아무리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독립 선언을 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 결정이다. 해당 업계의 시장 상황, 경쟁구조, 향후 전망 등 기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고, 사무실 임대 등 최소한의 자금 및 독립 후 6개월간 수입이 없더라도 버틸 수 있는 여유 자금 확보까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철저한 준비 없이 시작했다간 낭패를 볼 확률이 크다. 아무튼 아버지께서는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통해 독립을 하셨고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무실을 내셨다.     

   

요즘의 직장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탓으로 워낙에 이직과 변동이 많다 보니 퇴임식이라는 걸 별도로 마련해주는 경우가 많지 않고, 특히나 '정년 퇴임식'이라는 단어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선망의 대상인 동시에 국어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희귀한 말이 되어 버렸다. 


더욱이 평균 기대수명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서 정년의 개념과 시점도 예전에 비해 사뭇 달라졌다. 아버지의 경우 비록 정년 퇴임식은 아니었지만 정년에 준할 정도로 오랜 기간 동안 다니셨기 때문에 직장에서 퇴임식을 마련해 주셨다. 우리 가족은 모두 아버지의 노고에 감사드리고 새 출발을 축하드리기 위해 퇴임식에 참석했다. 날이 날이니 만큼 가족 모두 단정하게 잘 차려입었는데 내가 양복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맨 경험은 아마 그날이 처음인 것 같다.    


드디어 퇴임식이 진행되었고, 아버지께서는 축하의 꽃다발을 받으시면서 연단에 올라서서 수십 년 동안의 직장생활을 돌아보는 소회를 말씀하셨다. 그런데 평소 마음과 행동은 자상하시지만, 말로 하는 표현은 참 무뚝뚝하신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인 아버지답지 않게 말씀 도중에 매우 뜻밖이라고 생각되는 말씀을 하셨다. "제가 표현을 잘못하는데, 이 자리를 빌려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특히 지난 세월 동안 늘 직장과 일을 중심으로 살아왔던 나를 대신해 아이들을 이 날 이때까지 무탈하게 잘 키워준 집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고,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지원하지도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없이 훌륭하게 잘 성장해준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모두 아버지의 진심이 담긴 말씀에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아버지께서 본인의 말씀을 통해 가족에 대한 깊은 속내를 표현하는 것을 처음으로 들었고, 그 말씀은 내 귀를 통해 들어왔지만 내 심장에서 뭉클함으로 바뀌어 몸 전체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 가족사랑이란 것이 이런 거구나.   

 

퇴임식을 마치고 인근 식당에서 몇몇 직장 동료분들과 우리 가족이 함께 점심 식사를 했는데 그때 내 앞에 앉으신 아버지 동료들 중 한 분이 아버지께서 직장에서 이러이러한 분이었다고 칭찬과 존경의 말씀을 늘어놓으셨다. 자식으로서 아버지에 대한 좋은 말씀을 들으면서 기분이 좋았던 것은 당연했고 나중에 나도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동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아버지께 그동안 수고하셨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맥주를 한 잔 따라 드렸다. 아버지는 단숨에 잔을 비우시고 내게도 맥주를 한 잔 주시면서 "대학까지는 어느 정도 네가 원하는 대로 잘 왔지만, 본격적인 인생살이의 시작은 지금부터니까 졸업 후의 진로를 충분히 고민해서 잘 선택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나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많이 고민해서 미래의 진로를 선택했고, 당초 계획했던 딱 그 방향은 아니지만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내가 원하는 대로 잘 걸어왔다고 생각한다. 이제 명목상으로 주어진 정년까지 한 자리 수의 해를 남겨 두고 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왔지만 지금부터가 또 중요하다. 나도 아버지처럼 내 동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며 직장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할 무렵 이런 유머가 있었다. 결혼한 경상도 남자가 퇴근해서 집에 오면 딱 세 마디를 한다고 한다. "아는?(애들은?)" "밥 도(밥 줘)" "자자". 많이 과장된 것이긴 하지만 경상도 남자 특유의 무뚝뚝함을 빗댄 것이라 피식 웃음도 났고 동시에 나는 그러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 역시 마음은 안 그런데 말로 하는 표현을 잘 못한다. 마치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말이 잘 안 나온다. 그런데 말을 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어떻게 알겠는가.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말로 표현하려고 내 나름으로 무지하게 애쓰고 있는 중이다. 특히 나중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부모님께 표현을 자주 해드리려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내 아이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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