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큐피드였다

고향의 집에서 만난 운명

by 요카

일본 효고현 고베시에 ‘고향의 집’이라는 요양원이 있다. 이 요양원은 평범한 요양원이 아니다. ‘일본 국적이지만 태어나고 자란 곳은 한국’이라는, 나와는 정반대의 뿌리를 가진 이사장이 세운 ‘재일 교포’를 위한 시설이다.

이사장의 일본인 어머니는 한국에서 생을 마칠 때 “우메보시가 먹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마지막 순간을 애틋한 마음으로 지켜본 사람이 바로 젊은 시절의 이사장이었다. 전후 일본에 살게 된 1세들 역시 ‘고향’과 ‘김치’를 그리워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런 마음과 높은 뜻으로 세워진 요양시설이 바로 ‘고향의 집’이다.

이 존경스러운 분에 대해 쓰기 시작하면 지면이 모자라니 설명은 여기까지 하겠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자서전이니까. 관심 있는 분들께는 이사장의 자서전『김치와 우메보시』를 추천한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432671


나는 8년간 쌓아온 영양사 경력을 미련 없이 내려놓고 이 요양원에서 케어매니저로 일하기 시작했다. 영양사가 싫었던 것도, 직장이 싫었던 것도 아니다. 왜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느냐 하면, 외할머니인 금순 할머니 때문이었다.

재일 교포 1세인 금순 할머니는 여섯 아이를 키운 미망인이면서도 철 스크랩 사업을 성공시킨 강자였다.(※3장 조선학교 2 참조) 지금보다 훨씬 남성 중심 사회였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일본에서 스크랩 사업을 성공시켰으니, 젊은 시절의 기개는 말 그대로 대단했다.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이 되면 엄마는 우리 남매를 데리고 금순 할머니 집에 갔다. 집은 철조각이 빼곡히 쌓인 넓은 부지 한편에 서 있었고, 의외로 넓고 살기 좋았던 기억이 있다. 그곳에서 본 할머니를 나는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젊었을 땐 분명 아주 아름다웠을 법한 깊은 이목구비의 단정한 얼굴, 미간에는 고생과 고난을 증명하듯 굵은 ‘八’자 주름이 선명했다.


할머니는 글을 읽고 쓰지는 못했지만, 그 덕분인지 어쨌는지 자녀 여섯 명과 열 명이 넘는 손주들의 생일, 남편과 조상의 기일을 정확히 기억했다. 할머니에게 말을 걸면 늘 긴장됐다. 큰 소리로 이것저것 지시하며 제사 준비를 하는 모습은 마치 클라이맥스 장면을 찍는 현장 감독 같았다. 키도 크고 체격도 남자처럼 탄탄해서 흔히 떠올리는 ‘작고 인자한 할머니’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곳은 파라다이스이기도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공장 부지 겸 집에서 사촌들과 페달 달린 자동차를 타고 경주를 하고, 드럼통 안에 숨어 숨바꼭질을 하고, 배가 고플 때까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할 수 있었던 건 모두 할머니 덕분이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어른이 되어 벼랑 끝에 서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 어린 시절의 이런 즐거운 기억이 “너에겐 행복해질 권리가 있어”라며 등을 밀어주는 순간이 있다. 평소엔 눈에 띄지 않다가 필요할 때만 나타나는 비상벨 같은 존재다. 이 글을 쓰며 다시 한번 감사하게 된다.


금순 할머니는 십 대 초 무렵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할아버지와 결혼했고, 일자리가 있다며 일본으로 간 남편을 따라 혼자 배를 타고 일본에 왔다고 한다. “할머니, 결혼하기 싫었어.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엄마랑 헤어지기 싫었는데 시집보냈어. 정말 끔찍한 시대였지.” “일본 오기 싫었는데… 아이고아이고…” 일본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한탄을 늘어놓는 할머니의 얼굴이 선하다.


늑대와 아기 돼지 세 마리 이야기만큼이나 수도 없이 들은 이야기라 “아, 이제 곧 한국어 100% 모드구나. 2장이 시작되는군”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곤 했다. 할머니는 흥분하면 어눌한 일본어에서 유창한 한국어로 바뀌었다. 사촌 중에는 일본 학교를 다닌 아이도 있었고 우리 형제처럼 조선학교에 다닌 아이도 있었다. 조선학교에 다니며 한국어를 이해했고, 게다가 장녀였던 나는 할머니 이야기를 들어주는 유일한 손주였다.(엄마와 삼촌들도 조선학교 출신이지만 반복되는 옛이야기는 이미 주문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한국어를 이해하는 나를 다른 손주들보다 유독 아꼈다. 다른 사람에겐 엄격한 할머니가 나에게만 부드러운 눈길을 보낼 때 묘한 쾌감을 느꼈다. 난공불락의 성을 함락한 장군? 너무 옛날 비유인가. 요즘 말로 하면 난도 높은 게임을 클리어한 프로게이머쯤 되는 기분이었다. 이 관계는 내가 결혼해 한국으로 시집오기 전까지 이어졌다.


