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소힘으로 버텨온 사람들의 이야기
조선학교의 선생님들 대부분은 도쿄에 있는 조선대학교를 졸업한, 이른바 선배들이었다. 한국어가 매우 유창한 1세 어르신 선생님이 국어(한국어)를 담당하기도 했다. 1세들은 일본의 수도 한복판에 대학까지 만들어버렸다.
일본에는 ‘화재 현장의 쿠소힘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하면, 불난 집에서 나오는 힘이다. 나는 바로 그 시절 1세들의 쿠소힘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다.
아버지 쪽 할머니는 어느 작은 섬에서 여덟 명의 아이를 부엌에서 혼자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절벽의 돌을 채취하는 일을 가족이 한마음으로 해냈다. 아버지는 이 일을 도우는 과정에서 두 번이나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었다. 아버지의 이 무용담은 앞서 말한 ‘쿠소힘’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짜내는, 극한의 힘이었다.
어머니 쪽 할머니도 만만치 않다. 일곱 명의 아이를 둔 미망인은 일찍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 대신, 야생 원숭이가 사는 산속 깊은 설산에서 숯을 구웠다. 너무 가혹한 환경에 지인의 도움을 받아 홋카이도로 건너갔지만, 매일 이어지는 제설 작업에 절망했고, 결국 간사이 지방의 어느 마을에서 호르몬 가게를 열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철스크랩 사업을 성공시켰다.
그런 86세 할머니의 마지막 유언은 “한국(고향)에 가고 싶다”였다.
십 대에 할아버지와 함께 일본에 건너왔으니, 일본에서 산 시간이 훨씬 길었을 것이다. 고작 십수 년을 살았던 땅인데, 일본에 자식도 손주도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이 그리운 것일까. 할머니의 유골은 유언대로 삼촌들이 한국에 안장했다. 나도 동행했다. 나는 이 일련의 과정에서도 ‘쿠소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를 다시 조선학교로 돌려보자. 조선학교는 전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치원·초·중·고급학교를 포함해, 전성기에는 전국에 약 60교 전후가 존재했다. 현재는 저출산과 재정난의 영향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지금도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다. 각지에 흩어져 살던 재일조선인 1세들이 “어디에서 살든 아이들에게 민족교육을 받게 하고 싶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지역마다 학교를 세워온 역사다.
한편 민단계 한국학교는 수가 많지 않다. 대표적인 학교로는 도쿄한국학교, 교토국제학교 등이 있으며, 전국적으로도 몇 개 학교 규모에 그친다. 조선학교처럼 전국에 널리 분포한 형태는 아니고,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비교적 집중되어 존재해 왔다.
교토국제학교는 최근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고등학교 야구 전국대회인 고시엔대회에서 우승하며, 한국 국가가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쾌거를 이뤘다. 한국인뿐 아니라 프로야구 선수를 꿈꾸는 많은 일본인 학생들까지 이 학교의 문을 두드릴 만큼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쯤 되면 이해할 수 있을까. 조선학교냐, 한국학교냐를 따질 여유는 우리에게 없었다. 우리 동네에 있던 학교는 ‘조선학교’뿐이었다.
동네 일본인 아이들은 아침마다 모여 모자와 책가방을 메고 집단 등교를 했지만, 우리 형제는 조선학교 교복을 입고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대형 버스에는 북한 국기를 연상시키는 디자인과 함께, 크고 당당하게 ‘○○조선초중급학교’라는 글자가 페인트로 새겨져 있었다.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국적이 ‘조선’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특별영주자’ 자격을 가진 외국인이다. 세금을 낼 의무는 있지만, 선거권은 과거에도 지금도 없다. 열여섯 살 때 ‘외국인등록증’을 갱신하기 위해 구청에 가야 했다. 사진을 찍고 지문을 찍었다. (이 지문 날인 제도는 26년 전인 1999년 4월 1일에 폐지되었다.)
조선 국적 사람은 한국 국적을 선택할 수 있다. 일본에서 ‘조선 국적’이란 국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북한 어느 국적도 취득하지 않은 상태를 일본의 등록상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즉, 법적으로는 무국적에 가까운 취급이다. 내가 ‘조선 국적’에서 ‘한국 국적’으로 국적을 변경한 이유는 단 하나, 여권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선 국적 상태로는 원칙적으로 일반 여권을 만들 수 없다. 한국 국적을 취득한 뒤에야 무사히 한국 여권을 만들 수 있었고, 열아홉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향’인 한국을 여행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느꼈던 위화감은 이렇게 점점 구체적인 도전장처럼 모습을 드러냈고, 중·고등학교의 고비마다 “당신은 일본에 사는 외국인이다”라는 메시지를 받아 들게 되었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늘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을 반드시 이겨보겠다는 마음으로 노력했다.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각종 자격증을 땄고, 일본 사회에서 취직해 터프하게 일했다.
오늘 아침, 조선학교 학생들이 고등학교 무상화를 요구하며 1,000명 이상이 집회에 참가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일본의 고등학교 무상화 제도는 국공사립을 불문하고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지원금이 지급되지만, 실제로는 한국학교나 중화학교 일부는 지정을 받아 지원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학교는 제도 도입 초기에는 검토 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013년 이후 지금까지 대상에서 제외된 상태다.
내가 다니던 시절에도 부모님은 매달 약 25,000엔에서 33,000엔 정도의 수업료를 형제 셋 몫으로 내주셨다. 금액만 보면 부유층이 다니는 학교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일본학교에 보내는 편이 훨씬 저렴하고 부담도 적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세는 3세를 조선학교에 보냈다. 수업료를 체납하는 친구들도 많았고, 선생님들의 월급이 밀렸다는 소문도 여러 번 들었다. 그래도 체납 때문에 퇴학당한 학생은, 내가 아는 한 단 한 명도 없었다. 성공한 동포들이 기부로 돕고, 선배 선생님들의 피와 땀이 밴 애국심 덕분이었을 것이다.
내 후배들은 지금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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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学校の生徒へ授業料無償化を」 朝鮮学校の生徒ら 文科省前で600回目の抗議活動(TBS NEWS DIG Powered by JNN) - Yahoo!ニュー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