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에 초중고교를 다니면서 만화책을 즐겨 봤다면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당시 후속 편이 빨리 나오길 목이 빠져라 기다리면서 하교 길에 단골 만화방 미닫이 문을 열고선 주인아저씨께 “아저씨 나왔어요?”라고 여쭤봤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100%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지만, 한국 만화는 <공포의 외인구단>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이 작품의 등장은 충격이었다. 등장인물들의 완벽한 캐릭터 설정,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그림과 펜 터치, 짜임새 있으면서도 파격적인 스토리 전개 등 한 마디로 재미와 감동과 철학이 모두 녹아 있는 작품이다.
<공포의 외인구단>은 어린이들의 책으로 인식되던 만화책을 성인들의 영역까지 확대시켜 그야말로 만화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히 일부분이긴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심의를 통과하지 못할 내용들도 있었는데, 심의를 담당했던 관계자가 만화 내용이 너무 재미있어서 심의를 하기보다는 다음 편을 애타게 기다리는 독자의 입장이 되어 심의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공포의 외인구단>은 2012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만화가, 학계, 출판계 등 전문가 100명에게 의뢰해 한국만화 명작 100선을 선정했는데 여기서 1위를 차지했다. 이와 동시에 일반 독자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선호도 조사에서도 1위에 올랐다. 전문가와 대중에게 모두 1위의 평가를 받았으니 한국만화에서 <공포의 외인구단>이 갖는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객관적으로도 알 수 있다.
<H2>는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이며, 고교야구를 소재로 한 장편 야구만화이다. 두 명의 야구천재 히로(Hero)와 히데오(英雄)의 우정과 대결, 그리고 두 소녀 히까리, 하루키와 얽힌 연애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두 주인공의 이름이자 두 명의 영웅인, 히로(Hero)와 히데오(Hideo)의 영문 이니셜을 딴 것이 작품의 제목이다. 작가가 나중에 밝혔듯이 두 명의 히로인(Heroine), 히까리와 하루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1992년부터 1999년까지 일본의 만화잡지인 '주간 소년 선데이'에 연재되었다. 사실 ‘아다치 미츠루’는 역시 야구를 소재로 한 만화인 <터치>라는 작품이 일본에서 크게 인기를 끌며 유명세를 탔는데, 우리나라에선 <H2>가 먼저 소개되었다.
또 한번 100%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를 말하자면, 이 작품 또한 이전의 일본 야구만화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만화풍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슬램덩크와도 또 다르다. 이 작품을 읽는 매 순간마다 "야구 만화가 이렇게 감성적일 수도 있구나"하는 느낌이 든다.
느슨하게 쉽게 쉽게 그리는 그림 같지만, 깨알 같은 작가의 유머, 재치, 감동이 주인공들의 대화 속에, 그리고 페이지 장면마다에 깊숙이 녹아들어 있다. 풍부한 감성이 담긴, 짧지만 여운이 긴 주인공들의 대사, 과감한 대사 생략, 주인공 표정의 클로즈업, 예고편 고지와 같은 작가 자신의 때아닌 등장 등 작가 ‘아다치 미츠루’의 연출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소꿉친구, 첫사랑, 우정, 절친, 삼각관계, 정면대결이라는 소재를 바탕으로 때론 애잔하게, 때론 운치 있게, 때론 가슴 뭉클하게 채워진 페이지는 이 작품을 읽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H2>는 실제 일본 야구선수들을 모델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히로는 ‘구와타 마스미’, 히데오는 ‘기요하라 가즈히로’, 노다는 ‘후루타 아츠야’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H2>에서 히로와 히데오는 다른 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면서 라이벌로 승부를 펼치는데, 실제 모델인 구와타와 기요하라는 1983년에서 1985년까지 같은 ‘오사카 PL학원’에서 맹활약했다. 이 둘은 두 명의 이니셜을 따와 KK콤비로 불렸는데, 일본 고시엔에서 역대 최강 콤비라 한다. KK콤비는 고교 재학 중 참가 가능한 다섯 개의 대회에서 모두 고시엔에 진출, 우승 2회, 준우승 2회, 4강 1회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을 남긴다. 어찌 보면 <H2> 만화보다 KK콤비의 기록이 더 만화 같다.
¶ 이현세 <공포의 외인구단>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남자 주인공 까치가 엄지에게 한 말이다. 까치는 엄지를 만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 말을 지킨다. 불구의 몸이 되어가면서까지...
