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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성필 Mar 10. 2019

어릴 적 유난히 각별했던 이모네와 사촌형제자매들

아이들과 나누고픈 내 부모님과의 추억 - Episode 50

사회가 점점 핵가족화되고 개인 중심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내 주위엔 친형제는 물론이고 사촌 형제들과도 친한 친구 이상으로 격의 없이 친하게 지내는 가족들이 꽤 있다. 집안 사정의 넉넉함에 관계없이 직계 가족들, 사촌 형제들과 우애 있게 지내는 훈훈한 이야기를 들으면 내 마음까지 풍요로워지는 것 같다.


우리 집도 친가 쪽뿐만 아니라 외가 쪽의 사촌 형제자매들과도 그럭저럭 잘 지내는 편이다. 다만 대부분의 사촌들이 고향 대구에서 지내는데 반해 나를 포함해 우리 집 사남매는 모두 서울로 올라와 생활하고 있다. 그 탓에 어렸을 때만큼 가깝게 왕래하고 자주 어울리지를 못해 안타깝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분 모두 오남매 집안에서 셋째로 태어나셨다. 아버지 위로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누님과 형님이 한 분씩 계셨고 아래로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각각 한 분씩 계신다. 어머니는 위로 오빠와 언니가 한 분씩, 그리고 아래로 여동생이 두 분 다. 외삼촌은 지난해에 돌아가셨다. 아버지 형제 분들은 결혼 후에 대구, 서울, 김천 등 여러 도시에 흩어져 사셨고, 어머니 형제분들은 부산에 사시는 작은 이모님을 빼고는 모두 대구에 거주하셨다.


아버지께서 상대적으로 결혼을 늦게 하시는 바람에 친가 쪽 큰 집의 형들과 나와의 나이 차가 꽤 많이 났고, 작은 아버지 댁은 서울에 있어서 사촌들과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이 아니면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렸을 적의 나는 자연스럽게 외가 쪽의 사촌 형제자매들과 친하게 어울려 지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서도 대구에 살고 계셨는데 어린 시절에 한 때 더부살이를 했던 추억 때문인지 나는 틈만 나면 외갓집을 찾았다. 늘 나를 기쁘게 반겨주시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계셨고, 걸어서 불과 10분 거리에 큰 이모네가 있었던 것도 외갓집을 자주 찾는 이유였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께 미처 사전에 말씀을 드리지 않고 외갓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당시엔 우리 집이 범어동으로 이사를 온 이후였고, 외갓집은 삼덕동에 있었는데 버스를 타고 가더라도 30분 이상 걸리는 거리였다.


내가 왜 혼자 걸어서 외갓집을 찾아갔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아무튼 초등학생의 걸음으로 거의 두 시간가량을 걸어가는 동안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말도 없이 사라져서 경찰에 신고까지 하셨다. 외갓집에 도착하니 외할머니께서 내가 없어진 줄 알았다고 하시면서 걱정하셨던 마음과 동시에 반가움 마음에 눈물까지 흘리셨다.    


어머니 바로 위의 언니이신 큰 이모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는데 나의 초등학교 시절에 이것저것 책이나 학용품도 많이 챙겨 주셨고 가끔씩 기회가 될 때마다 공부하는 요령도 알려 주시곤 했다. 큰 이모는 삼남매를 두셨는데 나는 그중 세 살 터울의 누나와 그리고 두 살 터울의 남동생과 유달리 함께 어울려 많은 시간을 보냈다.


대입 공부에 집중한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는 이모네 식구들과 함께 팔공산 동화사를 자주 다녔고, 여기저기 대구 근교로 함께  놀러도 많이 다녔다. 추석이나 설  명절 때엔 모여서 가족 대항 윷놀이도 하고 고스톱도 쳤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에 큰 이모네 누나에게서 처음으로 고스톱을 배웠다.


큰 이모부와 이모는 누가 봐도 금슬이 참 좋은 부부시다. 예전에는 매일 저녁마다 두 분이 고스톱을 치면서 맞벌이하신 급여 중 일부를 생활비로 내놓으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매일 고스톱을 치시니 실력이 어마어마했다. 어느 명절날 아버지께서 큰 이모네 내외분과 고스톱을 치시다가 지갑에 있는 현금을 모두 털리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더군다나 아버지께서는 지갑 속에 같이 지니고 다니셨던 외국 지폐까지 잃으셨는데 나는 외국 돈이 엄청 값나가는 것인 줄 알고 어린 마음에 무척 속이 상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부산으로 이사하신 작은 이모네는 광안리 바닷가 근처에 오래 사셨다. 여름 방학이 되면 큰 이모네와 우리 가족은 통일호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피서를 함께 떠났다.


부산 이모네에도 나보다 어린 삼남매가 있었는데 우리가 대구에서 내려가면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따로 숙소를 잡을 것도 없이 사촌 형제들끼리 모두 한 방에 모여 살을 부대끼며 잤고, 이삼일 동안 머무르면서 피부가 새까맣게 탈 정도로 해수욕을 즐겼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싱싱한 아나고 회도 실컷 먹었다.


부산 이모도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는데 이모부가 병환으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혼자서 삼남매를 키우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지금은 동생들이 각자의 가정을 이뤄서 잘 살고 있고 이모도 몇 해 전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임을 하셨다. 아버지 퇴임식 때 이모가 부산에서 오셔서 자리를 함께 해 주셨는데 정작 나는 이모의 퇴임식 때 못 찾아봬서 죄송한 마음이다.              


내 여동생들과 처남, 처제까지 결혼 후 모두 서울에 거주하는 탓에 여진이와 지훈이는 친가 쪽과 외가 쪽 사촌들과 비교적 자주 만나고 교류를 하는 편이다. 집집마다 얘들이 하나 아니면 둘밖에 없어서 사촌 형제들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만나면 사이좋게, 재미있게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보기도 좋고 마음도 편하다. 아버지 생신을 즈음하여 몇 년 동안 가을마다 가족여행을 함께 한 덕이 큰 것 같다. 아버지께서 멀리까지 내다보시고 그렇게 하신 것 같다는 생각에 또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나에겐 이제 내 어릴 적 추억이 잔뜩 담긴 외갓집이 없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대학생일 때 돌아가셨고, 외할머니는 백세가 넘게 장수하시다가 몇 해 전에 돌아가셨다.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의 상당 부분을 함께 했던 사촌 형제들도 서울, 대구, 부산, 안양 등으로 흩어져 살다 보니 수년에 한 번 얼굴 보기도 쉽지가 않다.


직장 생활하랴 얘들 공부 뒷바라지하랴 사는 게 바빠서 그런 것은 맞다. 그래도 추억이 더 희미해져 가기 전에 좀 더 자주 만나고 살고 싶은 것은 나만의 욕심일까. 사십여 년 전 광안리 팔각정 횟집에서 부산 이모가 사주셨던 아나고 회가 무척 그리운 오늘이다. 소주 한 잔 곁들이며 추억을 반추해보면 금상첨화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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