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두 개인 여자

조선학교에서 사회로, 그리고 한 남자에게로

by 요카


이모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는, 나는 꽤 신경질적이고 밤에 많이 우는 아기였다고 한다. 엄마가 친정에 산후조리를 갔을 때, 아직 미혼이었던 이모가 그것을 목격했다고 하는데, 그 말투가 “옛날이야기 하나 해줄게”라기보다는 “네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잤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들려서 더 강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이모는 평소에 “혹시 마이크 쓰세요?”라고 묻고 싶을 정도로 원래 목소리가 큰 사람이다. 몸짓, 손짓도 미국인처럼 크다. 그런 이모의 발언에 나는 속으로 “이모 목소리 때문에 TV 소리가 전혀 안 들리거든요”라고 반박하면서, 아무리 가족이라도 말은 조심해야겠구나 같은 생각을 하는, 묘하게 냉정한 아이였다.


초등학생 때 나는 개를 쓰다듬고, 밭에서 렌게꽃 꿀을 쪽쪽 빨아먹으며 누워 있곤 했다. 모기에 너무 많이 물려 다리는 긁은 자국으로 달의 크레이터처럼 되었고, 물감은 옷과 손에 튀어 얼굴까지 번져, 페이스 페인팅 못지않은 인간 캔버스가 되어 나타나는 나를 보고 반 친구들은 “불쌍하다”라고 말했다.

“에? 내가 불쌍한 사람이야?” 본능대로 산을 뛰어다니고, 좋아하는 그림을 미친 듯이 그리며 노는 게 왜 불쌍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꽃보다는 떡, 분위기보다는 식욕인 사람이었다. 이 성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키는 반에서 가장 컸지만 달리기는 가장 느렸다. 당시 유행하던 에리마키도마뱀 같은 독특한 달리기 폼 때문에 ‘얀얀 달리기’라는 이름까지 붙어 남자아이들에게 자주 놀림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사람은 우리 부모님이고, 그 부모의 딸인 나도 당연히 위대하다는 식의, 무서울 게 없는 아이였다.


내 잘난 태도는 친구들 사이에서 “재수 없는 키 큰 굼벵이” 취급을 받았고, 결코 인기 있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나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고무줄놀이가 유행하면 집에서 의자에 고무줄을 걸어놓고 미친 듯이 연습했다. 체인링이 유행하면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이기고 싶다기보다는, 하나에 빠지면 내가 납득할 때까지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이었다. 좋게 말하면 장인 기질, 나쁘게 말하면 고집이다.


그동안 “이래라저래라” 한마디도 하지 않던 엄마가 어느 날 말했다. “여자도, 막상 필요할 때는 먹고살 수 있는 자격증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다리가 크레이터가 되든, 온몸이 캔버스가 되든 아무 반응도 없던 엄마의 이 한마디를 무시하면, 왠지 큰코다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약사”가 되자. 고2 겨울이었다.


조선고급학교는 ‘입시’에 특화된 학교가 아니었고, 졸업 후 바로 취업하는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체감상 진학률은 10% 전후였다. 6개 반 중에서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만 모인 반은 딱 하나(문과·이과 구분도 없이). 그 소수 안에, 성적이 중하위권이던 내가 있었다. 하면 된다,라고 믿고 있었다. 역시 근거 없는 자신감이다.


대안학교 취급을 받는 조선학교를 졸업하면 원칙적으로 대학 입시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통신제 고등학교에 다녔다. 평일에는 왕복 3시간 거리의 조선고급학교, 공휴일에는 왕복 3시간 거리의 야간 정시제 고등학교. 과제와 리포트를 해내고, 방과 후에는 학원에 다녔다. 대학검정시험에 합격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왜 이렇게까지 고생해야 하지?”라는 분노를 느꼈다.

시간도 문제였지만, 통신제·정시제 고등학교에 다니고 대검을 치르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원래도 사립학교 수준의 조선학교 학비로 힘든데, 매주 교통비와 교재비를 받을 때마다 억울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애써 덮어두었던 분함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1년 재수 끝에 간신히 합격한 곳은 2년제 영양대학이었다. 인생 첫 좌절이었다. 그래도 엄마가 말한 ‘자격증’은 딸 수 있다. 2년 후 영양사, 취업 후 2년 뒤에는 관리영양사 시험에 합격했다. 관리영양사로 6년 경력을 쌓고, 케어 매니저 자격증(한국의 사회복지사에 해당)을 취득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재일코리안을 위한 요양시설에서 상담원이 되어 있었다.


나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한국 이름과 일본 이름, 두 개가 있다. 재일교포 1세들은 일본 식민지 지배 시기에 노동자로 오거나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온 경우가 많았고, 당시에는 일본식 이름이 아니면 취직도, 집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학교나 직장에서 차별을 겪는 일도 적지 않았고, 경찰이나 관공서에서 불리한 대우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본명으로는 생활이 힘들다” “아이만큼은 같은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다” 는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게 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조선 학교를 졸업하는 18살까지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케로케로, 펄쩍펄쩍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나는 한국 이름과 일본 이름을 마치 스위치처럼 능숙하게 쓰기 시작했다. 일본인 속에 교포 3세가 혼자 있는 상황은, 재수 시절 학원에서 시작해 대학, 회사로 이어졌다.

본명을 말하면, 주변 일본인들이 나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존재”처럼 대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일본 이름을 쓰면, 상대를 속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나는 완전한 아웃사이더였다. 장미에 가시가 있듯,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 괜찮지만,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 다친다. 정신 차려야 했다. 자립해야 했다. 서둘러야 했다.


서른 초반, 남편을 만났다. 한국에서 유학 온 그는 요양시설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고, 그 시설의 상담원이 바로 나였다. 무엇보다, 나와 같은 세 글자 이름을 가진 사람을 고등학교 이후 처음 만나서 순수하게 기뻤다.

그리고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인 그가 조금 부러웠다. 식당에서 밥을 먹기 전에 기도하는 사람을 처음 본 것도 그였다. 장미가 아니라, 매끈한 줄기를 가진 거베라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늘 서둘러 자립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식사 전에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하는 남자를 처음 보았을 때,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지금까지 봐온 3세 친구들이나 일본인 남성들에게는 없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 정체가 궁금해졌다.


하나에 꽂히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고집 센 장인이, 근거 없는 자신감과 장미 가시를 몸에 두르고 타깃을 정했다. 처음에는 사랑이라기보다 호기심에 가까웠다.

결혼 16년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끌렸던 남편의 그 ‘무언가’를 글로 써보기로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 자신도 제대로 정리하고 싶어졌다.

50년 인생을 글로 정리할 준비가, 이제야 끝났다. 설렌다.


나에게 가장 따끔한 한마디로 엉덩이에 불을 붙여준 장본인인 엄마는, 7년 전 암으로 너무도 담담하게 세상을 떠났다. 조금 빠른 거 아니야? 원망도 된다. 그러고 보니, 고2 겨울 “약사가 되자”라고 마음먹었을 때 하지 못한 원망도 하나 있다.


“엄마, 말할 거였으면 중3쯤에 해줬으면 좋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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