할머니는 누구보다 나를 아끼고 응원해 주었다. “요짱은 야무지니까 괜찮아.” 그 말을 들으면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어른이 된 나는 시간을 내 혼자 사는 할머니를 찾아가곤 했다. 100% 한국어 원망을 샌드백처럼 묵묵히 받아주기 위해서. 할머니 이야기를 계속해야겠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의 큐피드니까.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나이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 여든을 넘기며 혼자 살기 힘들어졌고 다리가 약해지고 깜빡깜빡하는 일이 늘었다. 그 익숙한 원망도 낮밤 가리지 않고 혼잣말처럼 반복되기 시작했다. 자존심이 강해 엄마와 삼촌들의 동거 제안을 거절했고, 어르고 달래 집에 데려와도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곧장 택시를 불러 돌아가 버렸다.

결국 참다못한 나는 인터넷에 ‘재일교포, 요양원’을 검색했다. 맨 위에 ‘고향의 집’ 홈페이지가 떴다. 재일 교포 1세와 일본인의 공존, 한일 행사, 김치와 우메보시 식사, 한일 양국 스태프. 모든 게 금순 할머니를 위한 곳처럼 느껴졌다. “이사장님, 일 잘하시네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시 나를 알 리 없는 분에게 완전한 오지랖이었겠지만.


오사카와 고베 두 곳.(지금 도쿄, 오사카 포함 5곳) 고베는 집에서 차로 한 시간. 견학을 갈까, 입소 방법을 물어볼까 망설이다가 아무것도 못 한 채 반년이 흘렀다. 그 사이 할머니 상태는 악화됐고, 엄마와 삼촌들이 지쳐가는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일해볼까.”


정말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인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치매가 진행될수록 할머니는 한국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그곳엔 분명 그런 1세들이 많을 것이다. 한국어를 아는 재일 교포 3세인 내가 가지 않으면 누가 갈까. 할머니에게서 주입된 묘한 선민의식이 나를 움직였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를 부르고 있어!!” 조선학교 졸업 후 아웨이 환경에서 단련된 강한 멘털과 타고난 낙관주의는 나를 ‘선택받은 영웅’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처음 발견한 홈페이지에 1년 뒤 다시 접속했다. ‘문의하기’를 클릭하고 이렇게 썼다. “저는 재일 3세이고, 영양사이며 케어매니저입니다. 여기서 일하고 싶습니다.” 곧 답장이 왔다. “한번 만납시다.”

2005년 4월, 나는 고향의 집 고베에서 케어매니저로 일하게 되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재일 교포 3세라는 나의 이방인 뿌리는 오히려 큰 강점이 되었다. 1세 어르신들의 한국어를 내가 통역했고, 2세 보호자들은 “당신이 있어서 안심된다”라고 말했다.


사람은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입장이 달라진다. 마이너리티이기에 활약할 수 있는 곳은 반드시 있다. 마이너리티이기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로부터 1년 후, 금순 할머니는 내가 일하는 곳에 입소했다. 한국어를 쓰는 친구들과 직원들 속에서 나와 점심을 먹고, 주말마다 찾아오는 가족들에게 여전히 잔소리를 하며 지냈다.


병원에 입원해 돌아가시기까지 6년 동안 “한국에 가고 싶다”라고 말썽을 부리고나, 종종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도 했고, 방이 헷갈린다며 벽에 페인트를 칠해 내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죽어서야 뼈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간 금순 할머니. 참으로 격렬한 인생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름 행복한 노후였다고 믿고 싶다. 지금 우리 둘은 한국에 있다. 참으로 질긴 인연이다.


내가 고향의 집에 취직한 2005년 4월, 이 요양원에 야간 아르바이트로 나타난 한국인 유학생이 바로 지금의 남편이다. 나는 금순 할머니의 이 ‘두고 간 선물’을 인생 최대급 선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선물이 이후 내 인생을 크게 바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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