어머니 없이 술주정꾼인 아버지와 살고 있는 혜성에게 서울에서 전학 온 예쁜 소녀 엄지가 관심을 가지고 잘 대해준다. 혜성은 그런 엄지가 좋았고, 엄지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했다. 엄지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 서울로 돌아가는데 혜성은 엄지가 타고 떠나는 기차에서 볼 수 있도록 들판까지 나와 기어이 얼마 전 자신에게 수모를 안겨주었던 야구팀 선수를 꺾는 장면을 보여준다. 엄지는 혜성의 불굴의 의지와 집념에 감동하며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라고 편지를 통해 격려한다.
그러나 혜성을 못마땅히 여겨 편지를 숨기는 등 엄마의 방해로 혜성과 소식이 끊긴 엄지는 당시 최고의 고교 야구선수인 마동탁과 교제를 한다. 혜성은 엄지의 말대로 야구선수가 되어 지방 고교 야구부를 이끌고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 야구대회에 진출해 엄지와 조우하게 되는데, 이것이 혜성, 엄지, 동탁 세 명의 비운의 삼각관계의 시작이다.
강한 것을 숭배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손병호 감독이 어깨 근육 파열로 투수로서의 생명이 끝난 오혜성, 프로야구에서 퇴출된 배팅볼 투수 조상구, 불의의 사고로 한 팔을 잃은 외팔이 타자 최관, 덩치는 크지만 마음이 여려 우유부단한 포수 백두산, 작고 보잘것없는 안경 낀 내야수 최경도, 그리고 다혈질 사고뭉치인 혼혈아 하국상을 모으고, 무인도에서 상상할 수 없는 지옥훈련을 시켜 최고의 선수로 조련해 낸 것이 공포의 외인구단이다. 공포의 외인구단. 그것은 얼마나 많은 산고(産苦) 끝에 태어났던가. 손감독은 외인구단을 이끌고 서부구단에 들어가 50연승의 기적을 만들어 낸다.
동탁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한 천재적인 타자이자 냉혹한 승부사였지만, 혜성은 엄지를 향한 사랑과 집념을 바탕으로 그야말로 처절한 노력을 통해 마동탁을 야구로 수 차례나 농락한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혜성과 엄지는 죽도록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결국 함께 하지 못하고, 동탁과 결혼할 수밖에 없게 된 엄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끝내 마음을 다잡지 못하는 혜성. 특수훈련을 하고서도 한국시리즈에서 한 번도 혜성을 이기지 못한 동탁은 엄지를 이용하게 되고, 엄지는 혜성에게 한 번만 져달라고 부탁을 한다.
결국 혜성은 한국시리즈의 마지막 게임에서 승부는 물론 자신의 몸까지 망쳐가며 엄지의 부탁을 들어준다. 그 충격으로 손병호 감독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엄지 또한 정신이상자가 되는 비극을 맞게 된다. 불구가 된 채 엄지를 만나게 되는 혜성. 그리고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눈물을 흘리는 엄지와 혜성. 그것을 지켜보는 동탁의 마지막 대사로 만화는 대단원을 장식한다.
“결국은 네가 이겼다. 하지만 결코 내가 졌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넌 네가 원하던 바를, 난 내가 원하던 바를 서로 차지했을 뿐이야. 똑같이 귀중한 존재 하나씩을 잃어가면서... 양보한 게 아냐, 바보야.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던 거야”
¶ 아다치 미츠루 <H2>
쿠니미 히로, 타치바나 히데오, 노다 아츠시는 세이난 중학교 야구부에서 각각 4번 타자, 에이스 투수, 포수를 맡아 팀을 지역대회 연속 우승으로 이끈 주역들이다. 히데오가 야구 명문 메이와 제일고에 진학한 데 비해 중학교 때 퍼펙트게임 2번, 노히트 노런 5번을 기록한 히로는 팔꿈치 이상으로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게 되자 야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 위해 야구부가 없는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노다 역시 허리 문제로 야구를 할 수 없어 히로와 같은 센까와 고등학교에 진학, 각각 축구, 수영을 새로운 스포츠로 선택한다.
하지만 히로와 노다의 팔꿈치, 허리 이상은 돌팔이 의사의 오진으로 판명 나게 되고 야나기, 키네 등과 함께 교장의 반대를 이겨내며 야구 동호회를 야구부로 승격시키고 고시엔 출장을 목표로 싸워나가기 시작한다. 히로는 다시 한번 야구에 청춘을 걸기로 결심하고, 히데오는 “고시엔에서 만나자”며 라이벌로 귀환한 친구를 환영한다.
“하나님이 보고 싶으셨던 거겠지. 나와 히데오의 대결을...”
어릴 적 소꿉친구 사이였던 히로와 히카리. 그리고 훗날 서로 알게 되지만 첫사랑 상대이기도 했던 두 사람. 하지만 그 감정을 몰랐던 히로는 중학교 1학년 때 히카리를 친구인 히데오에게 소개시켜주고 둘의 사랑을 이어 준다. 뒤늦게 자신이 히카리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미묘한 삼각관계를 형성하지만, 히로는 친구를 위해 그 감정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히데오와 사귀고는 있지만 아직 히로에게 마음이 남아 있는 히카리의 마음을 눈치채고 그야말로 절친인 히로에게 묘한 라이벌 의식을 느끼는 히데오. 세 사람 간의 우정과 사랑,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설킨다. 히로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하루카는 히로 아버지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님 딸이다. 투수로서 엄청난 재능이 있는 히로에게 팬으로 끌리다가 정말 좋아하게 되고 적극적으로 대시하지만 히카리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가슴앓이를 한다.
결국 고등학교 마지막 여름, 히로와 히데오는 고시엔 준결승전에서 맞붙는다. 히데오는 히로와 자신과의 사이에 마음의 갈등과 동요를 보이는 히까리에게 히로와 자신 중 하나를 다시 선택하라면서 시합에 나선다. 9회말 2아웃, 히로가 속한 센까와 고교가 2:0으로 이기고 있는 가운데 앞 선 타석에서 모두 삼진으로 물러난 히데오가 다시 타석에 들어선다.
둘의 대결에는 두 영웅의 정면승부, 경기의 승패, 히까리의 선택 등 많은 의미들이 응축되어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삼진을 원하는 투수와 어떻게 해서든 홈런으로 연결시키려는 타자의 대결. 둘은 마지막 눈빛을 주고받는다. 히로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승부구를 던지고 히데오도 온 힘을 다해 방망이를 휘두른다. 둘은 후회 없는 승부를 했고, 그 승부를 통해 히까리에 대한 마음과 각 자가 가야 할 길을 깨닫게 된다. 그 길이란 결국엔 히로가 만들고, 선택한 길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 Epilogue
<공포의 외인구단>과 <H2>는 필자의 인생만화다. 두 작품 다 소장본을 가지고 있고, 지금도 가끔씩 꺼내 보곤 한다. 두 작품 모두 기본적으론 야구만화이지만, 남녀 주인공들의 사랑과 우정과 대결이 스토리 전개의 축이자 바퀴다. 두 작품 모두 서로 사랑이 이뤄지길 간절히 바라는 상대와 맺어지지 못한다. 독자를 아프게 만드는 스토리다.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오혜성이 엄지를 향한 지독한 사랑을 보여줬다면, <H2>에서 히로는 사랑하는 히까리를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며, 말로는 표현하지 않는 가슴 아픈 사랑을 보여준다. 그래서 더 가슴 아프고, 필자로 하여금 히데오보다 히로를 응원하게 만든다.
<공포의 외인구단>은 1986년 이장호 감독의 영화로 만들어져 당시로선 엄청난 관객인 28만 명이 넘게 봤다. 남주인공 까치 오혜성 역은 최재성, 여주인공 엄지는 이보희, 손병호 감독은 안성기가 배역을 맡았다. 1988년에는 속편 영화인 ‘외인구단 2’가 제작되었는데 흥행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2009년에는 '2009 외인구단'이라는 타이틀의 MBC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윤태영, 김민정 등이 출연했다.
<공포의 외인구단>은 만화가 다른 대중문화 영역을 리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트랜스 미디어 콘텐츠의 초창기적 사례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스토리가 탄탄하고 제대로 된 그림으로 이를 받쳐주는 만화라면 영화, 드라마 등의 소스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지금 콘텐츠 시장에서 웹툰 돌풍이 불고, 웹툰 IP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 영화, 게임 등이 활발히 제작 진행되게 된 단초로 생각한다.
<H2>도 일본에서의 높은 인기를 바탕으로 1995년에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이, 2005년 TBS에서 <H2~너와 있던 날들>이라는 제목으로 텔레비전 드라마로 방영되었다. 우리나라 가수나 방송인들 중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델리스파이스’의 <고백>으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